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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84화 (1,141/2,000)

1384화. 격전

*

단숨에 수백 번 주먹을 내지른 거원은 그래도 회색 그림자를 어찌할 수 없자 광소를 터트렸다.

“으하하, 공격의 열에 아홉을 흩어버리다니 공법이 굉장히 특이합니다. 헌데 주먹이 아니라 검에 베이고도 멀쩡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웅웅거리며 말을 마친 거원이 주먹을 거두고 손끝으로 허공을 갈랐다. 이에 푸른 검기가 번개처럼 회색 그림자를 둘로 갈랐다.

쐐액!

그런데 두 동강이 난 회색 그림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흐릿하게 허물어져 버리고, 다른 방향의 허공에서 파동이 일고 또 다른 회색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회색 그림자는 검기가 가르기 전에 비술을 이용해 탈출했고, 그 자리에는 잔영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회색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회색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우직하게 생긴 무구노조였다. 이에 거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화서선자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여인은 고리를 이용해 산봉우리의 압력을 막아내고 있었고, 또 다른 산봉우리 밑의 불바다 속에는 여전히 금색 화인이 활활 타오르며 금색 불구슬을 분출하고 있었다.

“신외화신(身外化身) 술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수사의 상황에 원래 신통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을지 봅시다.”

거원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 빛을 터트려 무구노조를 훑고는 기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상대편 무구노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몇 년 간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목이 잠겨 있었고 얼굴 표정은 여전히 멍했다.

“제 영목신통이 꽤 쓸 만한 편입니다. 비술로 시체의 기운을 감추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죽은 근육과 살점이 어디 숨겨지나요? 어쩌다 그런 꼴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스스로 원해서 그리된 것인지, 아니면 누가 금제를 건 것인지…….”

웅웅거리는 거원의 말은 멀리까지 퍼져 인근에서 싸우던 대승기 수사들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다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데 화서선자만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구! 뭐 하는 겁니까. 그런 헛소리나 듣고 있지 말고 어서 죽여요!”

그녀가 무슨 비술을 사용했는지 산봉우리를 막고 있던 거대 고리가 밝은 빛을 토해냈다. 거대 고리가 터져 수정 알갱이로 변해 극산을 감싸고 동그란 구슬로 변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난 뒤 화서선자가 바람처럼 무구노조 옆으로 날아들어 거원을 노려보았다.

“허허, 실망하겠지만 그런 이간책은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꼴이 된 것은 공법 수련에 문제가 생겨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의 결과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붙어봅시다!”

무구는 옆에선 화서선자를 확인하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한 걸음을 내딛어 흐릿하게 변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다시 두 사람이 네 사람으로 늘어나 눈 깜짝할 사이에 열댓 명의 무구노조 허상이 거원을 둘러싸고 달려들었다. 허상의 수가 점점 늘어 백여 명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이어 화서선자도 주저 하지 않고 손을 뻗자 그녀의 몸에서 수없이 많은 빛 알갱이들이 빠져나와 고풍스러운 모래알 칼날로 뭉쳐 날아갔다.

찰나의 순간 한립이 변한 거원은 주변 공기가 뻑뻑해진 느낌을 받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하중이 몸을 짓눌러 거원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둔술이 발현되지 않았다.

이때 무구노조의 회색 그림자 분신들이 코앞에 이르러 팔을 휘둘렀다.

쉬쉬쉬쉭!

거원의 급소들을 노리고 녹색 손톱 빛들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거원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낮은 기합소리와 함께 전신에 자금색 빛을 머금었다.

우웅!

수많은 은색 주술문자가 몸속에서 흘러나와 은색 부적 갑옷으로 변해 그의 몸을 가려주었다.

티티티팅!

은색 갑옷에 부딪힌 녹색 손톱들은 충돌음을 남기고 분분히 튕겨져 나갔다. 몇 배로 불어난 거원의 몸이 자금색 비늘로 뒤덮이고 머리 위로 금색의 짧은 뿔이 자라났다.

변신한 거원이 양팔을 펼치자 쾅! 하고 주변의 압력이 흩어졌다.

그 순간, 멀리 화서선자가 들고 있던 모래알 칼날도 폭발해 붕괴되었다. 여인은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거원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사방으로 사발 굵기의 금색 뇌전을 튕겨 보냈다.

