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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77화 (1,134/2,000)

1377화. 우연

*

열흘 후, 만월산맥 거대 문 인근.

수천 명의 고계 수사들이 거대 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웅성거렸다.

분지 가장자리에는 오륙백 명의 수사들이 남아 있었는데 복색이 똑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세력에 속한 이들 같았다.

그들은 초대형 진법을 배치해 분지 전체를 그 영향권 안에 두려고 하고 있었다. 수사들의 소매에 새겨진 부호는 혈골문 고계 제자라는 표식이었다.

그들과 동떨어진 곳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었다.

그들은 하얀 깃털 옷을 입은 매부리코 노인과 몸집이 굉장히 작고 얼굴에 검은 문양이 새겨진 부인이었다.

노인과 부인은 혈골문 제자들의 작업을 감독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소 노괴가 혈학성에 버티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했습니다. 천정궁 열쇠를 얻었으면서 입을 닫다니! 만화부인의 제자들이 입을 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뻔했습니다.”

매부리코 노인이 성을 내며 씩씩거렸다.

“하하, 소 뇌괴를 탓할 일은 아니지요. 같은 문파에 속해 있어도 평소 왕래가 거의 없던 사이가 아닙니까. 수사나 제가 천정궁 열쇠를 얻었다면 주변에 알렸을까요? 보물이 아무리 많아도 혼자 독차지하는 것이 나눠 갖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까.”

추한 얼굴 부인의 목소리가 마치 소녀가 종알거리는 것처럼 맑았다. 그들도 혈골문의 대승기 태상장로였던 것이다.

“흠, 뭐 그야 그렇습니다. 천정궁에 천정진인이 남긴 의발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홀로 독차지 하고 싶겠지요. 그래도 천정궁의 진짜 열쇠가 하나도 아니고 우리가 끼어들지 않아도 다른 대승기 수사들이 개입해 방해할 겁니다.”

“이제와 그런 소리를 한들 소용없습니다. 소식을 듣고 바로 왔지만 열쇠를 지닌 자들보다 한참 늦었지요. 기왕 이렇게 된 것 진법이나 세심하게 쳐놓고 천정궁에서 나오는 이들과 차나 한잔 나누지요.”

“이전 경험에 미루어 보아 허천정에서 나올 때는 그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 이 주변으로 나오는 이들은 2, 3할뿐일 겁니다.”

“2, 3할이니까 딱 좋지요. 전부 몰려나오면 아무리 진법을 공들여 쳐놓아도 우리가 막을 수 없을 것이 아닙니까. 들어간 이들 대부분이 실력이 만만치 않으니 솔직히 이 금제와 진법도 위협용이지 진짜 쓰일 일은 없을 겁니다.”

부인이 다 계획이 있다는 듯 자신 있게 답했다.

“그런 생각이셨습니까? 제자들을 왜 이리 많이 대동했나 했더니만 묘책을 세워오셨습니다.”

매부리코 노인은 손뼉 치며 기뻐했다.

* * *

쿠콰쾅!

수정 벽이 한립이 변한 거원의 주먹에 박살이 났다. 거원은 수정 벽이 가리고 있던 전송진에 올라 곧 흐릿하게 사라졌다.

파앗!

다음 순간 눈앞이 밝아진 거원은 높다란 산봉우리 위에 떠있었고 발아래 빛의 진법이 펑 하고 흩어져 사라졌다.

산은 높이만큼 면적도 넓어서 빛의 장막으로 분리된 8개의 구역을 품고 있었다.

그 중 하나에서 그가 막 금제를 깨고 벗어난 참이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나머지 지역 중 하나를 골라 날아가려는데 돌연 허공에 파동이 일고 또 다른 빛의 진법이 나타나 세 사람이 전송되어 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발밑의 빛의 진법이 터질 무렵 노인들도 한립이 변한 거원을 발견하고 서로 전음을 주고받은 다음 그쪽으로 날아들었다.

노인들은 적의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에 눈빛이 서늘해진 거원은 곧바로 털이 북슬북슬한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무형의 힘이 광풍과 함께 날아갔다.

“우리 셋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것입니까!”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 광풍을 피한 노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어차피 싸울 거면 선공이 유리한 걸 모르십니까?”

거원이 대답하며 두 손을 들어 올리자 커다란 손바닥 위로 푸른색과 검은색 산봉우리가 떠올랐다.

