1392화. 전륜왕
*
한립이 변한 붕새는 열댓 마리 혈교들이 나타나자 날개를 펄럭여 금색 뇌전들을 방출해 뇌전 그물을 만들었다.
새까만 연꽃 위에 앉아 있던 백골 수사는 그물을 보고 비웃었다. 혈교들을 가볍게 처리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핏빛 화염의 바다는 81가지의 오염된 피로 제련한 것으로 그 안에서 만들어진 혈교들도 당연히 평범할 리 없었다.
그때 엄청난 벼락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백골 수사가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혈교들이 금색 뇌전에 휩싸여 애달픈 신음소리만 남기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대 붕새가 장애물을 제거하고 기세등등하게 날아들었다.
“벽사신뢰!”
백골 수사가 재빨리 한 손을 바닥으로 내리쳤다.
콰르릉!
이에 아래쪽의 핏빛 화염 바다가 거센 파도를 일으켜 하늘로 치솟았고 검은 연꽃은 빙글빙글 회전하며 커져 검은 빛구슬로 변해 백골을 보호했다.
쉭!
검은 빛구슬은 별안간 허공으로 스며들어 사라졌고 거대 붕새는 다시 금색 뇌전을 방출해 핏빛 파랑을 제거했지만 백골 수사는 보이지 않았다.
음사귀왕은 영리하게도 한립과 문심봉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순간이동을 해 달아난 것이다.
귀왕의 진원이 끊기자 핏빛 태양도 문심봉의 술법에 제압되어 소멸되었다.
여인이 술법을 거두며 웃음 띤 얼굴로 일어섰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형. 안 그랬으면 불골왕(佛骨王)과 승부를 내기까지 한참 걸렸을 거예요. 그런데 이대로 달아나게 두면 다른 귀왕과 힘을 합쳐 다른 수사의 싸움에 영향을 미칠까 싶은데요?”
“그렇게 둘 수는 없지요. 바로 쫓아가시죠.”
거대 붕새가 금색 뇌전을 거두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답했다. 금색 소인과 배를 빵빵하게 채운 거대 담비도 한립과 문심봉 곁으로 돌아왔다.
불골왕은 그들이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중간 산봉우리로 가서 마염(魔焰)으로 두 겹의 보호막을 태우고 있었다.
보호막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쿵! 소리를 내며 무너졌고 아래쪽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문심봉과 한립의 둔광도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몇 번 번득이며 중간 산봉우리에 이른 그들은 아래쪽을 보고 움찔했다.
청수한 중년인과 벽영이 싸움을 하지 않고 그냥 마주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옥석으로 만든 탁자 위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황금 바둑판 위에는 검은 돌과 하얀 돌이 가득했다.
벽영과 중년인은 말없이 신중하게 바둑에 임했고 불골왕은 중년인 옆에 얌전히 서있었다.
한립과 문심봉도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 차분히 벽영의 곁으로 내려갔다. 이에 서금충왕과 담비는 그들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두 분이 같이 오셨습니까? 약간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 안심할 수 있겠군요.”
벽영이 고개를 들어 한립과 문심봉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벽 형,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문심봉이 미간을 좁히고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닙니다. 전륜 수아와 손속을 나눠보니 서로 상극의 공법을 익혀 상대를 죽이지 않고는 승부를 내기 어렵겠더군요. 그래서 이 바둑으로 승부를 보기로 약속했습니다. 물론 다른 수사들이 먼저 승부를 내면 바둑을 계속 둘 필요는 없겠지만요.”
“당신이 흉사왕을 죽였습니까?”
맞은편에 앉은 전륜왕(轉輪王)도 고개를 들어 한립을 보고 물었다. 눈동자에 핏빛이 반짝이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어두침침했다.
“그렇습니다. 수사께서 그를 대신해 복수라도 하시겠습니까?”
“일대일 승부에서 죽임을 당했으면 그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복수를 한단 말입니까.”
“전륜 수사, 한 수사는 흉사왕을 죽였으니 당연히 승리하였고, 불골 수사 역시 먼저 대결장소를 벗어났으니 패배한 셈입니다. 이견이 있으십니까?”
벽영은 들고 있던 바둑돌을 내려놓고 미소를 머금었다.
“두 번의 대결은 그쪽이 이긴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두 수사와 불골왕이 본왕 앞에 나타난 이상 이곳을 떠나 다른 대결에 영향을 끼치게 둘 수는 없습니다. 셋 모두 다른 산봉우리의 승부가 날 때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으로 하지요.”
“이곳에요? 알겠습니다. 제가 모두를 대표해 약속드리겠습니다.”
전륜왕의 말에 벽영은 잠시 침음하다 동의했다.
한립과 문심봉은 어차피 부탁을 받아 결전대전에 참가한 이들이었다. 벽영이 어째서 상대의 요구를 수락했는지 몰랐지만 반대할 리 없었다.
불골왕도 눈에서 녹색 불길을 이글거릴 뿐 침묵했다.
탁!
전륜왕은 벽영의 대답에 흡족하게 웃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바둑돌을 움직였다. 벽영도 상대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다음 수를 고민했다.
한립이 흥미롭게 여겨 바둑판을 살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범한 수준인 그가 보기에도 형세가 아주 복잡하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벽영과 전륜왕은 그가 평생토록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바둑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분명했다.
‘하긴 그러니 바둑으로 대결의 승패를 정하자 생각했을 테지.’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이 힐끗 문심봉을 보았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둑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벽영과 전륜왕은 심사숙고를 거쳐 바둑을 두었기에 금방 반시진이 흘러갔다.
콰르릉!
가장 오른쪽 산봉우리의 보호막이 허물어지고 빛줄기 두 개가 앞 다투어 중간 산봉우리로 날아들었다.
