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화. 혈신술(血神術)
*
“소 형, 정말 이대로 손을 놓을 겁니까?”
만화부인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이상 어찌해 볼 여지가 없습니다. 무구노조와 화서선자 없이 우리 셋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니까요.”
소명은 차분히 답했다. 얼굴빛이 수시로 달라지던 청평도인도 더 싸우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한 수사, 우리가 졌습니다!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소명이 포권을 하며 청평도인과 만화부인을 데리고 출발하려 했다.
“이대로 그냥 가시려고요? 저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그들의 모습에 한립이 냉소를 흘렸다.
황금 게와 빙백도 공법을 회수하고 그의 곁으로 돌아왔는데, 여인의 얼굴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황금 게는 은색 뇌전을 번득이고 젊은 도사로 변했다.
“한 형의 뜻은 그러면…….”
소명이 동작을 멈추고 의사를 물었다.
“아시면서 물으십니다.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으니 대가는 치르고 가셔야지요.”
한립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정말 조금도 손해 보지 않는 성격이십니다. 사과의 뜻으로 음혈정(陰血晶) 세 개를 내드리면 되겠습니까?”
소명이 조용히 탄식하며 옥함을 쏘아 보냈다. 그는 옥함을 끌어와 의식으로 훑고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이 한립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 핏빛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청평도인과 만화부인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한 형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저곳을 빠져나오자마자 목숨을 잃을 뻔 했네요.”
빙백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를 향해 깊게 예를 올렸다.
“그리 격식 차리실 것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인연이 닿았고 또 같은 인족 출신의 대승기 수사였기에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한립이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 * *
파앗!
중추 구역 밖 어딘가에서 파동이 일고 빛의 진법이 떠올랐다. 그 안에서 한립과 빙백, 해 도인이 소리 없이 등장했다.
“혈혼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금제의 힘을 동원해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빙백은 정신을 집중하다 이렇게 말했고 한립도 반대하지 않았다. 여인은 진법 원반을 꺼내 빠르게 손끝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진법 원반이 날아가 빛의 진법으로 변해 그들을 빛으로 휘감았다.
“……!”
그 시각 혈혼은 어느 누각 안에서 누런 선반에 놓인 법기들을 챙기다 갑자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서둘러 둔광을 일으켜 빠져나온 그녀는 허공에 파동이 일고 빛의 진법에서 한립 일행이 빠져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나오신 겁니까?”
그녀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한 형 같은 분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야.”
빙백이 자신의 혈령 화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이 저이고 제가 바로 당신인 걸요. 고생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나로 돌아갈 텐데요.”
혈혼은 얌전히 대답했다. 그 말에 빙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수결을 맺어 붉은 빛을 방출했다. 이에 혈혼이 몸을 날려 그 안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고통에 허리를 굽힌 빙백의 피부에서 핏빛 실들이 튀어나와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일다경이 지나자 빙백은 똑바로 몸을 세웠다. 얼굴이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한 형께서 유명하시고 제 화신과 이렇게 오랫동안 교류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수사가 보호해 주신 덕에 그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고요.”
빙백은 한립을 향해 진심을 담아 미소 지었다.
“화신의 기억을 전부 되찾으셨나 봅니다.”
한립이 그녀를 살피고 마주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아직 여력이 되지 않아 대부분 기억은 봉인해두고 당장 필요한 일부만 흡수하였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화신도 회수하셨고 천정궁에 더 있을 이유가 없으니 바로 떠나지요. 다른 이들은 천정궁이 일찍 닫힐 것을 모르니 안전하게 떠날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은 말을 하며 허공에 손짓을 했다. 금빛이 번득 날아들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서금충왕이었다.
해 도인도 수결을 맺어 한 줄기 뇌전으로 변해 그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예, 제가 바로 술법을 펼치겠습니다.”
빙백은 바로 입에서 핏빛 옥패를 분출했다. 그 안에서 금제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 * *
만월산맥 상공.
거대 진법이 천정궁 입구인 거대 문을 물샐틈없이 막고 있었고, 혈골문 제자 복장을 한 수사들이 진법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혈골문 대승기 수사 두 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다가 이상한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웅웅웅!