거원이 산봉우리를 힘껏 투척하자 두 개의 빛구슬로 변해 노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거원 머리 위에서 세 번째 산봉우리가 나타나 나머지 노인을 향해 무형의 검기를 쏘아 보냈다.

마른 노인들은 얼굴을 굳혔다. 두 노인은 기합을 넣으며 각자 등 뒤로 지네와 전갈 허상을 불러내고 두 팔을 뻗었다.

이에 한 노인의 손은 남색 비늘과 뇌전으로 뒤덮였고, 또 다른 노인의 손은 까맣게 반짝이며 손톱이 길게 자라나 피비린내를 풍겼다.

세 번째 노인은 무형의 검기가 밀려드는 것을 보고 여우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조각상을 꺼내 던졌다.

우웅!

조각상이 맑은 소리를 내며 꼬리가 5개 달린 붉은 여우 꼭두각시로 변했다. 여우 꼬리가 살랑살랑 날아올라 적홍색 보호막이 되었다.

이때 네 손바닥이 극산이 변한 두 빛구슬과 닿았다.

콰콰쾅! 쿠콰쾅!

극심한 진동이 발생하며 두 빛구슬은 놀랍게도 순간적으로 멈춰 원형으로 돌아와야 했다. 두 손을 뻗은 노인들도 놀란 표정으로 튕겨 나갔다.

“윽!”

노인들은 몸을 겨우 가눴고 피부가 다 터져나가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가락 다 부러져 이상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때 무형의 검기들은 세 번째 노인을 둘러싼 붉은 보호막에 도달했다.

콰콰쾅!

보호막이 정신없이 번쩍이며 갈라지자 흠칫 놀란 세 번째 노인은 조각상에 정혈을 뿜고 법결을 던져 넣었다.

이에 여우 꼭두각시가 금빛을 발산했고 다섯 꼬리로 이루어진 보호막도 금색으로 물들어 갈라진 틈을 신속하게 메웠다.

기세등등하던 세 노인도 거원과 맞붙자마자 밀리기 시작하자 머뭇거리며 멈췄다. 그러나 노인들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계속 싸워보기로 합의를 보았는지 또 슬금슬금 한립이 변한 거원 근처로 이동했다.

아무리 그래도 세 명인데 동급 수사 한 명을 상대 못하겠냐는 생각에서였다.

크아아앙!

한립은 속으로 냉소하며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고 길게 포효했다. 그러자 등 뒤로 범성법상이 번득 떠올라 그대로 거원의 몸으로 뛰어들어 하나가 되었다.

자금색 빛을 방출한 거원의 어깨에서 두 개의 머리가 더 자라고 어깨 아래로 네 개의 팔이 나타났다.

경칩결과 범성진마공을 동시에 펼쳐 열반성체 삼열변신을 이룬 것이다. 동급 수사 세 명을 대충 상대할 순 없었다.

파앗!

그들이 대대적으로 전투를 벌이려는데 허공에 파동이 일고 빛의 진법이 나타나 세 명의 수사들이 전송되어 왔다.

‘또?’

세 노인과 삼두육비 형상의 거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전송되자마자 세 노인과 흉악하게 생긴 거원을 마주친 수사들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소 형, 이런 우연이 다 있습니다! 따로따로 움직였는데 결국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거원이 광소를 터트리고 금빛 속에서 몸집을 줄여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아, 저도 이곳에서 한 수사를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소명이 한립의 얼굴을 알아보고 억지로 미소를 머금었다. 만화부인과 청평도인도 속으로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그들의 등장에 마른 노인들도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음산한 눈길로 새로 등장한 수사 셋을 주시했다. 소명이 그들을 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세 분은 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 혹시 서북 흑언삼림(黑焉森林)에 은거해 계시던 수사분들 아니십니까?”

“한눈에 우리의 내력을 파악하시고 견문도 넓으십니다. 맞습니다, 우리 무령삼성(巫靈三聖)은 흑언에 은거 중이었습니다.”

붉은 여우 괴뢰를 부리던 노인이 달갑지 않은 어투로 답했다.