콰릉 콰콰쾅!

순식간에 광활한 공간이 금빛 뇌전으로 가득 찼고 이에 접근하던 백여 개의 회색 그림자들은 천둥소리 속에서 소멸되어 갔다.

운 좋게 위기를 모면한 열댓 개의 허상만이 다급히 한 곳에서 뭉쳐져 무구노조로 돌아갔다.

이에 입 꼬리를 끌어올린 거원은 수결의 모양을 바꾸고 입에서 사람 크기의 은색 불구슬을 내뱉었다.

화르륵!

불길이 커다란 은색 불새의 형상을 갖추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은색 불길 속에 금색 실들이 어른거리는 불새는 화서선자를 향해 쇄도했다.

파앗!

무구노조 역시 거원이 허공을 쥐자 주변 공기가 굳은 것처럼 무형의 괴력에 갇히고 말았다.

흠칫 놀란 무구노조가 소매를 펄럭여 녹색 기운으로 둘러싸인 구슬을 방출해 괴력에 저항했다.

쿠쿠쿵!

무구노조 위로 돌풍이 일며 녹색 태양이 떠오르는 듯했다. 녹색 구슬은 금색 문자들을 품은 눈부신 빛을 터트려 거원의 괴력을 깨트리고 있었다.

의외의 상황에 거원은 다른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구노조 위쪽으로 파동이 일고 금색 뇌전들이 뭉쳐진 자금색 거대손이 나타나 태양 속의 구슬을 노렸다.

금색 뇌전에 휩싸인 구슬이 발악하듯 주술문자를 일으켰지만 뇌전의 힘에 터져나갔다. 구슬은 부들부들 진동하다 서서히 추락했다. 그러나 아래쪽 무구노조가 코웃음을 치고는 손가락을 하늘 높이 들었다.

웅!

구슬은 점점 작아져 금빛으로 바뀌고 바깥에 보호막 한 겹을 응결해 냈다. 금색 뇌전이 사납게 공격해도 금색 구슬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이때, 한립이 변한 거원이 성큼 걸음을 내딛어 수백 장을 뛰어넘었다. 그는 무구노조 앞에 이르러 은색 문양으로 뒤덮인 주먹을 빠르게 뻗었다.

쿠쿵!

무구노조 머리 위로 이전보다 배는 강한 무형의 압력이 발생해 겨우 멈추었던 구슬이 미친 듯이 번득거리며 서서히 추락했다.

무구노조가 다른 비술을 펼쳐 대항하려 하자 멀리서 화서선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무구, 어서 도와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황함과 다급함이 가득 실려있었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무구노조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화서선자는 어느새 은색 불바다에 갇혀 불새 한 마리에게 마구 쪼이고 있었다.

수정 알갱이로 이루어진 보호막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지만 은색 화염이 격렬하게 타오른 탓에 눈에 보이는 속도로 수정 알갱이들이 녹아내렸다.

은색 화염의 위력은 그녀의 예상을 월등히 초월했다.

어떤 방어 수단을 사용해도 뜨거움을 피할 길이 없었고 연달아 불러낸 여덟 개 보물도 약간의 시간은 벌어주었지만 결국 녹아서 사라졌다.

더욱 괴이한 일은 은색 불새가 희미하게 금제 파동을 내뿜어 주변을 봉쇄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무턱대고 술법을 펼쳐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는 무구를 향해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녀의 외침에 무구노조는 입가를 꿈틀하며 결정을 내렸다.

“흐아악!”

괴성을 지른 그의 몸이 폭발해 백여 개의 허상으로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다. 거원이 한 팔을 휘둘러 거대 손 허상으로 재빨리 그것들을 때려잡았지만 겨우 절반을 부수는데 그쳤다.

팟.

나머지는 연달아 순간 이동해 은색 불바다 옆에서 다시 무구노조의 본체로 돌아왔다. 그는 빠르게 수결을 맺어 금색 화염을 일으키고 불바다로 뛰어들었다.

화서선자가 반색하며 수정 알갱이 보호막에 틈을 열어 그를 들여보냈다.

“어서요! 성사(聖沙)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당신의 본명 화염만이 막을 수 있다고요.”

화서선자는 여전히 보호막을 쪼아대는 거대 불새를 보고는 무구노조를 재촉했다. 거원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어 더욱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니 성사를 거두시오. 본명화염을 방출하겠소.”

