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9화. 다섯 음마(陰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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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경계선에 위치한 다섯 산봉우리에 각각 병사들과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귀물들이 나타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반나절 만에 양측의 진법사들은 금제 설치를 완료하고 자리를 바꾸어 상대편이 설치한 곳을 살펴보았다.
몇 시진이 흘러 진법사들이 철수한 산봉우리에는 병력 일부만이 남아 경계 업무를 수행했다.
다시 하루가 지나, 한립은 임시 요새의 대청에서 드디어 혈천대륙의 유명한 최강자인 혈살을 만나게 되었다.
평범하게 생긴 중년 사내는 회색 장포를 걸치고 핏빛 띠로 머리를 올려 묶고 있었다.
한립은 흐릿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피 냄새에 흠칫 놀랐다. 그가 그와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벽영의 안내로 다들 대전을 나서 고공의 섬으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비행 법기는 그들을 태우고 어딘가로 향하다 멀리 가지 않고 그대로 멈춰 섰다.
경계선 반대편에서 쿠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백골 산봉우리에서 검은 기운이 번득 날아올랐다. 그 안에는 체격차가 상당한 다섯 그림자가 들어있었다.
벽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관찰했고, 한립을 비롯한 섬 위의 나머지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식경이 흐르고 나서야 산봉우리를 지키던 영계 병사들과 귀물들이 흩어져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것을 보고 벽영이 다른 수사들을 향해 포권을 해보였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승패를 떠나 약속한 보수는 빠짐없이 드릴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혈살이 담담히 웃고는 뜻밖에도 먼저 핏빛 빛줄기로 변해 다섯 산봉우리 중 하나로 쏘아져 나갔다.
“제가 원하던 물건도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럼요, 뇌 형. 진작 준비해 두었으니 결전 후에 챙겨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뇌 씨 성의 은갑 거한도 벽영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뇌운(雷雲)으로 변해 날아갔다.
문심봉은 빙긋 웃으며 품에 안고 있던 작은 짐승을 던졌다. 짐승은 등 뒤로 날개가 자라나며 거대한 은색 담비로 변했다.
은색 담비가 그녀를 태우고 날개를 펄럭여 은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이번에는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신형이 흐릿해졌다고 느낀 순간 그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좌측에서 두 번째 산봉우리 위였다.
다른 이들이 전부 결전을 치를 산봉우리를 고르자 벽영은 공교롭게도 중간 자리가 남겨진 것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그는 커다란 새라도 된 듯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그곳으로 직접 날아갔다.
그들이 움직이자 상대편에서도 검은 기운이 다섯 덩어리로 갈라져 날아들었다.
한립은 산봉우리 정상에 두 발이 닿자마자 고공에서 검은 기운이 바람소리를 내며 하강하는 것을 보았다.
쿵!
괴이할 정도로 체구가 큰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흠…….’
그는 사대를 아래위로 훑고는 눈썹을 끌어올렸다. 키 큰 인영은 음산한 검은 보호막을 두른 것처럼 제대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대략적인 윤곽으로 머리 위로 한 쌍의 굽은 뿔이 솟아 있고 팔과 다리가 보통 사람보다 길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붉게 번득이는 상대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만황짐승을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흉사왕(凶司王)을 대결 상대로 고르다니 훌륭한 선택이다. 잠시 후에 고통 없이 죽여주지!”
키 큰 인영은 흉흉한 눈빛을 보내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흉사왕, 당신의 실력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하게 답했다.
웅웅!
이때 산봉우리 사방에서 진동이 일고 백여 개의 빛기둥이 흙 속에서 솟아올라 두 겹의 오색 보호막을 형성했다.
한립이 방출한 의식이 보호막에 튕겨 돌아왔다.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이 되어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결전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뜻이었다.
크하하학!
상대편 인영도 고개를 들어 힐끗 보호막을 확인하고는 낮게 포효했다. 방대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새까만 돌풍으로 변해 치솟았다.
키 큰 인영이 돌풍을 뚫고 나오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키가 보통 사람의 두 배에 이르렀고 소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거대 귀물이었다.
회백색 피부에 가시가 박힌 새까만 갑옷을 걸친 귀물은 정체 모를 재료로 만들어진 혈홍색 낭아봉(狼牙棒)을 들고 있었다.
코청에는 구멍을 뚫어 누렇게 빛나는 구리 고리를 달고 있었다.
“흉수의 몸을 빼앗아 수련을 하셨군요. 흥미로운 방법입니다. 그럼 육체에 대단히 자신이 있겠습니다.”
“자신이 있을 만한 몸인지 직접 붙어보면 알거다.”
가벼운 웃음기가 실린 한립의 말에 흉사왕이 광소를 터트렸다. 흉사왕은 핏빛 낭아봉을 붕! 돌려 허공을 연달아 내리쳤다.
콰르르릉!
