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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80화 (1,137/2,000)
  • 1380화. 혈살시(血煞尸)

    *

    웅웅!

    칼날에서 괴충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 노인은 힘껏 단검을 휘둘러 핏빛 검기를 날렸다.

    콰르릉 콰쾅! 콰릉!

    핏빛이 철롱에 닿기도 전에 수많은 금색 뇌전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핏빛은 연기가 되어 튕겨 나와 그대로 단검 속으로 흡수되었다.

    “벽사신뢰!”

    여 노인은 단검에 작은 균열이 생긴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철롱이 뿜어낸 금색 뇌전은 그가 익힌 벽사신뢰와 흡사하면서도 뭔가 달랐다. 위력은 그의 벽사신뢰 이상이었다.

    “평범한 벽사신뢰가 아닙니다. 그렇지! 천정진인은 여러 종류의 뇌전 신통에 능할 뿐만 아니라, 뇌전을 정련하는 특수한 기술이 있어 평범한 뇌전도 위력을 10배 이상 증폭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 노인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이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벽사신뢰는 우리가 익힌 무도 공법과 그야말로 상극 중에 상극입니다. 무슨 신통을 발휘하던 위력이 크게 줄어들 텐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여 노인은 씩씩거리며 단검을 회수하고는 다른 노인들의 의견을 구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벽사신뢰가 아무리 위력적이어도 조종할 주인이 없으면 해결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철롱의 금제가 이것 하나뿐이 아닐 것 같아 고민입니다.”

    오 노인은 유골을 둘러싼 핏빛 사슬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요. 일단 노부의 유명흑수(幽冥黑水)로 벽사신뢰를 물리칠 수 있는지 봅시다.”

    마지막 노인이 입에서 호리병발을 분출하자 호리병박이 뒤집히며 그 안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 * *

    사당 안에 들어간 한립은 커다란 의자에 앉아 그곳에 새워진 조각상을 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하얀 도복을 입고 허리춤에 혈홍색 장검을 찬 중년 도사의 조각은 굉장히 사실적이었다.

    도사 양쪽으로는 조각상을 보호하듯 푸른 거대 매와 은색 사마귀 조각상이 서있었다.

    “아마 천정진인이겠군. 이런 풍채를 지녔을 줄은 몰랐는데.”

    또한 조각상 앞쪽으로는 커다란 혈갑(血甲) 괴뢰 네 마리와 정체 모를 유골 2개가 있었는데 유골들을 혈갑괴뢰가 둘러싸고 있었다.

    혈갑괴뢰들은 바닥에 엎어져 꼼짝하지 않았지만 갑옷은 녹슨 곳 없이 반짝였고 손에 들고 있는 망치와 검은 언제라도 날카롭게 휘둘러질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또한 유골 중 하나는 뼈가 절반 밖에 남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머리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부서진 보라색 방패와 찌그러진 은색 자만 남아 있었다.

    팟.

    그러나 한립은 유골과 혈갑괴뢰는 신경 쓰지 않고 돌연 천정진인 조각상 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손상된 소형 진법이 새겨진 우윳빛 제단이 남아 있었다.

    누가 훔쳐 갔는지 무언가 박혀 있어야할 자리들이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진법 옆으로는 또 다른 유골 두 개가 엎어져 있었다.

    은색 갑옷이 부서진 유골은 단전이 있어야할 자리가 뚫려 있었고, 나머지 유골은 녹색으로 물든 것으로 보아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법을 사이에 두고 싸우다 동귀어진한 것이다.

    휘휙!

    한립은 두 유골이 지니고 있던 네 개의 저물탁을 불러들였다. 그는 의식으로 저물탁 안의 물건을 확인하고는 새로운 눈빛으로 손상된 진법을 내려다보았다.

    “전송진!”

    전송진은 손상된 부분이 많아 그의 실력으로도 고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싶었다.

    그때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정혈이 담긴 하얀 병을 불러내자 하얀 병의 반짝거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웃음기가 어린 그는 바로 진법 깃발과 원반 그리고 열댓 개의 수정돌을 꺼내 허공에 띄웠다.

    * * *

    쿠와앙!

    검은 비늘 갑옷을 입은 사슴 머리 괴수가 은색 장도를 내리치자 혈호 위로 놀라운 파동이 일었다.

    굵은 은색 뇌전이 무서운 기세로 폭발해 아래쪽 혈호 도 크게 일렁인 것이다.

    호수 아래 가라 앉아 있던 수많은 백골들이 드러났다가 다시 핏물에 덮였다.

