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화. 결전 임박
*
파앗!
또 다른 계면.
울창한 수목들이 둘러싸인 진법 안에서 은빛과 함께 한립 일행이 전송되었다.
“한 형, 와주셨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인근의 나무 한 그루가 좌우로 갈라지며 노인과 여인이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누런 피부의 녹색 장포 노인은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했고, 수려하고 단정한 외모의 묘령 여인은 품에 은빛 털을 지닌 작은 짐승을 안고 있었다.
“벽영 수사?”
한립은 노인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 물었다.
“맞습니다! 팔귀서불도를 이용해 뵈었었지요. 이번 강자결전은 한 형만 믿겠습니다.”
“아닙니다. 대결에 임하기로 약속드렸으니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지요.”
한립의 대답에 벽영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묘령의 여인을 소개했다.
“본 맹의 문심봉 장로십니다. 환심문(幻心門) 출신으로 혈천대륙의 본맹 장로 중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이지요. 이번에 결전에 출전할 분입니다.”
“환심문이라면 들어보았습니다. 혈천대륙 북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문으로 문하의 제자가 많지는 않지만 동급 수사 사이에서는 따를 수가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한립이 이채를 띄고 묘령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평안하고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 년간 혈천대륙을 유람하고 다닌 덕분에 큼직큼직한 세력과 유명한 수사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환심문 같은 거대 세력의 강자가 뜻밖에도 혁련상맹의 장로를 하고 있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립의 의혹을 읽었는지 문심봉이 빙긋 웃고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여기실 것 없습니다! 본 종의 개파 사조께서 실은 상맹 출신이십니다. 그러니 환심문은 건립된 순간부터 상맹과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면 맞겠지요.”
“그랬군요. 보기 드문 일이라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제야 한립도 납득이 되었다.
“한 형, 일단 노부의 거처로 가서 휴식을 취하시지요. 강자결전까지 약속된 시간이 두 달가량 남았으니 뇌 수사와 혈살 수사도 머지않아 도착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시고요.”
벽영은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로 안내하며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러겠습니다.”
한립이 미소로 화답하며 벽영과 문심봉을 따라 마치 요새와 비슷하게 생긴 웅장한 건축물 앞에 이르렀다.
“이곳이 본 맹이 이 세계에 건립한 36개 대형 거점 중 한 곳입니다. 명계의 귀물들이 장악한 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 거점이기도 하고요. 저쪽으로 백만 리만 가면 귀물들 천지입니다. 결전을 치를 장소는 쌍방이 장악한 구역의 경계지역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벽영은 묻기도 전에 필요한 정보를 콕콕 짚어 알려주었다. 요새 대문 앞을 족히 백 명이 넘는 중, 고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밖에도 가파른 절벽처럼 생긴 높은 성벽 위로 반인반수의 시커먼 괴뢰들이 돌아다녔고 요새 상공에는 각양각색의 금제파동이 어른거렸다.
요새 경비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벽영이 직접 안내를 하자 대문 병사들이 예를 올리고 뒤로 물러났다.
* * *
반 시진 후.
한립은 요새 안의 독립된 소형 석탑에 거처를 마련하고 밀실로 들어갔다.
강자결전 전까지 주과아와 화석노조가 돌아가며 석탑을 관리하고 그는 밀실에서 기운을 북돋우기로 한 것이다.
* * *
두 달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한립이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는데 바깥에서 주과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 선배님, 벽영 대인이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강자결전을 치를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알겠다. 바로 건너가마. 이번 결전은 위험해서 데려갈 수 없으니 화석과 같이 남아 있거라.”
한립은 몇 마디 당부하고는 곧장 푸른 빛줄기로 변해 석탑을 벗어났다.
그는 요새 중심부의 전당 안에서 드디어 벽영과 문심봉 외에 은색 갑옷을 입은 마른 사내를 만나보게 되었다.
“이쪽이 뇌원 형이십니다! 본 맹의 뇌명대륙 책임자를 맡고 계시지요. 혈살 수사는 오는 도중에 성가신 일이 생겨 늦어도 내일까지는 도착할 거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희 먼저 움직이려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벽영은 네 명의 수사들을 서로서로 소개해주었다.
“이번 결전을 담당하는 것은 수사신데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가 없지요.”