금은색 주술문자를 반짝거리던 거대 문이 낮은 소리를 내며 파동을 방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설마 천정궁이 일찍 닫히려 한다고?”
혈골문 대승기 수사 중 눈이 움푹 들어간 노인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천정진인의 의발과 보물을 얻어서 그렇게 된 걸 지도 모릅니다.”
작고 뚱뚱한 부인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되었든 진법을 발동합시다.”
“물론 그래야지요.”
그들은 곳곳에 숨어 있던 혈골문 제자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들이 진법 법기를 발동하자 진법 전체가 화려한 빛줄기를 방출해 하늘에 거대한 그물을 쳤다.
그물에서 서늘한 살기가 방출되어 적을 노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쿵!
요동치는 천지원기 속에서 거대 문이 왜곡되고 공간 균열이 나타났다.
팟! 팟!
거대 문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두 개의 빛의 진법이 나타나 두 무리의 수사들을 토해냈다. 한 무리는 3, 40명의 수사들이 가라앉은 표정의 금의(錦衣) 거한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보물을 약탈하던 와중에 강제로 전송되어 나온 터라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리고 나머지 무리는 똑같이 생긴 다섯 명의 청년, 혈합오자였다.
“저들은?”
눈이 움푹 들어간 노인이 두 무리를 알아보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혈골문의 천궐, 지몽 수사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여기서 진을 치고 계십니까?”
금의 거한도 거인와 뚱뚱한 부인을 알아보고 냉랭히 물었다. 주변을 봉쇄한 거대 진법과 허공의 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진법종사인 봉 종주도 안에 들어가 계셨네요. 어쩐지 천정궁이 예정보다 일찍 닫혔다 했습니다. 안에서 좋은 물건을 많이 얻으셨나 봅니다.”
뚱뚱한 부인이 눈을 깜빡이며 희희덕거렸다.
“지몽 수사, 천정궁의 변화는 본 좌가 한 것이 아닙니다.”
금의 거한은 곧장 얼굴을 굳히고 부정했다.
“그래요? 들어간 수사 중에 이런 일을 벌일 만 한 이는 수사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요?”
뚱뚱한 부인의 말에 거한은 화가 났지만 더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때 눈이 움푹 들어간 노인이 또 다른 무리에게 말을 붙였다.
“다섯 분은 인사도 없이 가시렵니까?”
혈합오자들이 거대 진법 가장자리 쪽으로 슬금슬금 퇴각하고 있었다.
“설마 우리와 봉 종주를 이 안에 가둬두기라도 할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혈합오자 중 한 명이 멍하니 답하며 눈빛이 핏빛으로 번득였다.
“크흠, 명성이 자자하던 혈합 수사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습니다. 참 무서운 세상이에요.”
눈에서 일곱 빛깔 보광을 번득인 노인이 갑자기 길게 탄식했다.
“천궐 수사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내가 유리환목(琉璃幻目)으로 혈육괴뢰도 못 알아볼 줄 아십니까? 숨어계시지 말고 나오시지요.”
청년의 반문에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혈육괴뢰!”
작고 뚱뚱한 부인과 금의 거한도 깜짝 놀라 혈합오자 주변을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주시했다.
“흐흐, 유리환목의 명성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혈신대법(血神大法)을 대성했는데도 수사의 영목 신통을 속일 수는 없군요.”
청년이 재미있다는 듯 웅얼거렸다. 하지만 표정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다섯 청년의 머리에서 핏빛이 빠져나와 모호한 핏빛 그림자를 만들었다.
두 눈이 음산한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핏빛 그림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난폭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혈천대륙이 오래 전부터 혈신술(血神術)을 익힌 자는 죽인다는 규정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
눈이 움푹 들어간 노인이 핏빛 그림자를 보고 노호성을 터트렸다. 노인은 더 이상 떠들지 않고 수결을 맺고 고공을 가리켰다.
콰릉!
고공에서 여섯 줄기의 적홍색 뇌전이 혈합오자와 핏빛 그림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진법에서 굵은 빛기둥이 뻗어 나와 거대한 빛의 창살을 지닌 우리로 변했다.
