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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82화 (1,139/2,000)
  • 1382화. 북적이는 비석 앞

    *

    시간이 지날수록 보호막이 공격을 흡수하는 속도가 느려졌고 후반부의 공격은 보호막 자체의 힘으로 막아내야 했다. 보호막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깜빡깜빡 거리기 시작했다.

    거원이 돌연 두 주먹을 거두고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이에 등 뒤의 삼두육비 범성법상이 금신으로 실체화되더니 여섯 개의 손을 뻗었다.

    쿠르릉!

    금색 빛구슬 여섯 개가 나타나 하나로 뭉쳐 금색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금색 주술문자가 흩날리는 소용돌이가 흉흉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쉬쉭!

    바로 그때 천정진인 조각상의 두 눈에서 두 줄기 수정빛이 튀어나갔다. 이에 크게 흔들린 금색 소용돌이는 두 수정빛을 맞고도 빠른 속도로 떨어져 보호막과 부딪히려 했다.

    파파팟!

    조각상이 갑작스레 하얀 문양 진법을 뿜어내 눈부신 빛을 발산하자 불안정하던 보호막이 간신히 소용돌이의 괴력을 버텨냈다.

    그러나 금빛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고 밀어붙였다. 조각상이 아무리 현묘한 힘을 갖고 있다 해도 막아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얼마 후 천정진인 조각상의 하얀빛이 어두워지고 문양 진법이 사라졌다.

    쩌적!

    조각상이 금이 가 산산조각 나 떨어져 내렸다. 조각상의 지지를 잃은 금제도 그 뒤를 따라 붕괴되었다.

    이에 거원이 광소를 터트리고 손짓을 했다. 금색 소용돌이와 두 산봉우리가 사라지고 거원의 손에 금색 탑이 들렸다.

    빙백 선자가 오랜 세월 얻지 못한 보물을 그는 아주 간단히 손에 넣은 것이다. 몸집을 줄여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한립은 빙백 곁으로 갔다.

    “이번 공격도 통하지 않았으면 부끄러울 뻔했습니다. 빙백 선자께서 필요한 보물이 무엇인지 보시지요.”

    “단번에 금제를 파훼하시고 전부 수사의 공이 아닙니까. 제가 먼저 고를 수 없으니 한 형께서 먼저 세 가지를 고르시고 난 후에 제가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깜짝 놀란 빙백이 손을 내저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수련에 참고할 만한 비술이 적힌 옥간 말고 보물들은 제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옥간의 내용이나 복제해 주시면 됩니다.”

    그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아예 금탑을 던져주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꼭 갚겠습니다.”

    빙백은 한립의 행동에 안심하고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안에 들어 있는 보물 8가지를 확인하고는 붉은 옥간을 꺼내 한립에게 주었다.

    “수련에 도움이 되신다니 복제할 필요 없이 가져가시지요.”

    “알겠습니다.”

    한립도 거절하지 않고 붉은 옥간을 받아 챙겼고 빙백도 빙긋 웃음 지었다.

    “할 일을 마쳤으면 나가시지요. 바깥 전송진을 누가 부수기라도 하면 나가는데 고생깨나 해야 할 겁니다.”

    “잠시만요! 오랜 세월 이곳에 있으면서 천정궁 금제 일부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추 진법에 간단한 설정을 해놓으면 혈혼과 합류하는 대로 제가 원할 때 천정궁을 닫고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군요. 선자의 뜻대로 하시지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두 사람은 대전을 나가 한식경 후 한립이 들어왔던 전송진으로 돌아갔다.

    * * *

    산만한 핏빛 비석 밖.

    세 세람이 비석에 새겨진 거대 은색 문자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명 일행이었다. 그들은 고생스럽게 겨우 이 공간에 들어온 참이었다.

    “청평 수사, 이것이 중추로 통하는 입구라고요? 잘못 안 것은 아니겠지요. 각종 방법을 다 써 봐도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소명이 어두운 목소리로 따졌다.

    “확실합니다. 누가 수작을 부려놔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빈도는 은과문에 정통하지는 못하니까요. 이렇게 하시죠, 한 번만 더 시도해보고 안 되면 다 같이 힘으로 뚫어보는 겁니다. 다른 금제를 건드려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요.”

