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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78화 (1,135/2,000)

1378화. 혈옥(血獄)

*

“무서운 추위로구나.”

한립은 눈송이들로 뒤덮인 빙하 세계를 내려다보았다. 사방에서 어찌나 한기가 심하게 몰아치는지 보호막을 두른 그의 피부에도 남색 서리가 내려앉았다.

범성진마공을 대성하고 이렇게 심한 한기는 처음이었다. 극한의 추위를 느끼게 하는 환상으로 다른 구역의 금제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화륵!

그는 한참 동안 허공에 떠있다 몸에서 은색 화염을 일으켰다. 뼛속까지 스며들던 한기가 금방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휘우웅.

앞으로 날아가다 보니 바람이 거세지고 주변 눈송이들이 뭉쳐져 남색 얼음 참새로 변했다. 대충 훑어봐도 천 마리가 넘었고, 날개를 파닥여 둥근 남색 빛구슬을 미친 듯이 쏘아댔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은색 불길을 몇 배로 두껍게 일으켰다. 눈보라 속에서 은색 화염과 남색 빛구슬들이 충돌했다.

* * *

콰쾅! 쿠콰쾅!

빙하 구역 입구에서 소명 일행이 열댓 개의 보물을 불러내 남색 거인 십여 마리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얼음 갑옷과 얼음 병장기를 든 거인들은 눈보라를 조종했고 아무리 중상을 입어도 눈을 끌어와 부상을 회복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불멸체나 다름없었다.

* * *

핏빛 기둥들이 잔뜩 세워진 거대 전당 안.

무령삼성들이 거대 영수와 영충을 타고 기둥들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핏빛 기둥을 자세히 살펴보니 수많은 해골머리들이 박혀 수시로 피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오 수사,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니겠지요. 이곳에 혈옥 입구가 있는 겁니까?”

거대 지네를 탄 노인이 불안한 얼굴로 곁의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여 형. 바깥의 금제를 간단히 파훼하는 것을 직접 보셔놓고서는 왜 그러십니까? 고대 비석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분명 천정진인이 강적들을 가둬놓았던 곳이라고요. 우리 무도 일맥의 최강자였던 천무대인께서 천정진인과 7일 밤낮을 싸우다 한순간의 실수로 패하고 혈옥에 갇히셨지요. 그 일만 아니었어도 천무대인의 자질과 신통에 이후 선계로 비승을 하고도 남으셨을 겁니다.”

거대 전갈을 탄 노인이 상대를 안심시켰다.

“이곳이 괴이해 오 형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허나 우리는 무도신통을 수련해 다른 공법과 조화를 이룰 수 없어, 천정진인의 의발과 공법을 찾아봤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혈옥의 천무대인의 공법과 보물을 찾아야 나중에 선계 비승을 노려볼 수 있을 테지요.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혈옥을 찾은 것이고요.”

마지막 노인도 담담히 말했다.

“비석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외부 금제를 푸는 방법만 남아있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내부에 무슨 금제가 있고 어떻게 파훼할지 모르니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요.”

여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혈옥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남들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안에 아무리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어도 우리 셋이 힘을 합쳐서 못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 노인이 웃음을 흘렸다.

“맞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런데 아까 만난 그 거원으로 변신했던 녀석 말입니다. 몸이 아주 튼튼한 게 소 노괴 무리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잡아다 혈육괴뢰(血肉傀儡)를 제련하면 아주 쓸 만했을 겁니다.”

“강력한 마도 신통을 익힌 자 같았습니다. 우리가 협공해도 제압하려면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 전투를 불사할 것처럼 허풍을 떤 건 다른 이들이 우리를 따라 혈옥으로 가려 할까봐 위협한 것이지 진짜로 싸우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 노인이 한립을 언급하자 오 노인이 냉소를 했다.

“들어오기 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다른 이들은 몰라도 소명 무리는 함부로 건들면 안 됩니다! 왕년에 광마(狂魔)라고 불렸던 소명에 만화부인과 청평도인까지 있으니 승산이 그리 크지 않아요.”

마지막 노인이 눈을 번뜩였다.

“소명 무리가 따라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다른 목표가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지요. 오직 혈옥에만 집중하면 될 테니까요.”

