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7화. 천기쇄(天機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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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익은 곧장 소매를 털어 한기로 빙봉을 휘감고는 하얀 한기와 함께 구슬을 분출해 여덟 개의 날개 달린 거대 지네로 변했다.
동부를 빠져나온 지네는 다시 하얀 실선을 남기고 멀리 달아났다.
한식경이 지나 멀리서 파공음이 날아들었다. 일곱 빛깔 구름을 밟은 흑포 청년이었다. 소매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 외에는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았는데 구름의 이동속도는 엄청났다.
그는 작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고는 구름을 밟아 방향을 틀었다. 정확히 육익과 빙봉이 달아난 방향이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오차 없이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이 선계 진선은 그들을 추격할 방법이 있는 듯했다.
이렇게 흑포 청년과 육익, 빙봉 간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육익의 현묘한 둔술로 둘 사이의 속도 차이가 현저하게 났지만 흑포 청년은 며칠이면 그 거리를 따라잡았다. 청년은 거머리처럼 끈질겼고 추격을 즐겼다.
육익이 열 받아 자신과 빙봉의 몸을 점검했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선계인의 신통을 너무 얕본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막 정련한 소음성기를 소모해가며 빙봉을 데리고 줄곧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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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 후.
육익이 더는 버티지 못할 때쯤 흑포 청년은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져서 며칠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이에 육익과 빙봉이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추격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 은밀한 장소를 찾아 진원을 회복하려 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났을 때 흑포 청년이 돌연 인근에 나타나 그들을 대경실색하게 만들었고, 육익과 빙봉은 다시 줄행랑을 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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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천대륙, 혁련상맹 총단.
비밀 대전 안에서 혈천대륙 책임자인 벽영이 보라색 나무 탁자에 앉아 옥간을 쥐고 근심에 잠겨 있었다. 그는 옥간의 내용을 끝까지 읽고는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러자 나무 탁자 앞에 가벼운 바람이 일고 모호한 인영이 나타났다.
“연우 수사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사실이더냐? 이런 걸 왜 이제야 보고한 것이야!”
예를 올리는 모호한 인영을 향해 벽영이 담담히 물었다.
“대인께 아룁니다! 연우 선배님은 다른 두 명의 대승기 선배님들과 함께 제운산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몇 달간 여러 국가와 종문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시던 선배님들은 흉수가 숨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곳을 알아내신 뒤로 소식이 없으셨고요.
나중에 명사족(鳴蛇族)과 본 맹에서 파견한 이들이 선배님들의 본명패를 들고 제운산맥에 들어가 수색했는데 산맥 깊은 곳에 이르자 본명패가 동시에 깨졌습니다.
그제야 세 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흉수가 무슨 방법으로 본명패를 속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 뒤로 한 달 만에 선배님들의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을 발견했고, 그곳의 흔적으로 보아 격렬한 전투 끝에 거의 동시에 사망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대는 단 한 명이었고요. 중대한 사안이라 허투루 조사할 수 없어 다들 재차 확인하다 보니 늦게 소식이 전해진 듯합니다.”
모호한 인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세히 설명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본명패를 속일 수 있는 술법이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하구나. 적어도 본 좌는 지금까지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승기 수사인 세 명을 홀로 참살할 수 있는 자는 혈천의 노괴들 중에서도 열 명이 넘지 않을 것인데. 본 맹에서도 나를 제외하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만한 장로가 없고. 아무래도 절세의 흉마(凶魔)가 등장한 듯싶구나.”
벽영이 턱을 쓸어내리며 눈빛이 서늘해졌다.
“흉마가 제운산맥의 국가들과 종문들로 혈제를 치르고 악행을 멈추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무서운 실력으로 앞으로도 일을 벌이려 든다면 약소 세력들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얼마 전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보름 전 흉마가 대룡국(大龍國)에 나타나 범인들은 물론 주변 수십 개 중소 종문까지 전부 몰살했다 합니다. 거리낌 없이 그곳의 생령들을 핏물로 만들어 피의 강을 흐르게 했다지요.
혈골문 등 다른 거대 세력들도 더는 좌시할 수 없다고 여겨 대승기 장로들 중 일부를 중심으로 흉마를 도륙하자는 구호를 걸고 ‘도마맹(屠魔盟)’을 구성했습니다. 저희에게도 참가를 요청하는 관련 서한이 왔고요.”
“도마맹? 혈골문 등 초대형 종문들이 드디어 나섰구나. 일이 아주 커지겠어. 흠, 그것도 좋겠지! 본 맹이 꼭 흙탕물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겠지만 또 아예 나서지 않을 수도 없으니 우리 쪽에서는 군 장로가 도마맹에 참석하는 것으로 하겠다. 결코 흉마와 직접 맞서지 말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전하거라. 본 맹은 이 일로 연우 수사를 잃은 것만으로도 손해가 막심하니까.”
생각 끝에 벽영이 결정을 내렸다.
“예, 바로 군역몽 장로님께 다녀오겠습니다!”
“한 가지 더! 강자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철저히 준비하거라. 새로 발견한 소세계의 이권이 걸린 강자결전만 아니었다면 본 좌가 직접 나서서 혈제를 치른 흉마를 만나보았을 텐데.”
