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6화. 만령혈새(万靈血璽)
*
그로부터 1년 반 후.
제운산맥 안에 숨겨진 골짜기 위.
혈천대륙 대승기 수사 두 명이 분노에 치를 떨며 살결이 하얀 마른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 선 청년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청년은 끔찍하게도 한 손에 머리를 산발한 누군가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피의 강’ 흐르고 있었다.
피의 강은 3, 40명이 똑바로 누워도 끝이 닿지 않을 만큼 폭이 넓었고 아주 진득한 핏물이 흘렀다. 그러나 피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아주 맑은 단향목의 향기가 풍겨 냄새를 맡는 사람의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흑포 청년 아래로는 여러 사람의 시체가 산산 조각나 둥둥 떠다녔다. 맨발을 핏물에 담근 흑포 청년은 비웃는 눈빛으로 영계의 최정상급 수사를 쳐다보았다.
“……무슨 짓을 했기에 갑자기 우리의 수행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입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연우진인도 이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연우진인은 상맹의 장로이고 상맹은 영계 전체에서 손꼽히는 세력이라는 것을 알긴 합니까? 상맹의 핵심 수사를 죽였으니 영계 땅에 앞으로는 당신이 발붙일 곳은 없을 것입니다!”
보라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두려움을 겨우 가라앉히고 고함을 쳤다.
“상맹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온 너희를 피의 강의 일부로 만들어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너희 수행이 억제된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흐흐, 막 혈제로 완성된 만령혈새(万靈血璽)의 기운에 너희들이 억눌린 걸 낸들 어쩌란 말이냐.”
흑포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헛소리! 세상천지 어느 보물이 대승기 수사인 우리를 스스로 제압한단 말입니까. 현천영보라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현천의 보물이 대단해도 어느 계면에서 탄생한 현천의 물건이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이다! 너희 같은 작은 계면의 현천영보야 그 위력이 어떨지 알 만하구나. 쯧, 진정한 대형 계면에서 탄생한 현천의 보물의 위력을 벌레만도 못한 너희가 알 턱이 있나.”
거한의 반박에 흑포 청년은 멸시의 눈초리를 보냈다.
“평생 영계가 작은 계면이라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당신은 영계 사람이 아니로군요. 남의 계면에 쳐들어와 무고한 생령들을 대량으로 도륙하고 혈제를 치르다니 혼자 힘으로 영계 전체와 싸우기라도 할 작정입니까!”
“이 계면의 생령 전부를 잡아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뭐, 다른 대륙 대승기 수사들도 너희 같은 수준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겠다만.”
흑포 청년이 거한의 외침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하다 답했다. 이에 자갑 거한은 할 말을 잃고 난색을 표했다.
바로 그때, 옆에서 시종일관 말이 없던 뱀 문신을 한 노인이 허공을 굴러 날개가 네 개 달린 청록색 거대 뱀으로 변했다.
쉬익!
거대 뱀은 다짜고짜 날개를 펄럭여 녹색 실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청년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반대방향이었다.
“멍청한 것. 만령혈새의 위력 범위에서 겨우 대승기 수사가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
흑포 청년은 열심히 도망치는 비사(飛蛇)를 보고 ‘제압하라’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청록색 뱀 앞에 핏빛이 반짝이고 거대한 인장이 나타나 충돌해 왔다.
날개가 달린 비사는 인장이 나타나자 동시에 몸이 마비되어 부들부들 떨뿐 움직이지 못했다.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비사로 변해 도망치려던 노인은 원영마저 인장에 으깨져 소멸되었다.
인장은 핏빛을 내뿜어 흩날리는 영기의 빛을 전부 빨아들였다. 합체기 수사를 흡수한 인장의 핏빛이 농염해졌다.
웅웅!
인장 허상이 진동하며 갑자기 사라졌다. 이에 자갑 거한은 자신과 수행이 비슷한 일행이 간단히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절망감을 느꼈다.
오랜 세월 온갖 풍파를 견뎌내 왔지만 수행까지 억제당한 마당에 상대를 꺾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앗!
괴성을 지른 괴한의 등 뒤로 용의 머리와 말의 몸을 한 거대 법상이 나타났다.
콰르릉!
법상은 입을 벌려 푸른 뇌전 구슬을 끝없이 내뿜었다.