화륵!

무표정한 얼굴의 무구노조는 손바닥을 뒤집어 한 팔에 금색 화염을 일으켰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그가 금색 불길로 뒤덮인 손을 곁의 화서선자에게 날린 것이다!

화서선자는 놀랍게도 예상했다는 듯 수정 알갱이로 감싼 손바닥을 뻗었다.

쾅!

두 손바닥이 한 곳에서 만나 수정 알갱이와 금색 화염을 흩날렸다. 그들은 몸을 격렬히 떨며 뒷걸음쳤다.

“무구, 네 놈이 이럴 줄 알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지? 내 네 놈을 그냥…….”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파랗게 질려 소리를 지르던 화서선자가 불현 듯 겁먹은 얼굴을 했다.

그녀의 가슴에 갑자기 메마른 푸른 손이 나타나 발버둥치는 소인을 붙든 것이다. 화서선자와 똑같이 생긴 소인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이때 그녀의 뒤쪽에 파동이 일고 흐릿한 푸른 그림자가 떠올랐다. 동시에 다른쪽 금색 불바다에서 극산을 공격하던 화인이 펑! 하고 사라졌다.

극산은 장애물이 사라지자 불바다를 소탕했다.

“감히 몰래 체령대법(替靈大法)을 수련해? 기습에 성공했다고 우쭐대지 마라, 무극! 부부는 본래 운명공동체라 하지.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은 목숨이라 이 말이다! 네 몸에 동명(同命) 금제가 심어져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원영이 푸른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없자 화사선자는 원한에 사무친 목소리로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글쎄? 그렇게 믿고 안심하고 죽어라. 몇 년 전에 진작 네가 심어 놓은 금제 따위는 제거했지만 말이야. 지금까지 너를 살려둔 건 오직 네 소매 속의 그것 때문이다.”

무극노조가 멍한 얼굴로 답했다.

“뭐라고? 마, 말도 안 돼…….”

여인의 원영이 놀라 비명을 지르려 하자 푸른 인영이 금색 화인으로 변해 그녀의 본체와 원영을 휘감고 타올랐다.

눈앞에서 부인이 재가 되어 가는데도 무구노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짓해 새까만 진법 원반 하나를 챙겼을 뿐이었다.

그는 찬찬히 손에 들어온 물건을 살피고는 훅! 입김을 뿜었다.

쾅!

진법 원반이 풍화가 되어 검은 연기로 변하더니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임무를 마친 금색 화염은 다시 푸른 인영으로 변해 제자리에 섰다.

법력의 주입이 끊긴 수정 알갱이 방패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는데 어쩐 일인지 은색 화염이 더는 다가서지 않고 거대 불새도 날개를 접고 허공에 떠있었다.

무구노조가 머지않은 곳의 금털 거원과 눈을 마주쳤다. 한립은 아주 흥미진진한 얼굴로 무구노조를 훑다 먼저 입을 열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예상은 됩니다. 이제 혼자 남았는데 계속 싸우시겠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이 꼴이 된 제게 천정진인의 공법은 그다지 필요치 않아서요. 게다가 수사가 아직까지도 본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수사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구노조는 담담히 몇 마디를 남기고는 곁의 푸른 인영을 흡수해 몸을 날렸다. 그의 둔광이 몇 번 번득이다 사라졌다.

한립은 상대가 이렇게 거리낌 없이 떠날 줄 몰랐으나 막지는 않았다.

콰콰쾅!

그때 다른 쪽에서 폭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핏빛 안개가 걷히고 범성금신과 구목혈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어두워진 금신은 머리 하나와 팔 두 개가 어디론가 날아가 있었고 핏빛 두꺼비는 눈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른 두 곳에서도 천둥소리나 폭음이 쉼 없이 들려와 전투가 한창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립이 피식 웃으며 구목혈섬 쪽으로 이동하려는데 핏빛 두꺼비로 변한 소명이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한 형 그만하면 됐습니다. 저희가 졌으니 더는 수사 일행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구목혈섬이 핏빛 안개를 일으켜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에 침음하던 한립도 몸을 줄여 금빛 속에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청평도인과 만화부인도 그것을 보았고, 마땅치 않았지만 신통과 보물을 거두고 소명 옆으로 돌아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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