“뇌 수사가 패했군요.”
문심봉은 앞에서 쫓기듯 날아오는 자를 알아보고 얼굴을 굳혔다.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는 몸 절반이 너덜너덜했다. 게다가 살점이 드러난 피부에 괴이한 검은 악귀 머리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 뒤를 쫓는 자는 굉장히 아름다운 절색의 소녀였다.
보라색 옷을 입은 열예닐곱 살 소녀는 백여 마리의 악귀 얼굴에 둘러싸여 음풍을 휘날리며 뇌 수사를 추격했다.
그들은 한립이 위치한 중간 산봉우리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은갑 사내가 먼저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절색의 소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백골머리들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뇌 형, 괜찮으십니까?”
벽영이 고개를 들고 은갑 사내를 보고 물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은 괜찮은데 승리를 따내지 못해 벽영 형을 실망시켜드리게 되었습니다. 저 여인의 신통이 너무 괴이해서 전력을 다했는데도 이리되고 말았습니다.”
은갑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한 수사와 문 선자께서 승리를 거두었으니까요. 음사십왕들 사이에도 실력 차이가 있을 게 아닙니까? 어차피 다섯 경기를 다 이길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서 부상을 치유하시지요.”
“한 수사와 문 선자께서는 승리하였다고요? 그것참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안심하고 우선 원기를 회복하고 있겠습니다.”
벽영의 말에 은갑 수사는 가까운 곳에 털썩 앉아 은빛 뇌전을 일으켰다. 중년 사내는 절색 소녀와 전음으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미소가 짙어졌다.
“전륜왕, 미리 약속한 대로 저들도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벽영이 소녀를 살피고 얼른 말했다.
“물론 그리할 것입니다! 아, 잊고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는데, 마지막 산봉우리에서 대결 중인 칠규왕(七竅王)은 십왕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입니다. 저만해도 그 패도적인 신통에는 미치지 못하고요. 상대의 실력이 부족하다면 그냥 지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요.”
“칠규 수사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혈살 수사도 우리 세계에서는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강자입니다. 누가 죽고 누가 살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상대의 도발에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던 벽영이 평정을 회복하고 답했다.
“그런가요? 허허, 그럼 어디 기다려 봅시다.”
이렇게 둘의 바둑은 계속되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하룻밤을 꼬박 새었을 때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싸우고 있는 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벽영과 전륜왕의 바둑이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수 한 수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고민했다. 그 모습에 한립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자 바둑돌을 내려놓으려던 벽영이 고개를 들어 마지막 산봉우리를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다른 수사들도 고개를 들었다.
쿠릉!
마지막 산봉우리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상반신은 건장한 사내이고 하반신은 검붉은 전갈인 반인반갈(半人半蠍)의 괴물이 서서히 날아왔다.
괴물은 양손에 검은 물결처럼 생긴 괴이한 검과 말라서 쪼글쪼글해진 머리통을 들고 있었다.
머리통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립은 한 눈에도 그 머리통이 그들과 이곳에 같이 온 혈살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혈천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강자가 귀왕과의 일대일 전투에서 참살당한 것이다.
벽영과 문심봉 그리고 은갑 사내도 그것을 보고 난색을 표했다. 괴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이 선 산봉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허, 칠규왕이 승리했나 봅니다. 그를 상대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끌다니 벽 수사의 동료도 확실히 비범한 실력을 지녔겠군요.”
중년 사내가 그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혈살 수사가 패배해 죽임을 당할 줄은 몰랐으나 그쪽이 강자결전에서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벽영이 침묵하다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
“맞습니다. 칠규왕의 승리로 저도 더는 바둑을 둘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요. 이번 강자결전은 우리 명계가 2승 3패를 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중년인은 뜻밖에도 바둑판을 밀고 일어나 담담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럼 이전의 약속대로…….”
“약속대로 소세계의 이권은 우리가 4할을 나머지는 귀측이 가져가시면 됩니다. 물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시 전쟁을 벌여 한쪽이 완전히 소세계를 장악할 때까지 싸울 수도 있고요.”
“그럴 것 없습니다. 본 맹은 소세계의 이권 6할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그러나 혈살 수사가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같은 경지에 이르면 목숨을 보전할 방법 한두 개쯤은 다 갖고 있기 마련이지요. 이번 강자결전에서 두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정말 죽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벽영의 말에 중년 사내가 나른히 말했다.
“그러기를 바라야겠지요. 이번에 수사와 실력을 겨뤄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표정을 풀며 벽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니까? 저는 언젠가 여기 한 수사와 실력을 겨뤄보고 싶습니다. 단시간 내에 흉사왕을 참살한 실력이라면 칠규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중년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한립을 쳐다보았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저 운이 좋아 그리된 것입니다.”
한립은 그러든 말든 웃으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
“승부도 결정이 되었으니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서 가서 소세계의 구역을 내드릴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전륜왕이 긴말하지 않고 인사를 하자 벽영 등도 말리지 않고 네 명의 귀왕들이 검은 기운이 가득한 백골산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휴우, 귀왕들이 약속을 지키기는 할 모양입니다. 안배해둔 다른 방법을 취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지요. 혈영 수사 말고 다른 수사 분들까지 일을 당했으면 이번 결전은 득보다 실이 더 클 뻔했습니다.”
벽영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벽 형, 혈살 수사는 정말 명을 달리한 것입니까? 그 엄청난 혈도신통에 상대를 죽이지는 못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을 텐데요. 일전에 들으니 혈살 수사는 무시무시한 화신을 제련해냈다고 합니다. 용모가 본체와 똑같고 실력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요.”
문봉심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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