“무령삼성……. 무도신통을 익히시는 분들 같은데 어쩌다 한 형과 이곳에서 싸우고 계셨는지요?”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영기의 파동만 봐도 그냥 대치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지보물이 강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천정궁에 들어와 있는 자라면 누구든 우리의 적입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러면 저희 셋도 적이라 이 말이군요. 한 형,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적의가 담긴 대답에 소명도 자연히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마음대로 하라 하시지요! 싸우고 싶다면 싸워드려야지요!”

한립이 웃음을 터트렸다. 소명도 그 태연한 모습에 경계심이 들었는데 무령삼성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진 것은 당연했다.

소명은 골치가 아팠다.

원래 계획대로면 벌써 천정궁 중심부에 도착해 금제 중추를 장악했어야 했다. 그런데 두 번째 구역에서 예상을 초월하는 현묘한 금제에 갇혀 이제야 빠져나온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립과 무령삼성이 싸우게 두고 어부지리(漁父之利)로 가장 먼저 중심부에 이르고 싶었지만 상대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이 그냥 지나가게 둘 리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같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더더욱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천정궁에 들어온 대승기 수사가 한둘이 아닌데 시간을 끌다 일을 망칠 수 있었다.

“자자, 네 분 다 진정하시지요. 우리가 보물을 찾으러 왔지 싸우러 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보물도 찾지 않고 괜히 힘을 빼는 것보다 서둘러서 남은 구역을 수색해 보물을 얻는 것이 상책입니다. 가면 갈수록 금제를 파훼하기 어려울 텐데 남은 시일 동안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소명이 머리를 굴려 중재를 시도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으면 일부러 성가신 일을 찾아 만드는 성미는 아니라서요.”

한립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소 형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우리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갑시다!”

붉은 여우 괴뢰를 부리던 노인은 여전히 눈빛이 사나웠지만 보물을 위해 물러났다. 세 노인은 서로 전음을 나누고 가보지 않은 구역 중 하나로 날아갔다.

소명은 그들이 선택한 구역을 보고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가 아무렇지 않게 한립을 돌아보았다.

“한 형께서 골라 두신 곳이 없으면 저희가 먼저…….”

“골라 무엇 합니까. 아무 데나 가면 그만이지요. 저는 저곳으로 하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손을 뻗은 한립은 중간에 동공을 수축하고 살짝 방향을 틀어 원래 고르려던 구역 옆을 가리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푸른 빛줄기가 되어 빛의 장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안에서 밝은 빛과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잇! 어쩝니까! 풍원대륙 놈이 우리가 가려던 곳으로 갔습니다! 설마 천정궁 중추의 위치를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천정사조의 모든 의발은 저희 일족이 계승했습니다. 저 말고 이 세상에 중추의 위치와 통제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단 말입니다.”

만화부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청평도인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

“그럼 우연이라는 소린데, 조금 전 행동으로 보아 일부러 저곳을 택한 것 같았습니다.”

소명은 한립의 행동을 되새기며 얼굴을 굳혔다.

“이제 우린 어쩌면 좋습니까. 다른 곳으로 가야하는 겁니까?”

만화부인이 이를 갈며 물었다.

“절대 안 됩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중추에 도달할 수 없어요. 한 수사 뒤를 밟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단,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분궁의 보물을 찾는 동안 우린 한발 앞서 중추 구역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소명은 생각 끝에 대책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령삼성이 택한 곳은 천정진인이 강적들을 가둬둔 혈옥(血獄)이 있는 곳입니다.”

청평도인이 고개를 끄덕이다 근심을 드러냈다.

“저도 보았습니다. 허나 그들까지 어찌할 여력이 없으니 문제지요. 혈옥 안에 강자들이 남긴 보물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최대한 빨리 중추를 통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빈도의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서적들에 의하면 혈옥에는 당시 거의 천정진인에 맞먹는 상고 강자들이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가 쓰던 의발과 지니고 있던 보물이 남아 있을 게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혈옥을 두 번째 목표로 삼고 왔지요. 무령삼성들이 뭔가 알고 일부러 혈옥이 있는 구역으로 향한 걸까요?”

만화 부인이 듣고 있다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흠, 모르겠습니다. 제가 천정진인의 전승을 이어받은 것처럼 혈옥에 갇힌 다른 강자가 후대에 무슨 실마리를 남겨 놓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청평도인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혈옥을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딴생각 마시고 어서 들어가시죠!”

소명이 한립이 들어간 구역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진동에 일행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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