    쨍강!

    그러자 거대 철롱 위쪽에 기다랗게 균열이 생겼다. 이에 허공에 떠있던 무령삼성들이 희색을 드러냈다.

    “으하하, 오랜 시간 공들인 보람이 있습니다! 드디어 부서졌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여 노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조각상을 저물탁에 넣어두고 녹색 빛줄기로 변해 철롱 틈으로 향했다. 연이어 두 노인도 흥분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사슴 머리 괴수는 조용히 철롱 위에 떠있었다.

    그들은 철롱 안으로 들어가 무턱대고 다가가지 않고 핏빛 사슬에 감긴 반인반마 유골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오 노인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튕겨 검은 빛을 날렸다. 그들의 예상과 달리 검은 빛은 아무 문제없이 사슬에 닿아 불길을 일으켰다.

    잠시 후 핏빛 사슬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천무대인의 유골만이 검은 불길 속에서도 새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세 노인은 얼굴이 밝아지며 갈비뼈 사이에 위치한 거무스름한 물체로 다가갔다.

    “두 분은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집중해서 살펴보던 오 노인의 주름이 깊어졌다.

    “아니요. 천무대인 유골에 남은 힘이 의식을 교란해서 제대로 살필 수가 없습니다.”

    “저야 의식의 힘이 두 분만 못하니 당연히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여 노인도 답답하다는 듯 말했고, 마지막 노인도 한숨을 내쉬었다.

    “흐흐, 어찌 되었든 천무대인이 남긴 물건입니다. 꺼내서 확인하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여 노인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괴소를 흘렸다. 그는 다른 노인이 말리기도 전에 백골 검을 불러내 검은 물건이 있는 곳을 갈랐다.

    탱!

    막대한 힘을 가진 백골 검이 그대로 튕겨 나왔다. 게다가 천무대인의 유골에는 작은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무령삼성은 그것을 보고 실망하기 보다는 더욱 검은 물체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북돋았다.

    죽은 후에 남은 뼈조차도 이렇게 강력하다면 천무대인이 생전에 그만큼 현묘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유골검(幽骨劍)이 통하지 않으니 평범한 보물로는 유골을 깰 수 없겠습니다. 너무 위력적인 보물을 사용하면 안에 들어있는 물건이 파괴될까 걱정이고요. 제가 비술을 이용해 꺼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 노인이 길게 숨을 내쉬며 먼저 나섰다.

    “투환술(透煥術)말이군요.”

    여 노인도 아는 비술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거라면 물건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막대한 법력을 소모해야 하는 술법인데 이미 원기를 크게 상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강력한 술법을 펼치면 몸이 견뎌내겠습니까?”

    세 번째 노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직 버틸 만합니다. 제가 실패하면 두 분이 다른 패도적인 방법을 사용하시면 될 테지요.”

    오 노인도 충분히 고려해보았는지 담담히 답했다. 그는 다른 노인들이 반대하지 않자 핏빛 단약을 꺼내 삼키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웅!

    핏빛이 피어올라 쇠약해졌던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가 수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자 혈호 위의 천지원기가 요동쳤고, 우윳빛 주술문자들이 오 노인을 감싸고 진동했다.

    노인은 천천히 수결을 풀며 한 손을 유골 갈비뼈 사이의 물체로 가져갔다. 우윳빛 주술문자들이 몰려들어 투명하게 변했다. 그리고 오 노인의 손도 투명해졌다.

    투명한 노인의 손이 그대로 갈비뼈를 통과해 검은 물체를 움켜쥐려 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오 노인의 몸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법력이 유실되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창백했고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팟!

    드디어 다섯 손가락이 검은 물체에 닿았다. 오 노인은 아주 천천히 그것을 집어 유골 안에서 빼냈다. 그러자 투명했던 손가락들이 서서히 원래의 색깔을 되찾고 있었다.

    진땀을 빼긴 했지만 원하던 물건을 꺼냈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오 형! 어서어서 손을 펴보세요. 천무대인의 공법과 의발이 담긴 옥간이 맞습니까?”

    두 노인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특히 여 노인은 오 노인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겨우 숨을 고른 오 노인이 힘겹게 손을 펴자 세밀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검은 옥패가 드러났다.

    “이게 바로…….”

    “안 돼!”

    여 노인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오 노인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옥패를 냅다 고공으로 던지고 뒤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퍼펑!