미리 펼쳐둔 거대 그물도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핏빛 그림자는 괴소를 터트리며 위쪽으로 소매를 펄럭였고, 핏빛 빛줄기 여섯 개가 하늘로 치솟아 뇌전을 격파했다.
핏빛 그림자는 빙글 돌며 혈합오자 속으로 스며들어 핏빛 안개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노인이 즉시 수결을 바꾸어 체내에서 커다란 검기를 방출해 그 뒤를 쫓았다.
“어쩌실 겁니까, 봉 종주. 저 자는 감히 혈심술을 익혔습니다.”
작고 뚱뚱한 부인이 눈을 굴리다 금의 거한에게 물었다.
“지몽 수사, 자극하려 할 것 없습니다. 혈신술을 익힌 자는 우리 혈도종문의 생사대적(生死大敵)이라 누구든 살려둘 수 없지요!”
금의 거한은 냉랭히 소리치고 문하 제자들에게 명을 내렸다. 여러 제자들이 동시에 각양각색의 법기를 날려 알록달록한 거대 주술문자들을 만들어냈다.
거한의 조종에 거대 주술문자들이 궤적을 그리며 한 곳으로 뭉쳤다. 금의 거한의 머리 위로 금색의 진법이 펼쳐져 무시무시한 도검의 예기를 분출했다.
뚱뚱한 부인은 자기 말이 통하자 웃음을 흘리며 소매 속에서 영수환을 불러냈다.
구구구.
열댓 마리의 커다란 핏빛 비둘기들이 날아올라 핏빛 안개를 놀라운 속도로 뒤쫓았다. 도처에서는 거대 빛의 우리가 혈골문 제자들의 조종을 받아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드디어 빠져나왔습니다. 이곳도 만월산맥 안 같군요.”
빛의 진법에서 걸어 나온 한립이 주변 풍경을 보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전송진을 조종해 그나마 최대한 멀리 이동한 것입니다! 아직 만월산맥 내부라도 아마 외곽 쪽이겠지요.”
빙백도 주변을 둘러보고 들뜬 얼굴로 답했다. 오랜 세월 갇혀만 있다 밝은 태양 아래 서니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뭔가를 눈치 채도 쫓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저는 데려온 아이들을 불러들이려는데 빙백 수사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바로 인족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대승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아 경계도 안정을 시키고 그 김에 연화할 몇 가지 보물이 있습니다. 당분간은 주변에 안전한 장소를 찾아 폐관수련을 하다 몇 년 후에야 인족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싶네요.”
한립의 질문에 빙백은 고민 없이 답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천정궁을 빠져나오면 어찌할지 계획을 세워놓은 것이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소명 등 다른 수사들이 수사가 천정진인의 의발을 전승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금방 소문이 퍼질 테니 안전에 주의하시지요.”
“하하, 저도 이제 대승기 수사입니다. 어떤 강적을 만나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만 않으면 목숨은 부지하고 달아날 자신이 있답니다.”
“빙백 수사께서 자신이 있으시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뇌명대륙으로 갈 예정입니다. 한참 후에야 다시 뵐 수 있겠군요.”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취하자 빙백도 인사를 하고 수정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한립은 그녀의 둔광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은색 부적을 불러내 날려 보냈다.
부적은 바람을 타고 푸른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는 가까운 산 정상으로 날아가 자리를 잡고는 명상을 하며 주과아와 화석노조가 오기를 기다렸다.
반나절 후.
하늘 끝에서 사내와 여인을 태운 삼각형 비차가 날아들었다. 주과아와 화석노조였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혈골문에서 만월산맥 전투에서 꼭두각시로 변한 혈합오자와 혈신술을 수련한 정체불명의 수사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러나 혈골문 대승기 수사인 천궐, 지몽도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었고 그들이 데려간 문하 제자 중 절반 가까이가 생환하지 못했다.
혈천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진법종사인 봉 종주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이대륙의 여 대승기 수사가 천정진인의 의발을 계승했다는 이야기도 퍼져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상하게 그 소문 속에 한립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마치 그는 처음부터 만월산맥 근처에도 가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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