    청평도인도 그리 좋지 못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주세요.”

    생각 끝에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부인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청평도인이 심호흡을 하며 열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여 가며 수결을 맺고 또랑또랑하게 주문을 외웠다.

    비석 위 은색 문자들이 빛을 발하며 움직이기는 했는데 굉장히 느렸다.

    “열려라!”

    일다경이나 지나 은색 문자들이 하나로 뭉쳐져 밝은 빛을 터트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펑! 하고 빛이 흩어지고 문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번 시도도 실패였다.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때 비석의 은색 문자들이 웅웅 울며 한곳으로 응결해 은색 문양 진법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밝게 빛난 진법의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남녀가 나란히 날아 나왔다.

    “흠? 공교롭게도 세 분을 여기서도 뵙습니다.”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이 그들을 보고 말을 붙여왔다. 곁의 여인은 그저 놀란 얼굴로 세 대승기 수사들을 경계했다.

    남녀는 한립과 빙백 선자였다. 소명 일행은 안색이 급변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최악의 가정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한 형! 천정진인의 의발을 얻으셨습니까?”

    소명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는 아닙니다만, 제 일행은 무언가를 얻은 것으로 압니다. 왜 그러십니까?”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봤자 믿을 사람이 하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뭐라고요? 저 선자는…….”

    세 수사들의 시선이 빙백 선자에게 몰려들었다. 소명이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빙백과 혈혼은 똑같이 생겼지만 수행은 달랐다.

    청평도인과 만화부인도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었다.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천정진인의 의발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라서요. 선자께서 보물을 얻으셨다니 저희도 한 형의 체면을 생각해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거래를 하시지요.

    천정진인의 남긴 보물 말고 공법이나 비술, 혹은 도겁을 위한 비결 같은 것을 복제해 나눠주시는 겁니다. 저희가 만족할 만한 대가를 드릴 것이니 그 점은 걱정 마시고요.”

    소명은 적절한 타협책을 제시했다.

    “듣자니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 빙백 수사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한립은 고개를 돌려 곁의 여인을 보았다.

    “천정 선배님이 남기신 공법과 신통 몇 종류를 얻었지만 모종의 혼백 비술로 의식에 직접 각인된 터라 옥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안에 금제 맹세가 걸려 있어 진정으로 공법을 대성하기 전에는 관련 정보를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도 없고요.

    맹세를 어기면 혼백 일부가 흩어지거나 심한 경우 원영이 폭발해 죽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도겁을 위한 비결은 없습니다. 제가 본 기록에 따르면 천정 선배님이 수많은 대천겁에서 무사히 살아남으신 것은 전부 선계에서 유실된 담뢰선과(曇雷仙果)의 씨앗을 복용한 덕분이니까요.”

    빙백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립과 소명 일행이 놀랄만한 내용을 늘어놓았다.

    “담뢰선과! 선계에나 있다는 과실의 씨앗을 복용했다면 어렵지 않게 여러 대천겁을 이겨낸 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수사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럼 저는 어찌 증명하란 말입니까?”

    청평도인이 따지자 빙백 선자가 냉랭히 반문했다.

    “빈도가 익힌 비술 중에 상대의 의식을 손상시키지 않고 원하는 정보를 알아볼…….”

    “꿈 깨시지요! 누가 함부로 남에게 의식을 개방한단 말입니까.”

    끝까지 듣지 않고 빙백은 단호히 거절했다. 의식을 개방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남의 손에 맡겨 놓는 것과 같았다.

    “한 수사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수사의 능력이 대단한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저희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청평도인은 여인을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자 한립을 향해 얼굴을 굳혔다.

    “본인이 원치 않는다는데 당연히 거래는 할 수 없지요. 청평 수사, 빈손으로 돌아가기 싫다면 스스로 다른 구역들을 샅샅이 뒤져 보세요. 예기치 못한 수확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저희는 바빠서 이만.”

    “뭐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그냥 갈 수는…….”

    “그냥 가지 않으면요?”

