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9화. 철롱(鐵籠)
*
하늘과 땅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눈보라가 괴력에 이끌리듯 검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표면에 은색 주술문자들이 반짝인 암녹색 검에서 검기가 날아가 보호막을 때렸다.
파아앗!
금기가 닿는 순간 태양처럼 강력한 녹색 빛이 터져 보호막이 매몰되었다. 보호막이 웅웅 울어대며 오색 주술문자들을 흘려보내 저항했지만 녹색 태양 속에서 녹아내렸다.
결국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보호막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이에 안색이 창백해진 한립은 장검을 치우고 바로 제단 위의 전송진에 올랐다.
우웅!
그는 손끝으로 진법에 하얀 법결을 던져 넣고는 하얀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다음 순간, 잿빛 허공에 하얀빛이 반짝이고 한립이 나타났다. 전방에는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혈홍색 거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아래쪽을 내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굵은 은색 문자들이 적혀 있어 무척 신비로웠다.
‘여긴…….’
한립은 비석과 주변의 잿빛 허공을 보고는 눈빛을 번득였다. 이 구역으로 들어서기 전에 바깥에서 어렴풋이 보였던 전당과 누각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금제를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낯선 공간으로 전송된 것이 확실했다.
* * *
막 빙하지대 금제를 벗어난 소명 일행은 선경처럼 펼쳐진 금색 전당과 은색 누각들을 보고 난색을 표했다.
“여긴 천정궁 중추가 아닙니다. 빈도의 기록에 따르면 전송진을 통해 중추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청평도인이 얼떨떨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기록과 모든 게 일치했습니다. 청평 수사께서 본 기록이 틀린 것은 아닐 겁니다. 분명 금제에 변화가 생긴 것이겠지요.”
소명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차분히 말했다.
“금제가 스스로 변화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만화 부인이 열 받아 죽겠다는 듯 불퉁거렸다.
“정확한 원인은 말하기 어렵습니다. 천정진인의 진법 조화가 상상을 초월하고 천정궁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기에 금제 자체에 변화가 생겨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거기다 다른 곳은 다 그대로인데 중추 구역 금제만 이변이 생긴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누군가 손을 써서 이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명은 조근 조근 설명해주었다.
“우리보다 앞서간 자는 인족 녀석밖에 없는데 그럴 리가요! 무슨 선인의 신통이라도 지녀 그 짧은 사이에 거대하고 복잡한 금제를 개조했단 뜻입니까.”
만화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 지난번 개방 기간에 천정궁에 들어간 수사들은 잊으셨나 봅니다. 그들은 수행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열쇠를 지닌 자들이 몇 있었고, 천정궁이 닫히기 전 바깥으로 전송되지 못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소 형 말씀은 그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손을 썼다는 것입니까?”
청평 도인이 말뜻을 알아듣고 안색이 달라졌다.
“아마도요.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원래대로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정궁이 닫히는 순간 강제로 바깥으로 전송되니까요. 비술을 이용해 강제로 남으려 들면 금제가 발동해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실력이 천정진인보다 강해 금제의 힘에 저항하거나 중추 구역에 이르러 천정진인의 의발을 얻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만약 정말 그런 자가 있었다면 금제의 출구를 다른 곳으로 바꾸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로서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겠고요.”
청평 도인이 생각을 정리하며 근심을 드러냈다.
“비승 직전이었던 천정진인보다 강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허나 천정진인의 의발을 얻고 중추 구역을 통제하게 된 자가 있다니요? 그럼 천정궁은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소명은 냉소를 흘렸다.
“지난번에 진입한 수사가 살아남았더라도 천정궁의 금제를 일부밖에는 통제하지 못한다면서요. 아직 중추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천정진인의 공법과 보물을 전부 손에 넣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만화 부인이 두 눈을 반짝였다.
“아, 빈도의 기억에 따르면 금제의 중추로 가는 또 다른 출구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방법이긴 하지만 강력한 보호막을 강제로 뚫기만 하면 중추가 있는 거대 비석처럼 생긴 탑에 이를 수 있어요.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청평 도인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희망적인 소식을 알렸다.
“금제가 강력해 오랜 시일이 걸렸는데 다시 들어가자고요? 그러다 너무 늦는 것 아닙니까?”
만화 부인이 머뭇거렸다.
