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3화. 다섯 노조
*
“마음을 아주 굳게 먹었군요. 저도 더는 체면을 봐 드리지 않겠습니다. 화서선자와 무구 형께서 저를 도와 한 수사를 상대하시지요. 그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게 붙들어 두기만 하면 됩니다. 청평 수사와 만화 수사가 그 일행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의발과 공법을 찾으면 복제를 해서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지요. 이의 있으십니까?”
소명은 화서선자를 향해 물었다.
“우리 셋이서 고작 한 명을 상대하자고요? 광마라 불리던 시절과 달리 담이 참 작아 지셨습니다!”
화서선자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한 수사의 정체를 알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사실 그는…….
소명이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내자 화서선자는 안색이 달라져 한립을 보는 눈빛에 긴장감이 어렸다.
“알겠습니다. 저희 부부가 소 형과 저 자를 붙들어 두는 동안 청평, 만화 수사가 그 일행에게서 보물을 찾아내는 것으로 하지요. 딴 마음은 품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우리 부부의 성격이 어떤지는 잘 아시겠지요? 후회할 일 하지마세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선자! 저희가 배경 없는 떠도는 수사들도 아니고 바보 같은 선택을 할 리 없지요.”
청평도인이 기뻐하며 서둘러 답했다.
한립은 앞에서 다섯 명의 대승기 수사들이 그를 어떻게 상대할지 떠들고 있는데도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여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빙백에게 전음을 보내고, 등 뒤로 손가락을 움직여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릿한 금빛 실을 방출했다.
전음을 들은 빙백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가셨다.
“칩시다!”
소명이 곧장 바닥을 박차고 주변에 붉은 구름을 일으켰다. 이에 낮은 포효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구름 속에서 눈이 9개 달린 핏빛 두꺼비가 나타났다.
구목혈섬은 9개의 눈을 번쩍 떠서 각각 핏빛 빛기둥을 분출했다.
쉬쉬쉬쉭!
그러나 목표는 한립이 아닌 그 옆의 빙백이었다. 흠칫 놀란 빙백이 무의식중에 몸을 틀어 순간이동을 했다. 그때 화서선자도 양쪽 소매에서 수정 원반들을 날려 보냈는데 못해도 100개는 넘어 보였다.
웅웅!
원반들이 진동하며 폭우처럼 한립에게 쏟아져 내렸다.
화르륵.
그녀 옆에 멍하니 서있던 무구노조도 입에서 금색 화염을 뿜어 불바다도 모습을 감추었다. 금색 불바다가 치솟아 공간의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대승기 노조들답게 첫 공격부터 만만치 않은 위력으로 조금의 틈도 없이 빙백과 한립을 밀어붙였다.
이상한 것은 한립이 빙백을 도우러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는 점이었다.
콰릉!
그가 손을 뻗어 세 개의 산봉우리를 불러내자 산봉우리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두꺼운 보호막으로 변해 그를 둘러쌌다.
그러나 수많은 원반이 먼저 도달했다.
퍼퍼퍼펑!
둔탁한 폭음이 연달이 울렸지만 보호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색 불길에 미세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때 보호막 속의 한립이 돌연 낮게 기합을 넣고 금빛을 발산했다. 몸집을 키워 금털 거원으로 변신한 한립은 두 팔을 힘껏 뻗었다.
쾅!
푸른색과 검은색 빛덩이가 보호막을 빠져나가 번득이며 무구노조와 화서선자 앞에 도달했다. 바로 푸른 산봉우리와 검은 산봉우리였다.
충돌하기도 전에 밀려드는 엄청난 기운에 무구노조는 몸을 떨었고, 화서선자는 무시무시한 위력에 뒤쪽으로 피하며 서둘러 허공에 손을 저었다.
팟.
그러자 수많은 원반들이 뭉쳐져 거대 고리를 형성하더니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수축했다. 둘 사이에 눈을 찌를 듯한 빛이 터져 나왔다.
기세등등하게 날아들던 산봉우리는 잠시 허공에 멈추었다. 이에 무구노조도 수결을 맺어 금색 불바다 속에서 거대 화인(火人)을 만들어 냈다.
거대 화인은 주저 없이 그를 향해 날아드는 산봉우리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쾅!
엄청난 충돌에 화인의 손목까지 터져 금색 화염으로 돌아갔으나 산봉우리는 잠시 움찔하기만 했다. 허나 연이어 날아드는 주먹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퍼퍼퍼퍽!