오 노인의 말을 마치고 다른 이들이 대답을 하려는데 그들이 타고 있던 영충과 영수가 전방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이에 세 노인도 놀라 급히 보물들을 불러내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전당의 핏빛 기둥에서 흘러내리던 핏물이 점점 진득해지고 색깔도 검붉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스스슷.

어두컴컴하던 허공에 녹색 빛들이 나타났다. 뼈로 이루어진 손가락 크기의 나비들이었다. 도깨비불처럼 녹색 불빛을 반짝이는 해골 나비 떼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타, 탄골접(呑骨蝶)! 어서 피해야 합니다!”

오 노인이 해골 나비를 보고 기겁해 소리쳤고, 다른 두 노인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그들은 타고 있는 영충과 영수들을 움직여 뒤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탄골접 떼가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뒤쫓았다.

크키키킥! 키케케!

괴상한 웃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고, 핏빛 기둥들 표면에서 검붉은 핏물이 뭉쳐 해골머리들이 떠올랐다.

커다란 해골머리들이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세 노인의 앞길을 막아섰다.

“저건 혈령(血靈)입니다. 이곳에서 죽어나간 강자들의 정혈이 변한 혈령이요! 오 형, 어서 구령대법(驅靈大法)을 펼치세요! 우리가 호법을 서서 잠시 탄골접과 혈령들을 막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이 고생을 좀 해주시죠.”

여 노인의 말에 오 노인이 과감히 거대 지네를 멈춰 세우고 가부좌를 틀었다. 동시에 노인의 몸에서 암녹색 옥패가 빠져나와 진법으로 변한 다음 그를 받쳐 들었다.

노인의 얼굴에 녹색 문신이 나타나 불가사의한 속도로 퍼져나갔다.

녹색 문신은 그의 전신을 뒤덮고도 꿈틀거려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녹색 곤충들이 움직이는 듯했다.

이때 다른 두 노인이 혈홍색 징과 하얀 호리병박을 꺼내 들었다.

쨍!

먼저 징을 치자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꼿꼿이 서서 날개 달린 백사(白蛇)로 변해 탄골접들을 향해 쇄도했고, 뒤집힌 호리병박에선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입이 달린 검은 손으로 응결되어 또 다른 방향의 핏빛 해골들을 노렸다.

검은 입들이 괴상한 소리를 냈고 해괴하기 짝이 없는 네 무리의 생물들이 맞붙어 서로 물어뜯고 할퀴어댔다.

검은 손과 백사도 굉장히 사나웠지만 핏빛 해골과 백골 나비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검은 손들이나 녹색 화염을 분출하는 백사들이 분분히 다치거나 죽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검은 손들과 백사들은 절반 넘게 나가떨어졌는데 혈령과 탄골접들은 고작 수십 마리만 소멸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노인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혈령과 탄골접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날아들 기세라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때 두 노인이 시선을 교환했다.

팟!

그중 하나가 기합을 넣어 불러낸 문어를 닮은 괴수 허상을 흡수해 하나가 된 노인의 몸에서 열댓 개의 촉수가 자라났다.

암녹색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진 거대 촉수들은 혈령들을 마구잡이로 쳐냈다.

서걱!

연이어 나머지 노인이 손톱으로 어깨를 긋자 팔 한쪽이 떨어져 내리면서 폭발해 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노인은 장포 앞자락을 거칠게 뜯어내 흉측한 거대 곤충 문신들이 새겨진 가슴을 드러냈다.

무슨 비술을 펼친 것인지 문신들이 빛을 머금고 튀어나와 커다란 괴충들로 변해 살점들을 깨끗이 먹어 치웠다.

괴충들은 몸을 바르르 떨며 몸에서 은색 가시가 자라나고 껍질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금강체(金剛體)를 이룬 괴충들이 그대로 탄골접들에게 달려들었다.

두 노인이 강력한 신통을 발휘한 덕에 혈령과 탄골접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그동안 오 노인의 몸에서 암녹색 문신들이 뭉쳐져 팔이 8개 달린 마물 도안이 완성되었다.

크아악!

괴성을 내지른 노인의 몸에서 녹색 실들이 뻗어나가 그를 고치처럼 돌돌 말았다.

거대 고치 안에서 귀곡성이 커지더니 노인을 받치고 있던 진법이 울어대며 암녹색 마기를 꿀렁꿀렁 쏟아냈다.

펑!