“한번 지난 곳이라 금제에 익숙해졌습니다. 분명 금제를 통과하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에요. 정 안 되면 원기를 소모하더라도 패도적인 방법을 써야지요.”
소명의 말에 청평 도인과 만화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립은 거대 비석을 빠르게 한 바퀴 돌아보고는 입구를 찾지 못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미간을 좁힌 그의 소매 속에서 하얀 병이 날아올랐다.
투명한 병 안에는 핏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빙백 수사의 본체가 이곳에 갇혀 있으니 어쩐다. 조금 전 구역을 선택할 때 혈혼의 정혈이 미세하게 반응하지 않았으면 놓치고 지나칠 뻔했어.”
한립은 병을 든 채로 조금 더 고도를 높여 탑을 돌았다.
웅.
열댓 번 반복했을 때 병 안의 핏방울이 미약하게 빛을 발했다. 이에 한립은 비석으로 다가가 일렬로 배열된 팔뚝 크기의 은색 문자 몇 개를 발견했다.
“은과문. 다른 수사였다면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그는 자세히 문자를 살피다 손을 들어 허공 몇 군데를 짚었다. 그러자 은색 문자들이 소리 없이 이동해 하나로 융합되어 회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자리에 통로가 뚫렸다.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그 안으로 들어갔고 입구는 다시 봉합되어 사라졌다.
두 발이 매끄러운 지면에 닿자 그는 우윳빛 빛구슬을 띄워 내부를 비추었다. 청석 돌판을 붙여 만들어 놓은 반원형의 통로에는 정체 모를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선홍색 문양들에서 마치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그는 의식을 퍼트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강대한 힘에 억눌려 의식을 조금만 멀리 보내도 법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금공금제 또한 바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선계 비승한 수사답게 천정진인의 수법은 남달랐다.
다다다다닷!
한립은 어쩔 수 없이 단단한 몸을 움직여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저계 수사가 둔광을 이용해 날아가는 것과 맞먹는 속도였다.
무리하면 날아가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통로는 위쪽으로 향해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거의 백여 장을 올랐다.
‘호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진 한립은 탁 트인 대청에 이르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청은 높이도 높았지만 너비가 정말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매끄러운 청석 바닥이 군데군데 깨져 있었고 비검과 비도 잔해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또한 대청 중앙에는 불에 탄 흔적과 함께 악어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한 거대 괴수의 뼈가 반짝였다.
누군가 이곳에 들어와 괴수를 죽인 것이 분명했다. 남겨진 흔적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 일이 틀림없었는데 뼈에 남겨진 희미한 기운으로 보아 괴수는 합체기를 대성한 상태였다.
겨우 합체기 괴수를 상대로 이렇게 격렬하게 싸운 것을 보면 이곳에 침입한 자도 대승기 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립은 대청 벽에 설치된 선반들로 시선을 돌렸다.
거무튀튀한 선반들 위로 텅 빈 은색 받침대들만 놓여 있었다. 누군가 그곳에 있던 물건들을 챙겨간 것이다.
한립은 여기까지 살피고는 또 다른 문으로 향했다. 청석 통로가 역시 위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식경을 달려간 그는 이전보다 더 큰 공간에 도착했다. 위쪽으로는 하얀 구름이 떠있고 바닥에는 하얀 모래알이 깔린 공간에 사당(祠堂)처럼 보이는 삼각형의 건물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병은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 * *
무령삼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운해(雲海)를 앞에 두고 서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음산한 바람을 내뿜은 운해 속에서 소름끼치는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영충과 영수의 기운은 쇠해 있었지만 운해를 보는 노인들의 눈빛만은 강렬했다. 운해 속에 우뚝 솟은 핏빛 문 때문이었다.
거산 크기의 문 위로 혈옥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게 혈옥이라고요? 상상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참 만에 여 노인이 입을 열었다.
“눈속임일 수도 있습니다!”
옆에 선 오 노인이 소매를 펄럭여 검은 악귀 머리가 그려진 푸른 목패를 불러냈다.
우웅!
바람을 타고 커다랗게 변한 푸른 목패에서 주술문자들이 떠오르고 악귀 머리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콰르릉!
악귀의 입에서 푸른 바람기둥이 날아가 운해를 꿰뚫었다.