다른 곳에서 소명이 변신한 구목혈섬이 긴 혀를 휘둘러 만들어낸 그물로 거대 금털 거원이 휘두르는 주먹 허상들을 막았다.
1대 3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만화부인과 청평도인은 네 사람이 맞붙은 것을 확인하고 눈빛을 교환한 뒤 빙백의 좌우로 이동했다.
만화부인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검은 나무 비녀를 불러내 가차 없이 허공을 그었다. 이에 목검이 바람을 타고 검은 장검으로 변해 새까만 화염을 분출했다
화르륵!
검은 화염은 커다란 화교(火蛟) 모양을 하고 빙백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다른 쪽에 있던 청평도인이 푸른 불진을 꺼내 힘껏 털어내자 가느다란 푸른 실들이 가득 나타나 빙백을 뒤덮었다.
쉬쉬쉬쉭!
이에 빙백은 안색이 급변해 얼음 방패를 들고 정혈을 한 모금 뱉었다. 피를 흡수한 얼음 방패는 보호막으로 변해 그녀를 빈틈없이 감쌌다.
푸른 실들이 사납게 떨어졌지만 보호막은 제법 잘 버텨냈다. 그 모습에 만화부인은 다시 검은 화교를 가리켰고 불길은 몇 배로 불어나 빙백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검은 화염의 엄청난 열기에 얼음 방패의 한기가 대부분 사라졌다.
콰쾅!
뜬금없이 굵직한 뇌전이 흑교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사방으로 뇌전 줄기들이 튀어 오르고 흑교는 애달픈 울음소리를 남기며 산산조각이 났다.
“누구냐!”
놀란 만화부인이 검은 장검으로 주변 허공을 마구 베었다. 그때 고공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금빛 찬란한 거물이 나타났다.
고개를 쳐든 만화부인이 발견한 것은 황금색 거대 게였다. 논 두 마지기는 될법한 엄청난 크기였다.
“저, 저게 뭐란 말인가?”
황금 게는 엄청난 기운을 발산했고, 그녀가 정체를 유추하기도 전에 집게 발 하나를 들어올렸다.
콰릉!
그러자 만화부인 위쪽에 굉음이 일고 반투명한 거대한 집게발 허상이 나타나 은색 뇌전들을 방출했다.
놀란 만화부인의 뒤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거대한 사자 허상으로 변해 입을 벌렸다. 시뻘건 사자의 입 안에서 검은 빛덩이가 튀어나갔다.
펑!
빛덩이가 터져 집게발을 꽁꽁 묶었다.
단단히 묵인 듯 보이던 불 사슬은 집게발이 움직이자 가볍게 끊어져 버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만화부인은 재빨리 수결을 맺었다.
크아앙!
그녀의 정수리에서 녹색 나무 방패가 튀어나오고 등 뒤의 검은 사자가 포효하며 검은 빛기둥을 분출했다.
쿵!
집게발은 녹색 나무방패에 튕겨나간 후 뜻밖에도 검은 빛기둥에 뚫려 흩어졌다. 그러나 만화부인은 기뻐하는 기색 없이 두 소매를 펄럭여 검은 바늘들을 빼곡하게 날려 보냈다.
검은 바늘들이 허공에 늘어서서 진법을 만들어냈다.
황금 게가 날린 공격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보았기에 상대를 경계하느라 빙백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모든 것을 목격한 청평도인은 울화가 치밀었다.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존재가 끼어들 줄은 몰랐다. 이제 만화부인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그는 불진을 불러내 이전보다 더 많은 푸른 실들을 날리고 다른 손으로는 푸른 거울을 불러냈다.
거울 표면이 반짝이며 흑백으로 이루어진 팔괘도안이 떠올라 빙백선자 위쪽으로 이동했다.
쿠르릉!
흑백의 팔괘문양 속에서 갑자기 나무 방망이들이 떨어져 내려 순식간에 커다란 나무 기둥으로 변해 얼음 보호막을 짓눌렀다.
빙백 선자가 대승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혼자 힘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푸른 실들과 거대 나무 기둥의 공격에 파문조차 일지 않던 얼음 보호막에 드디어 가느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호막 안의 빙백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빛이 날아올라 눈처럼 새하얀 거대 거북 허상으로 변했다.
스스스슷.
등딱지에 얼음 가시들이 잔뜩 자라난 거북은 입을 벌려 보호막 속으로 하얀 한기를 불어넣었다. 암담해졌던 얼음 보호막이 한기를 머금자 균열이 메워졌다.
“한무현구(寒武玄龜)!”