은갑 사내가 무표정하게 답했고, 한립과 문심봉도 아무런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행은 잠시 한담을 나누다 대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건물 밖에는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빼곡하게 도열해있었고, 요새 상공에는 섬처럼 거대한 비행 법기들이 열댓 개나 떠있었다.
벽영의 명에 병사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섬’으로 향했다.
“겨우 이들만 데리고 가는 겁니까?”
은갑 사내가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이들만 가지만 보름 전에 적당한 위치에 인원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귀물들이 약속을 어기고 딴마음을 품을지 모르니까요.”
벽영은 신속하게 대답했다.
쿠쿵!
그들도 가장 큰 섬에 오르고 비행 법기들이 출발했다. 반나절 후 열댓 개의 섬들은 이상해 보이는 산맥 위에 멈추었다.
산맥 중간에 무형의 벽이라도 새워져 있는 것처럼 한쪽은 녹음이 푸르고 새소리와 꽃향기가 가득한 반면, 반대쪽은 검은 기운과 음산한 바람 속에 귀곡성만 울려 퍼졌다.
딱 그 경계면에 멈춰선 병사들은 분분히 뛰어내려 수결을 맺거나 진법 법기를 꺼내 초대형 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부는 색색의 빛구슬을 투척하기도 했다.
콰르릉!
높다란 성벽 안에 각양각색의 건물들이 떨어져 쿵쿵! 자리를 잡고 소규모 요새를 만들었다. 또한 병사들의 저물탁 속에서 무장 꼭두각시들도 빠져나와 순찰을 돌았다.
한립도 섬을 빠져나와 분명하게 나뉜 경계면을 살폈다.
“보시다시피 꼭 다섯 손가락을 닮은 이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이번 결전 장소입니다. 대결이 시작되면 다섯 명이 각각 다른 봉우리로 가게 되는 것이고요. 쌍방 수사가 모이면 각자 세력의 진법법사가 동시에 나서서 미리 펼쳐둔 방어 금제를 발동하게 됩니다. 결투를 벌이는 사람은 그 안에 잠시 갇히는 셈이지만 한쪽이 ‘항복’이라고 말하거나 죽으면 자동으로 금제가 풀리게 됩니다.”
벽영이 진지하게 강자대전의 진행과정을 말해주었다.
“상대방에서 금제에 손을 써 두지는 않겠지요?”
문심봉이 눈을 반짝이며 불쑥 입을 열었다.
“하하, 다섯 경기장의 금제가 모두 동일하고 비교적 간단해서 양측의 진법대사가 한눈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경기에 임하셔도 됩니다.”
“먼저 승부를 낸 다음 다른 사람의 경기에 개입해도 되는 것입니까?”
이번에는 한립이 물었다.
“미리 이야기를 나눈 바는 아니지만 소세계의 이권을 나누기 위한 결전이니 총체적인 실력을 봐야겠지요.”
벽영이 짧은 수염을 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이해했습니다.”
상대의 모호한 대답에 한립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대결은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상대를 이기거나 죽이기 위해 어떤 신통과 보물도 사용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정도 수행에 이르면 상대를 이기기는 쉬워도 죽이기는 어렵지요. 거기다 적들도 만만치 않고 낯선 비술과 공법을 사용할 것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벽 형,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곳에 강력한 귀물과 한두 번 겨뤄보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이번에는 관련 공법과 상극인 보물을 준비했으니 효과가 있을 거라 봅니다.”
문심봉은 부드럽게 품에 안은 짐승을 쓰다듬었다.
“문 선자의 신통은 원래도 귀물과 상극이라 알고 있는데 따로 특수한 보물까지 준비하셨다니 기대가 큽니다.”
벽영이 그 말을 듣고 아주 좋아했다.
“그야 모르지요. 음사십왕은 상대편 계면에서는 최강자라 들었습니다! 직접 손속을 겨뤄봐야 승패를 가늠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하, 겸손하십니다. 허나 이곳에 모인 우리 다섯도 만만치 않습니다. 분명 흡족한 결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 일단은 임시 거처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시고 혈살 수사가 도착하는 대로 다섯 산봉우리에 진법 설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마 명계의 귀물들은 벌써 와있을 겁니다.”
벽영이 검은 기운으로 어두침침한 쪽을 쳐다보았다.