    만화 부인이 성이나 쏘아붙이려는데 한립이 돌연 차가운 얼굴로 성큼 나섰다.

    쿠쿵!

    찰나의 순간 평범한 대승기 존재마저 몸을 떨만 한 엄청난 기운이 강림했다. 청평도인과 만화부인은 압력에 밀려 뒷걸음질 쳤고 소명만이 유일하게 부르르 몸을 떨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소명의 가면에 붉은빛이 어려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걸음을 더 다가갔다. 동시에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소명도 상고흉수에게 몸통박치기를 당한 것처럼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만화 수사와 손속을 겨룰 때는 실력을 거의 발휘하지 않으셨군요. 법력의 심후함만으로도 상고진령 못지않습니다.”

    소명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생겨 냉랭히 말했다. 그리고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웃음을 짓자 한립은 압력을 거두고 뒷짐을 쥐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만화부인과 청평도인도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함부로 떠들지 못했다. 천정진인의 의발이 아쉬워도 실력차이가 이렇게 나는데 싸운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갑시다.”

    지긋이 한립을 쳐다보던 소명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소 형 정말 천정진인의 공법을 포기하려 하십니까?”

    청평도인이 평소 성격답지 않게 소리를 높였다.

    “우리 셋이 협공을 해도 한 수사의 적수가 못될 겁니다. 청평 수사에게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면 한 형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렇습니다.”

    담담한 소명의 말에 청평도인이 씁쓸하게 물러서려 했다.

    “하하, 저희 부부까지 나서면요?”

    돌연 멀리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다른 쪽에서 두 줄기 둔광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우직하게 생긴 무구 노조와 꽃처럼 화사한 화서선자였다.

    ‘이런…….’

    빙백은 대승기 수사들이 또 날아들자 속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한립은 덤덤히 무구노조와 화서선자를 살폈다.

    “두 분이 어찌?”

    “글쎄요?”

    놀란 청평도인의 말에 화서선자가 빙긋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소명이 입꼬리를 꿈틀하고 동료들에게 가슴이 서늘해질 만한 말을 했다.

    “만화 수사, 청평 수사 뭔가 달라진 것이 없는지 점검을 해보시지요.”

    “제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화 부인은 정색하긴 했지만 소명이 허튼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의식으로 자신의 몸을 꼼꼼히 훑었다.

    옆의 청평도인도 가라앉은 얼굴로 수결을 맺고 몸은 물론 도포와 장신구까지 빠짐없이 확인했다.

    “잇!”

    잠시 후 성질이 난 만화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뭔가를 잡아 뜯었다. 그러자 손가락 마디 길이의 투명하고 가느다란 벌레가 머리카락에 섞여 있었다.

    “무진고(無塵蠱)! 언제 이런 걸 내게 심어 놓은 것입니까?”

    노파가 대노하며 가느다란 벌레를 비틀어 죽이고 화를 터트렸다.

    “물론 천정궁에 들어오기 전부터입니다! 그래야 뒤쫓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게 좋은 정보가 있으면 미리미리 알려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화서 선자는 배시시 웃으며 만화 부인이 화가 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대로 우리 문하의 제자들을 제대로 손봐주어야겠습니다. 허나 두 분이 우리를 뒤따라온 것이 이제 보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한 형, 이제 이쪽은 다섯입니다. 생각이 좀 바뀌십니까?”

    청평도인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한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모두 지금 당장 떠나시든지 아니면 저와 싸우시던지 한 가지만 고르시지요.”

    한립이 기다렸다는 듯 태연히 답했다. 동급 수사가 셋이고 다섯이고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였다. 그 말에 소명 무리는 물론 화서 선자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소 형,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청평도인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명을 향해 물었다. 소명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한 형이 고집을 피우시니 저희도 곤란합니다. 수사의 신통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만 상황이 이러니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겠군요.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상량의 여지조차 없습니까?”

    “하하하, 빙백 수사가 공법을 복제해 거래할 수 있었으면 저도 공연히 힘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사의 말대로 상황이 이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신통이 어떠한지 가르침이나 청해야겠습니다.”

    한립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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