청평도인이 얼음 거북을 살피며 놀라 중얼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두 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가라!”
청평도인의 등 뒤로 흑백 태극도안이 수놓아진 도포를 입은 거대 도인 허상이 떠올랐다. 주위에서 무수히 많은 빛입자들이 몰려들어 도인 허상의 크기를 거대하게 부풀렸다.
도인 허상은 두 손을 교차해 하얀색 뇌화(雷火)들을 떨구었다. 그 모습에 빙백이 안색이 달라져 체내의 법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우웅!
그러자 거북의 체구가 몇 배로 커졌고 뿜어내는 한기도 더욱 강해졌다. 이에 얼음 보호막도 한기가 왕성해져 놀랍게도 푸른 실, 나무 기둥, 뇌화 세 가지의 공격을 간신히 이겨냈다.
‘어휴.’
청평도인은 빙백 선자의 방어에 앓는 소리를 냈다. 상대의 수행이 깊지 않아 만만히 봤는데 수련한 얼음 속성 신통이 현묘하고 오직 방어에만 집중해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어쩔 수 없이 공격을 유지하면서 상대의 법력이 소모될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황금 게와 만화부인은 은색 뇌전과 검은 기운을 날리며 아주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단시간에 승부가 나지는 않을 듯 했다.
또한 한립은 처음에는 상대의 실력을 떠보는 듯하다가 이제야 진정한 신통을 발휘하려는 듯했다.
주먹 허상으로는 소명의 구목혈섬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등 뒤로 삼두육비 법상이 떠올라 빛을 머금고 여섯 개의 눈을 꼭 감은 범성금신을 만들었다.
세 개의 얼굴은 한립과 똑같이 생겼지만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크아아앙!
거원이 길게 포효하며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다. 검은 빛이 머리에서 빠져나와 범성금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범성금신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여섯 개의 눈을 번쩍 뜨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구목혈섬 위로 파동이 일고 거목 크기의 범성금신이 나타나 금색 칼날들을 휘둘렀다.
휘휘휘휙!
무수히 많은 금색 검기들이 돌풍을 이루며 날아들었지만 금색 돌풍이 도달하기 전에 검기들이 먼저 튀어나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가슴이 서늘해진 소명은 핏빛 두꺼비의 혀로 검기들을 막지 않고 괴성을 터트렸다.
그러자 두꺼비 등이 울룩불룩해지더니 은색 주술문자들이 터져 나와 엉겨 붙었고 별안간 두꺼비 피부 위로 은색 주술문자 그물이 형성되었다.
금색 검기들이 아무리 베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두꺼비는 그동안 입을 벌려 핏빛 실로 가득 찬 커다란 푸른 구슬을 돌풍 쪽으로 내뿜었다.
콰르릉!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핏빛 실과 금빛이 교전했다.
금빛 돌풍이 흩어지고 드러난 범성금신은 들고 있던 칼날 절반이 훼손되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구멍은 금빛이 몰려들어 메꿔지고 부서진 칼날들도 순식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범성금신은 차갑게 눈을 번득이고 여섯 개의 칼날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구목혈섬은 더 이상 직접적인 대결은 피하고 싶은지 몸을 10배로 부풀린 채 등에서 핏빛 안개를 뿜어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휘우웅!
범성금신은 그것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고 광풍으로 변해 핏빛 안개를 파고 들었다.
잠시 후 그 안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고, 안개 속에서 양자 간의 격렬한 다툼이 진행되었다.
한립이 변한 거원이 냉소하고 털이 북슬북슬한 손을 들어 허공을 쥐려 했다.
“……!”
그런데 돌연 얼굴을 굳힌 거원은 급작스레 고개를 홱 비틀어 허공 어딘가로 주먹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파동이 일고 회색 그림자가 번득였다. 푸른색 거대 손이 갈고리처럼 휘어져 거원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쉬익!
푸른 거대 손의 손톱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겼다. 그러나 회색 그림자의 기습 공격은 거원의 주먹과 맞닥뜨렸다.
퍽!
푸른 거대 손이 공격당하고 금색 파동이 퍼졌다. 회색 그림자는 불시의 일격에 몸을 떨며 튕겨나가다 바로 비술을 펼쳐 불가사의한 속도로 덤벼들었다.
거원은 노성을 터트리며 몸을 완전히 돌려 두 주먹을 날렸다. 이에 일대가 금빛 광풍의 세계로 변했다.
그러나 회색 그림자는 거원 주먹에 맞아 번번이 나가떨어지면서도 전혀 부상을 입지 않고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