쿠쾅! 쿠콰콰쾅!
거한의 양쪽 소매에서는 십여 개의 보물들이 날아올라 거대한 태양처럼 터져 흑포 청년에게로 몰려갔다. 그리고 거한은 자신의 육신을 터트려 그 안에 숨겨진 원영을 드러냈다.
원영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자 육신에서 터져 나온 핏빛 안개들이 전부 빨려 들어갔다. 핏빛이 반짝이고 거한의 원영은 투명하게 변해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뇌전 구슬들과 보물들이 폭발해 만들어낸 십여 덩이의 태양들을 보고 흑포 청년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피할 생각이 없다는 듯 뒷짐을 쥐고 있던 한 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콰르릉!
청년 앞으로 일곱 빛깔의 거대 수정 벽이 솟아올랐다.
뇌전구슬과 태양이 마구 부딪혀 푸른 뇌전과 폭발의 여파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도 수정 벽은 미세하게 떨렸을 뿐이다.
그 사이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투명한 거대 손이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반들거리는 거대 손에 금색 주술문자들이 흘러 다녔고 손을 쫙 편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는 압박감이 전해졌다.
퍽!
한참을 달아나던 거한의 원영이 비틀거리며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원영은 겁에 질린 얼굴로 다시 공간이동을 하려는데 거대 손이 커다란 손가락을 뻗었다.
콰쾅!
원영은 신음도 내지르지 못하고 손가락의 힘에의 폭발하며 소멸되었다. 거대 손은 원영이 부서져 흩날리는 영기의 빛을 흡수하고는 사라졌다. 그제야 흑포 청년은 손가락을 까닥해 눈앞의 수정 벽을 허물어 버렸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피의 강에서 벗어나지 않고 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경은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도 허공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꼭 좋은 말로해서는 안 듣는 것들이 있지!”
그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팟!
그러자 적홍색 뇌전이 날아간 허공에 파동이 일었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군요.”
놀란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파동 안에서 사내와 여인이 연달아 나타났다. 둘 다 하얀 의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뺨에 금색과 은색 문양이 새겨진 사내는 놀랍게도 한립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그 옆의 절색의 여인은 피부가 눈처럼 하얗고 굉장히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그들은 육익상공이 변한 백의 사내와 그의 협박에 못 이겨 지금까지 동행하고 있는 빙봉이었다!
멀리 뇌명대륙에 있던 그들이 어쩌다 혈천대륙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같잖은 은닉술로 나를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그보다 아주 웃긴 한 쌍이구나! 둘 다 얼음 속성의 진령 변이혈맥을 타고난 영물들이라……. 선계에서도 보기 힘든 것들이 둘이나 붙어 다니고 말이야! 오늘 기분이 퍽 좋으니 죽이지는 않겠다. 오늘부터 내 영노(靈奴)가 되거라. 안 그래도 하계에서 잡다한 일을 처리할 심부름꾼이 필요하던 차니까.”
그들을 보며 흑포 청년이 분부를 내렸다.
“선계? 영노? 설마 상계 진선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상고시대 때 모든 계면이 진선계와 연락이 끊겼을 텐데 어찌 진선이 하계로 강림한단 말인가.”
육익상공이 변한 청년은 상대의 말을 듣고 놀라 중얼거렸다. 빙봉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웃기는 소리! 모든 계면이 아니라 너희처럼 이 손바닥만 계면 몇 개가 진선계와 연락이 끊긴 것이다. 진선계와 너희 계면들을 다시 잇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큼 가치가 없기에 그간 그대로 놔두었을 뿐이다.”
흑포 청년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육익성공은 내심 놀라기는 했지만 방금 대승기 수사 세 명을 격살하는 것을 보았기에 상대가 진선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믿었다.
그러나 그더러 수사들의 영수와 다름없는 ‘영노’가 되라는 것은 상대가 제아무리 대단한 신분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였다.
“딱 열 셀 동안 고려할 시간을 주지! 크큭, 싫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지는 잘 알겠지?”