“차질 없게 준비하겠습니다. 강자결전에 참가하실 분들 중 대인과 문심봉 장로님을 제외하면, 뇌 대인께서는 혈천으로 와서 잠시 폐관수련에 들어가셨고 한립 선배님 일행은 아무래도 초원을 따라 배회하며 여전히 상고제단들을 찾아다니시는 듯합니다.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 혈살 선배님이신데 1년 전 천계미궁(千階迷宮)에 들어가신 뒤로 아직까지 안 돌아오고 계십니다. 다른 수사들처럼 영원히 갇혀서 돌아오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혈살의 신통은 나못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게다가 그자의 성격상 미궁을 빠져나올 확신이 없었으면 무턱대고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야. 약속한 시간에는 나타날 것이다.”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혈살 선배님께서 분명 제시간에 나타나실 겁니다. 바로 뇌 대인과 한 선배님께 소식을 전하고 소세계 거점에 파견할 이들을 안배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거라.”
모호한 인영이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벽영은 탁자에 가득 쌓인 다른 옥간을 집어 들려 했다.
파삭!
그런데 그때 그의 품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벽영이 손을 뻗은 채 멈춰 있다가 한참 후에야 길게 한숨을 쉬고 허리춤을 만졌다.
그러자 푸른 옥함이 그 앞에 떠올랐다. 옥함에는 금색 부적들이 여러 장 붙어 있었는데 법결을 날려 부적을 떼어내자 옥함이 스스로 열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고풍스런 양식의 원반이었다.
하얀 백옥 원반에 핏빛 문양진법이 새겨져 있고 그 한 가운데에는 흑백으로 태극문양이 찍혀 있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정신을 쏙 빼놓을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주는 원반이었다. 벽영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쩍!
그의 손끝이 닿는 순간 원반은 핏빛 문양을 따라 갈라졌고, 중심에 찍혀 있던 흑백 태극문양도 쪼개지고 말았다.
“천기쇄(天機碎)의 전설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혹시 몰라 오래전부터 정혈로 제련해왔는데 정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어. 이번 강자결전에서 내게 변고라도 생긴단 말인가? 아니면 운명으로 정해진 또 다른 재난이 도래할 조짐인 것인가?”
벽영은 쪼개진 원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흥, 내 운명은 하늘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 보물이 전설대로 영험하다고 해도 살아남을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미리 준비해둔 것이 부족할듯하니 다른 방비를 해야겠어.”
벽영은 옥함으로 녹색 기운을 날렸다.
펑!
옥함은 멀쩡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던 진법원반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 * *
혈천대륙, 유명한 요수의 땅인 낙조초원(落潮草原)
한립 일행은 거대 호수 위를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배를 타고 질주했다.
그는 뱃머리에 무표정하게 서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뒤에 선 주과아와 화석노조는 확실히 의기소침해 보였다.
얼마 전 초원에 위치한 마지막 상고제단을 점검한 그들은 더욱 풀이 죽고 말았다.
웅!
이때 한립의 품에서 맑은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소매를 털자 남색 진법 원반이 떠올라 그 위로 은색 문자를 반짝였다.
“인근의 천마성(天馬城)으로 가자.”
한립의 말에 화석노조가 얼른 수결을 맺어 배의 방향을 틀었다.
“한 선배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지요? 강자대전이 곧 시작되는 건가요?”
주과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강자대전에 대해 그녀와 화석노조에게 전부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밀이 아닌 부분까지는 알려주었다.
그래서 강자대전이 왜 열리는지는 몰라도 한립이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어느 강자와 대결을 펼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 시간이 되었다. 상맹에게 대가를 받았으니 약속은 지켜야겠지.”
“대승기 선배님들이 가득한 혁련상맹 같은 세력에서 도움을 구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겠어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 선배님.”
주과아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라. 하계에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혹시 이길 수 없더라도 목숨은 보전할 자신이 있다.”
한립의 미소에 주과아와 화석노조는 크게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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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이 더 지나고 그들은 낙조초원을 벗어나 초원 외곽에 위치한 거대성으로 향했다. 암녹색 두꺼운 대나무를 쌓아 만든 높은 성곽이 다른 성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성벽 위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회백색의 커다란 날개 달린 말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한립이 탄 배가 성문을 거치지 않고 당당히 성벽 위를 지나가려하자 중, 저계 수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들 무형의 금제에 충돌해 큰일이 벌어질 거라 여겼는데 배가 작게 진동하고 그대로 성 중심으로 쏘아져나갔던 것이다.
“헉, 대승기 노조.”
견문이 좀 있는 이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성벽 위에서 경계심 어린 눈빛을 보내던 병사들도 공손한 얼굴로 배가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성 안의 금공 금제마저 무시하고 쾌속으로 날아가려면 대승기 수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천마성의 규모도 그리 작지 않았지만 이곳을 관리하는 자들도 합체기 수사 몇 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경비병들이 대승기 노조를 막아설 만큼 담이 클 리 없었다.
얼마 후 한립은 혁련상맹 표식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해 배를 거두었다. 그들이 서서히 하강을 하는데 남녀 수사들이 몰려나와 공손히 예를 취하고 있었다.
70대로 보이는 백발노인이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맞았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총단에서 며칠 전에 명이 내려와 전송진 준비는 마쳐두었습니다. 누추하지만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상맹의 일처리가 아주 손색이 없구나. 휴식은 되었고 바로 전송진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한립의 칼 같은 눈빛이 노인의 얼굴을 훑었다.
“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답했다.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한립 일행은 지하에 숨겨진 대청으로 안내를 받았다.
대청 한 가운데에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은색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진법을 훑은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공간 간 전송진. 바로 소세계로 이동하는 것인가?”
“역시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벽영 대인께서 소세계에서 뵙자고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벽영 수사가 그리 안배를 해놨다면 알겠다.”
노인의 착실한 답에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전송진 위로 올라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주과아와 화석노조가 그 뒤를 쫓았다.
상맹 노인은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옥패를 꺼내 전송진으로 은빛을 비추었다.
우우웅!
전송진이 은빛을 크게 머금자 한립 일행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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