드디어 고치가 폭발하고 그 안에서 팔비(八臂)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푸르스름한 마물은 천천히 눈을 뜨며 음산하게 녹색 눈을 번득였다.

그러나 혈령과 탄골접의 공격을 막느라 한 노인의 촉수들은 절반 가까이 핏물로 녹아내렸고 괴충도 거의 다 탄골접에게 뜯어 먹히고 말았다.

두 노인은 팔비 마물의 등장에 희색을 드러내고 비술과 괴충을 거두어 마물 옆으로 물러섰다.

혈령과 탄골접이 멈추지 않고 흉흉한 기세로 날아들자 푸른 마물이 행동에 나섰다. 여덟 개의 손바닥에서 금빛과 함께 금전문이 하나씩 떠올라 불경소리를 내었다.

파아아앗!

금전문 여덟 개가 일곱 빛깔의 기운을 발사해 무시무시한 혈령들과 탄골접들을 재로 만들었다.

일곱 빛깔 기운이 함유한 괴이한 힘에 반항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혈령들과 탄골접들이 소탕되었다.

그러나 팔비 마물도 일곱 빛깔 기운을 거두고는 피부가 터져나가 그 안에 들어있던 오 노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얼굴에 핏기라고는 없었는데 원기를 크게 상한 듯했다.

“우리 셋이 함께 있었으니 망정이지 한 명이라도 부족했으면 큰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여 노인이 다행이라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혈옥으로 향하는 길목의 금제가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혈령과 탄골접 떼라니, 홀로 찾아왔다면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오 노인도 매우 조심스럽게 답했다.

“하하, 금제가 강력하다는 것이야말로 혈옥이 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나쁘게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노인이 웃으며 동료들을 다독였다.

“그러기만을 바랍니다. 갑시다! 어서 천무대인의 의발을 찾아야지요.”

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도삼성들이 둔광을 일으켜 돌아 나왔던 길로 다시 향했다.

* * *

며칠이 흘러 빙설로 뒤덮인 천지(天地).

삼두육비 금색 거원이 금빛 칼날을 휘둘러 남색 얼음 교룡 두 마리와 싸우고 있었다.

거원보다 다섯 배는 큰 빙교들은 폭설을 일으키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한기를 퍼트렸다.

거원은 폭설과 한기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두 빙교의 거대한 입과 발톱은 조심하는 눈치였다.

서걱!

그러나 거원은 기합을 넣고는 여섯 개의 칼날을 하나로 합쳐 두 마리 빙교들을 가차 없이 두 동강 냈다.

크아앙!

네 조각난 빙교들은 얼음 바닥을 구르다 다시 네 마리의 빙교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원은 거대한 장검을 휘둘러 주변을 금빛 검기로 물들이며 네 마리 빙교들을 수십 조각으로 절단했다.

그러나 수십 개의 조각으로 갈라진 빙교 잔해가 이번에도 각각 작은 빙교로 변했다.

이에 한립은 잔해가 빙교로 채 변하기 전에 수백수천 조각으로 다시 조각냈고 빙교들은 끝내 남색 알갱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야 거원이 금빛을 거둬들이고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거의 대승기급의 얼음 속성 생령들을 계속 만들어 내는 금제라 성가시군. 그래도 출구가 머지않았을 테지.”

한립은 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곧장 몸을 날려 날아갔다. 진법에 정통하고 의식이 강대해 금제를 손바닥 보듯 파악한 덕이었다.

다른 수사들이었다면 눈보라에 갇혀 한참 동안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맸을 것이다.

반 시진이 지나 또 다른 얼음 괴수 몇 마리를 처치한 한립은 금색 보호막을 두르고 있는 돌 제단 앞에 도착했다. 제단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진법은 전송진이었다.

한립은 미소 지으며 의식으로 금색 보호막을 훑다가 표정이 굳었다.

“여기서 뜬금없이 오행강광조(五行罡光罩)라고? 웬만한 방법으로는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꽤 걸리겠어. 하아, 원기를 좀 상하더라도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리고 한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곧 암녹색 검이 나타나 그의 손에 들렸다.

검에 의해 주변 천지원기가 바르르 떨렸는데 그 검은 바로 현천참령검이었다.

팟!

한립은 현천참령검을 단단히 쥐고 등 뒤로 삼두육비 범성법상을 불러냈다.

“베어라.”

장검의 칼날이 가볍게 금색 보호막 쪽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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