“열까지 셀 것도 없다. 바로 대답하지! 네가 이 자리에서 땅에 머리를 처박고 빌어도 내가 네 영노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흑포 청년의 협박에 육익상공은 대뜸 반말을 하며 삐뚜름하게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뭐라?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내게 그 따위로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흑포 청년의 얼굴에 푸른 기운이 감돌고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살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가 공간을 왜곡시키고 미세하게 허공을 찢어 하얀 자국들이 남았다.
육익상공은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쳐 남색 정혈과 구슬을 분출했다. 구슬은 즉시 수정 날개 한 쌍으로 변해 그의 등에 붙었다.
동시에 육익상공은 곁의 빙봉을 끌어와 빙글 돌며 새하얀 지네의 모습으로 변했다. 원래 세 쌍의 날개를 지녔던 육익상공은 구슬이 변한 날개까지 총 네 쌍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여덟 개의 날개가 펄럭이자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하얀 실선이 남았다. 그 후로는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파공음이 들릴 뿐 육익상공과 여인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다.
놀라운 둔술에 흑포 청년마저 동공을 수축했다.
“이 놈이나 저 놈이다 멍청해서는! 겨우 이까짓 둔술로 내 손에서 벗어나려 하다니.”
졸졸 흐르던 피의 강이 급격히 역류해 흑포 청년의 몸속으로 마구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핏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말라 버렸다.
단번에 기운이 몇 배로 강해진 흑포 청년이 비술을 이용해 추격하려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자금색 주술문자들이 날아들어 금빛 사슬로 변해 그를 묶었다.
흑포 청년은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콰르릉!
자금색 뇌전이 그의 몸 위를 흐르자 공포스럽던 그의 강력한 기운이 흩어졌다.
쿨럭.
흑포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은색 정혈을 토해내고서야 자금색 뇌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들고 육익상공이 달아난 방향을 보며 힘없이 웅얼거렸다.
“작은 계면이라 해도 계면의 압력에 대항할 수는 없겠어. 허나 내 공법과 신통을 2, 3성 밖에 사용 못해도 겨우 하계 영물 따위가 달아나게 두진 않을 것이다. 혈제도 몇 달 간격을 두고 지내야 하니 그동안 한번 놀아볼까?”
흑포 청년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자 발밑으로 일곱 빛깔의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날아갔다.
* * *
이틀 후, 이름 모를 산 속.
조잡하게 파낸 임시 동부 안에 사내와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육익상공과 빙봉이었다.
한참 만에 눈을 뜬 육익은 입에서 하얀 한기를 토해냈다. 뒤이어 눈을 뜬 빙봉이 그를 향해 복잡한 시선을 보냈다.
“허비한 진원은 회복한 거예요? 대승기 수사라도 앞서 발동한 둔술은 쉽게 사용하지 못할 텐데요. 어디서 얻은 보물인지 날개가 여덟 개인 덕에 겨우 그 자의 손에서 목숨을 건졌네요.”
“내가 그 오랜 시간 만황에서 허송세월이나 보낸 줄 아느냐? 그런데 나더러 영노가 되라고? 제아무리 진선이라도 헛꿈 꾸는 것이지! 진원은 네가 걱정할 것 없다. 막 흡입한 소음성기(素陰星氣)가 남아 있어서 그걸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으니까.
조금 더 빨리 소음족(素陰族)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 그들이 어떻게 성신의 힘과 교류하는지 알아냈으면 지금쯤 진신체(眞身體)을 이루어 진선이 강림해도 겨뤄볼 힘이 있었을 텐데!”
육익은 이를 갈며 말했다.
“다 당신이 운이 따라주지 않는 탓이죠. 상고시대부터 줄곧 뇌명대륙에 머물던 소음족이 뜬금없이 혈천대륙으로 이주했을 줄 누가 알겠어요. 이곳까지 쫓아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원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어찌 되었든 지금 상태로 진선에게 대항하는 건 어리석은 일 같은데요.”
빙봉이 싸늘하게 타박했다.
“전성기의 진선이라면 전혀 희망이 없겠지만 진선의 몸으로 직접 강림하면 계면의 압력에 제약을 받는다. 기껏해야 본 실력의 2, 3성 정도밖에 발현하지 못할 테니 강력한 진령을 상대하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근데 왜 대항하면 안 된단 거지? 내게 수백 년만 시간이 주어지면 그까짓……. 제길, 그 놈이 또 쫓아왔구나!”
육익은 뭔가를 느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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