    옥패가 폭발해 검은 주술문자들을 토해냈다. 비처럼 쏟아져 내린 주술문자들이 닿는 곳마다 깊숙이 파고들었다.

    뒤늦게 피하기는 했지만 지척에 있던 무령삼성들도 검은 주술문자 일부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주술문자들은 보호막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에 대경실색한 노인들은 방어보물을 꺼내거나 몸에서 검은 불길을 일으켜 막으려 했지만 주술문자에는 통하지 않았다.

    세 노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져 천무대인 유골 위로 떨어졌다.

    이때 그들의 얼굴이며 손발에 검은 실들이 빼곡히 퍼져 있었다.

    육신은 물론 진원까지 제압당한 것처럼 마비되었고 깊이 숨겨둔 원영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무령삼성도 당황하고 말았다.

    이때 주변으로 스며든 검은 주술문자들이 검은 실이 되어 반인반마의 유골로 스며들었다. 거대 유골의 텅 빈 눈구멍에 녹색 빛이 나타났다.

    동시에 유골의 뼈에서 핏빛이 흘러 나와 핏빛 실들을 만들어 파고드는 검은 실들과 미친 듯이 싸우기 시작했다.

    검은빛과 붉은빛이 어찌나 요란하게 반짝이는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혀, 혈살시(血煞尸)로 변하고 있습니다! 천무대인의 의발이 아니라 천정진인이 시체의 변화를 억제하려 심어둔 금제부적을 꺼낸 거라고요!”

    웅얼웅얼 거리는 마지막 노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다른 두 노인도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법력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검은 실들이 거머리처럼 경맥 곳곳에 달라붙어 있어 실패하고 말았다.

    히히힝!

    거대 유골이 돌연 괴성을 터트리자 눈구멍의 녹색 불길이 강해졌다. 뼈에서 새어나온 핏빛 실이 두 배로 굵어져 제압하려는 검은 실들을 조각내고 있었다.

    검은 실들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제거되자 반인반마 거대 유골이 진동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히이익!”

    쓰러져 있던 무령삼성은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평소 그들 셋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었는데 육신과 진원이 제압당했으니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죽은 목숨과 다름없었다.

    천무대인의 유골이 천정진인이 남긴 금제를 완전히 벗어나 혈살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흐아압!”

    오 노인과 여 노인이 기합을 내지르자 그들의 두개골에서 소인이 튀어나왔다.

    퍼퍼퍽!

    마지막 노인은 피부에서 녹색 주술문자가 떠오른 후 피부가 찢어지고 녹색 나무 덩굴들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인간으로 변했다.

    나무인간으로 변한 노인은 상당한 힘을 회복해 나무줄기를 휘둘렀다. 이에 몸에 퍼져 있던 검은 실들이 찢겨나가 위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쉬쉭!

    이때 느릿하게 움직이던 천무 유골이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열손가락에서 핏빛 실들이 튀어나가 거대 그물로 변한 나무 인간을 덮쳤다.

    콰콰쾅!

    달아나던 나무 인간은 산산조각이 나 폭발했다.

    쿵!

    천무 유골의 손이 초록색 나무 인간 잔해 사이에서 초록색 소인을 잡아채 으적으적 뜯어먹기 시작했다. 녹색 불길이 반짝이던 유골의 눈구멍이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찌 저런!”

    먼저 철롱을 탈출한 오 노인과 여 노인의 원영은 마지막 노인의 원영이 잡아먹히고 있는 것을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여 노인의 원영이 두 손을 교차해 검은 화염을 일으켰다. 화염이 새까만 거대 전갈 허상으로 변해 철롱 속으로 날아들려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오 노인의 원영이 그를 가로막았다.

    “이런 공격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육신을 잃고 원기를 크게 상했으니 우리는 혈살시의 적수가 못됩니다. 저 놈이 완전히 자유를 되찾기 전에 달아나야 살 수 있다고요! 안 그러면 우린 다 죽습니다!”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철롱이 휘청이며 거대 유골이 다리를 세워 몸을 완전히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눈은 정확히 철롱 밖의 두 원영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마 나머지 한 다리에 아직 검은 실들이 남아 핏빛 실들을 막아주고 있어 철롱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혈살기와 눈이 마주친 두 원영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알겠습니다. 오 형의 말대로 따르겠습니다!”

    여 노인이 이를 악물고 전갈 허상을 흩어버렸다.

    “그래야지요. 우리가 마음먹고 달아나면 제깟 게 어쩌겠습니까! 목숨을 부지해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안심한 오 노인은 얼굴을 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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