* * *
그 시각, 검은 기운 속에 우뚝 솟은 하얀 산봉우리들.
산봉우리들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가 가득하고 무수히 많은 악귀 그림자와 음기를 품은 혼백들이 돌아다녔다.
영목신통을 지닌 수사라면 음풍을 뚫고 하얀 산봉우리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백골이 쌓여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산봉우리들에는 도깨비불이 번들거렸다. 산봉우리에 뚫린 출입구로 흉흉한 얼굴을 지닌 귀물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중 한 곳은 다른 산봉우리와 달리 뼈 갑옷을 입은 수천 마리의 악귀들이 병장기를 들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혈홍색 전당 안.
모호한 검은 그림자가 새까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고작 소세계 하나를 위해 우리 다섯이 여기까지 오고! 상대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 같은데요. 그냥 백만 음린군(陰麟軍)을 내주시면 저 혼자서도 싹 정리할 수 있다니까요.”
훤칠하게 키가 큰 검은 그림자가 불만을 토로했다.
“상대를 너무 얕보아서도 안 된다니까 그러십니다! 저 생령들이 그리 만만했으면 이런 대결이 성사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번에 저들도 최강자를 엄선해 대결에 임할 테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요. 괜히 지고 돌아가 천륜왕과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사거나 명웅 형님께 변명할 일을 생각해 보세요.”
또 다른 호리호리한 인영이 담담히 충고했다.
“에이, 그래도 쓸 만한 것들을 뽑아 출전시킨다니 다행입니다. 마침 오음쇄심추(五陰鎖心錘)에 불어넣을 강력한 정혼 하나가 부족했는데 이번에 상대를 격살하면 재료는 충당되겠어요.”
처음 말한 키 큰 인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명웅 형님이 야귀족(夜鬼族)과 다른 음계를 두고 다투는 중이라 오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거의 진선에 가까운 역천의 능력을 지닌 형님이 나섰으면 강자결전을 치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을 텐데요.”
세 번째 검은 그림자가 탄식했다.
“야귀족은 실력도 강하고 족장의 신통이 대단하답니다. 그쪽이야말로 명웅 형님이 없으면 안 될 상황이지요! 또한 성질을 변화시키려면 세월이 꽤 걸릴 이 소세계에 비해 자연적으로 음계인 그곳이 훨씬 중요하지 않습니까.”
호리호리한 인영이 차분히 말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것, 며칠 뒤의 결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승기를 잡을 가능성이 7, 8할은 된다고 보는데 관건은 저쪽이 그 후에 약속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지요. 칠규왕, 이에 대한 대비는 잘 되어갑니까?”
음산한 목소리가 이제껏 말이 없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전부 자세를 바로하고 귀를 기울였다.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마쳤으니 걱정 마세요. 천만 귀군(鬼軍)이 예정된 위치에 잠입해 있습니다! 저들이 전환할 수 없는 주계면(主界面)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이용해 그들의 계면까지 침략할 수 있었을 텐데요. 일단은 강자결전 방식으로 평화롭게 해결을 해봅시다. 어쨌든 이 소세계 말고는 그들 계면과 아직 다른 충돌은 없으니까요.”
왜소한 인영은 놀랍게도 갓난아이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포로로 잡힌 생령들을 추혼술을 펼친 결과 상대는 폐쇄된 소형 계면군(界面群)에서 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선계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번에 소세계가 우연히도 두 계면과 연결되지 않았으면 우리도 그들과 접촉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수련 방식은 상고시대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며, 다른 계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공법과 비술을 사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때문에 명웅 형님이 우리 다섯을 보낸 것이고요!
이번 결전에서 상대방을 압도해 소세계의 이익을 독점하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에서요. 우리 다섯은 모두 오랜 세월 고비에 막혀 수련에 진전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어두운 목소리의 검은 그림자가 차분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명웅 형님께서 신경을 쓰셨네요. 하하, 상고시대의 수련방식을 고수하다니 정말 드문 경우이긴 합니다. 제발 실력이 너무 실망스럽지 않아야 할 텐데요.”
키 큰 인영이 눈을 번득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 휴식을 취합시다. 내일 상대방과 접촉해 결전 장소의 금제를 설치하겠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논의를 마무리하자 나머지 검은 그림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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