“저건!”
바람기둥이 운해 속에 만든 통로 속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진득한 핏물로 가득 찬 거대 호수 속에 손가락 크기의 하얀 구더기들이 가득했다.
정말 소름 끼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게 혈옥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마저 환상은 아니겠지요?”
여 노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청강풍(靑罡風)을 버틸 환상은 없습니다.”
오 노인이 코웃음을 치고 입에서 정혈을 내뱉었다. 정혈을 흡수한 목패에서 악귀 머리가 더욱 굵직한 바람기둥을 분출해 통로를 넓혔다.
일다경이 흘러 안개가 사라지고 거대 호수 대부분이 드러났다.
세 노인들의 얼굴이 퍽 밝았다.
피로 이루어진 호수와 구더기들을 제외하고 그 위로 열댓 개의 새까만 철롱(鐵籠)들이 떠있기 때문이다.
철로 만들어진 우리는 큰 것도 있었고 작은 것도 있었는데 금색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고 날카로운 핏빛 가시들이 박혀 있어 아주 험악해 보였다.
대부분 철롱이 닫혀 있고 몇 개만이 굳게 닫혀 각기 다른 유골을 가두고 있었다. 무령삼성은 유골들에 남은 희미한 기운을 감지하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천정진인이 직접 가둬둔 강적들답게 기운이 대단합니다. 어떤 것이 천무대인의 유골인지 잘 찾아봐야겠어요.”
마지막 노인이 유골들을 훑었다.
“천무대인은 무도공법을 수련했으니 유골도 남들과는 다를 겁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으면 알아보기는 쉬울 거예요.”
오 노인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실력자들의 유골도 귀한 보물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놓칠 수 없겠지요?”
여 노인이 탐욕스런 마음을 드러냈다.
“물론입니다.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천무대인이니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의발부터 챙기시지요.”
오 노인의 의견에 다른 두 노인이 따지지 않고 각종 보물로 몸을 보호하고 가까운 철롱으로 날아갔다.
괴이한 혈호(血湖)를 밑에 두고 완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철롱에 다가가도 혈호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가장 체구가 작은 유골의 기운을 확인한 후 다른 철롱으로 향했다.
그들은 연달아 세 개의 유골을 살폈고 자기들도 모르게 혈호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네 번째 철롱은 혈호 위에 있는 것들 중 가장 크기가 컸다. 웬만한 산 대여섯 개를 쌓아 놓은 것 같은 크기에 그 안의 유골에는 핏빛 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오래된 사슬에 갈라진 흔적이 남아 있어 유골이 생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던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반인반마(半人半馬) 모양을 한 녹색 유골 안에서 아직도 금빛이 아른거렸다.
평범한 인족과 비슷한 상반신과 네 개의 다리를 지닌 말의 하반신이 대비되었다.
“여기가 분명합니다. 으하하, 천무선배님의 유골이에요.”
유골에서 발산되는 기운을 감응한 여 노인은 기뻐 날뛸 지경이었다.
“무도공법의 기운이 확실하군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기운이 이리 강력하게 남아 있다니 천무 어르신의 유골이 맞을 겁니다!”
눈을 감고 있던 마지막 노인도 흥분해 소리쳤다.
“그런데 그분의 의발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오 노인의 말에 다른 두 노인이 거대 철롱 안에 반인반마의 뼈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뭘까요?”
여 노인이 이리저리 살피다 거대 유골 어딘가를 가리켰다. 갈비뼈들 사이에 거무스름한 뭔가가 박혀 있었다. 옥패 같기도 하고 옥으로 된 서책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천무 선배님의 유골이 확실하니 어서 철롱을 엽시다.”
오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둘러 말했다. 그의 여러 보물들이 파동을 휘날리며 그대로 철롱으로 날아들었다.
콰콰쾅!
검은 철롱은 금빛을 반짝이며 흔들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갔다.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여 노인이 자신 있게 나서서 핏빛 단검을 불러냈다.
칼날에는 무수히 많은 괴충 도안이 새겨져 있었고 손잡이에는 엄지손가락만한 하얀 수정이 박혀 있었다. 노인은 단검으로 자신의 손가락 하나 잘라내고 주문을 외웠다.
스스슷!
잘려 나간 손가락이 핏빛 안개로 변해 단검으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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