한립 머리 위로 폭음이 들렸다. 엄청난 파동과 함께 누각 크기의 낭아봉 허상들이 떨어져 그를 으깨려 들었다.
낭아봉 허상들이 닿기도 전에 괴력이 광풍처럼 몰아쳤다. 한립은 고개를 들어 올려 공격을 확인하지도 않고 금색 주먹을 대충 위쪽으로 뻗었다.
금색 주먹 허상이 날아가 떨어져 내리는 괴력과 맞섰다.
쿠쿠쿵!
핏빛 기운의 파랑과 금색 빛이 교전하다 낭아봉 허상들과 금색 주먹 허상이 동시에 흩어졌다.
“몸이 상당히 튼실하구나.”
경시하는 기색이 가득하던 흉사왕이 동공을 수축했다. 조금 전 공격에 1, 2할의 힘밖에 쓰지 않았지만 상대도 대충 주먹질 한 번을 한 것뿐이었다.
명계에서 흉포하기로 이름난 흉사왕으로서는 의외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립은 곧장 한 손으로 허공을 쥐어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푸른 장검이 떠올라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푸른 실들이 폭발적으로 날아갔다.
푸른 실들의 습격에 흉사왕은 낭아봉을 횡으로 들고 큰 소리로 포효했다. 포효소리와 함께 앞쪽 허공이 일그러지고 두꺼운 반투명의 보호막이 만들어졌다.
푸른 실들이 그 위에 떨어져 아무 소리도 없이 흡수되었다. 바다에 흙을 뿌린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립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고 그는 푸른 장검을 두 배로 키워 휘둘렀다.
쇄액!
거목 크기의 장검 허상이 흉사왕의 머리를 노리고 베어 들어갔다. 흉사왕은 코웃음을 치며 머뭇거리지 않고 낭아봉을 움직였다.
귀곡성이 퍼지고 낭아봉에서 검은 기운이 새어 나와 흑룡(黑龍)으로 변했다.
쾅!
푸른 장검 허상은 흑룡의 날카로운 발톱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흉사왕이 다시 한번 낭아봉을 휘두르자 흑룡이 포효하며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흑룡을 보고도 한립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우웅!
그의 몸속에서 푸른 비검들이 쏘아져 나와 허공에 거대한 푸른 연꽃을 만들어냈다.
한립이 검결을 발동하자 검으로 이루어진 연꽃잎이 천천히 만개하며 날아드는 흑룡을 난도질했다.
흑룡은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갈라져 폭발했다.
“하하, 실력이 나쁘지 않은데? 본 왕과 실력을 겨뤄볼 만하다.”
흉사왕은 흑룡이 부서진 것에 분노하기는커녕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말을 하는 중간에 낭아봉을 횡으로 들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팟.
핏빛을 가득 머금은 낭아봉이 깃발로 변했다. 백골 깃대에 핏빛 안개로 이루어진 깃발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흉사왕은 핏빛 깃발을 고공으로 투척했다.
콰르릉!
깃발 표면에서 검은 뇌전들이 몰려나오고 핏빛 안개가 뭉쳐 금빛 찬란한 해골머리 다섯 개를 만들어냈다.
커다란 해골머리들은 두 눈에서 핏빛 화염을 반짝이고 입에서는 녹색 빛을 분출했다.
“이게…….”
낯선 광경에 한립은 눈을 크게 떴다.
“본 왕이 이전에 죽인 강적들의 원영으로 만든 전정한 음귀(陰鬼)들이다! 으하하, 네가 내 손에 들어오면 여섯 번째 음귀가 될지도.”
흉사왕은 해골머리들을 가리키자 그 즉시 모든 해골머리들이 밝은 금빛 속에서 악귀 요물로 변했다.
보라색깔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손톱이 길게 자라난 요물들은 전신에서 핏빛 화염을 일으켜 평범한 대승기 수사와 맞먹는 기운을 뿜어냈다.
“가라.”
흉사왕의 분부에 금색 요물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금빛으로 쏘아져 나갔다.
“적의 원영으로 음시를 만드는 수법은 정말 처음 봅니다. 허나 수사만 조력자를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한립은 상대가 아무리 도발을 해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의 소매 속에서 금빛이 빠져나와 피부에 자금색 문양이 새겨진 금색 소인으로 변했다.
서금충왕, 금동이었다.
“저들을 자유롭게 해주거라. 네 신통이면 할 수 있겠지?”
한립은 담담히 물었다. 그 말에 금색 소인은 냉랭히 다섯 악귀 요물을 보고 곧장 허공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동시에 무형의 검기들이 소인의 몸에서 분사되어 날아갔다.
후우우우!
다섯 요물들은 요상한 소리를 냈고 그 중 한 마리가 손톱이 길게 자란 두 손을 검기들 틈에서 휘둘렀다.
서걱! 서걱서걱!
열손가락은 물론 팔뚝이 금색 검빛에 잘려 산산조각이 났다. 금색 검기의 날카로움에 악귀 요물의 단단한 육신도 버티지 못했다.
그 모습에 요물이 크게 놀라 몸을 틀어 사라졌다. 나머지 네 요물이 입을 쩍 벌려 검은 뇌화를 뿜어내 검은 뇌화의 물결로 금빛을 공격했다.
중간에서 검은 기운과 금빛이 요란하게 번득였다. 금빛에서 파공음이 들리고 열댓 개의 굵직한 검빛이 일직선을 이루어 동시에 검은 기운을 베어내 큰 구멍을 만들었다.
멈추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자 구멍에 파동이 일고 방금 달아났던 팔 잘린 요물이 나타났다. 중상을 입었던 두 팔은 이전과 다름없이 회복되어 있었다.
요물은 서늘하게 눈을 빛내고 입에서 핏빛 뼈 구슬을 분출했다.
팅!
뼈 구슬이 무슨 보물인지 금색 검기들이 공격을 하면 튕겨 나왔다. 거기다 검기들은 핏빛에 잠식이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구슬은 보물을 오염시키는 강력한 신통을 지니고 있어 빙글빙글 회전하며 검은 기운을 불러내 다시 나타난 요물까지 뒤덮었다.
검기는 더 이상 뼈 구슬이 지탱하는 검은 기운을 잘라내지 못하고 검은 기운도 금색 검빛을 어쩌지 못했다. 두 기운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부딪치며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엄청난 일들이 한립과 흉사왕 사이에서 순식간에 벌어졌다.
흉사왕은 금색 소인이 나타난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다섯 음귀들이 간신히 검기들을 막아내는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어떤 영수기에 이렇게 실력이 대단한 것이지? 기운이 낯이 익는데…….”
“그걸 제가 말할 것 같습니까?”
“흥, 본 왕이 말하게 만들 것이다!”
태연한 한립의 대답에 흉사왕이 분노해 수결을 맺었다. 검은 기운들이 실뭉치처럼 등 뒤에서 피어올라 광활하기 짝이 없는 악귀 얼굴로 변했다.
입을 벌린 악귀 얼굴은 검은 천을 나풀나풀 내뿜었다. 모호해진 검은 천이 공간을 건너뛰어 한립 지척에 나타났을 때 그의 발아래에서 파동이 일고 회색 보호막이 떠올랐다.
오행의 힘을 상쇄해주는 원자신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쨍강!
검은 실이 가볍게 내리치자 회색 보호막이 도자기 깨지듯이 박살 난 것이다. 이어서 검은 실들은 한립을 빙글빙글 감아 검은 고치로 만들었다.
화르륵!
검은 고치 위로 핏빛 화염이 타올라 커다란 불구슬이 되었다. 그러나 흉사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피비린내가 풍기는 먹처럼 시커먼 거대 도끼를 불러내 불구슬을 향해 휘둘렀다.
촤악!
불구슬 위로 도끼에서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빛이 떨어졌다.
탱!
금속성의 충돌음이 울리고 날카로운 빛은 그대로 튀겨나가 없어졌다.
크아앙!
불구슬을 뚫고 포효소리와 함께 털이 북슬북슬한 여섯 주먹이 튀어나왔다. 핏빛 화염위로 솟구친 한립은 이미 삼두육비의 금털 거원으로 변신해 있었다.
온몸에 은색 화염을 두른 거원의 여섯 개의 눈이 싸늘하게 흉사왕을 노려보았다.
‘저런 공격을 받고도 멀쩡하다고?’
흉사왕의 얼굴 근육이 꿈틀했다.
다음 순간, 거원이 여섯 개의 주먹을 마구 내질러 무수히 많은 금색 주먹 허상을 날렸다. 금색 주먹 허상들은 도중에 빛구슬로 변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흉사왕은 코웃음을 치며 허공에 보호막을 만들어냈고 그 위로 금색 빛구슬들이 미친 듯이 떨어졌다.
퍼퍼퍼퍼펑!
주먹 허상이 변한 빛구슬들은 충돌하는 순간 폭발하며 무서운 힘을 방출했다. 흉사왕의 보호막은 폭발이 계속되자 빠른 속도로 틈이 생기고 있었다.
쩌정!
결국 보호막이 버티지 못하고 이후로 쏟아져 내리는 빛구슬은 흉사왕 본체를 노렸다.
흉사왕은 뜻밖에도 피하지 않고 손에 든 검은 거대 도끼를 횡으로 휘두른 다음 검은 빛 속에서 거대 뼈 방패를 불러냈다.
등 뒤에 떠있던 광활한 악귀 얼굴이 흐릿하게 사라져 검은 뼈 방패 위에 나타나 입을 벌렸다. 이에 무지막지한 흡입력이 발생했다.
잔뜩 날아들던 금색 빛구슬들은 악귀 얼굴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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