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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76화 (1,133/2,000)

1376화. 혈망사(血芒蛇)

*

한립이 이곳에 들어온 지도 3일이나 지나갔다. 그는 천청궁 모처의 기다란 회랑에서 금색과 은색의 금강괴뢰 두 마리와 마주 서있었다.

웬만한 장정 대여섯 배는 되는 체구에 각자 몸 색깔과 같은 거대 망치를 든 꼭두각시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전투를 해왔는지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한립이 담담히 꼭두각시 뒤쪽의 주홍색 나무문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쿵! 쿵!

그가 가까워지자 금색 꼭두각시와 은색 꼭두각시가 망치로 내리쳤다.

푸른빛이 번득이고 한립의 몸에서 푸른 실들이 빠져나가 망치들은 물론 두 꼭두각시까지 잘라내 금속 조각들로 만들어 버렸다.

대수롭지 않게 회랑을 지나 주홍색 문을 열자 네모난 사각 제단이 있는 대청이 나왔다. 제단 위에는 천여 점이 넘는 각종 법기가 놓여 있었다.

* * *

망망대해 위.

만화부인과 청평도인이 난색을 표하며 허공에 떠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은 허공에 소명이 눈을 감고 앉아 진법원반을 쥐고 어떤 술법을 펼치고 있었다.

“두 번째 분궁에서 이렇게 강력한 환술에 걸려들지는 몰랐습니다! 이곳에 갇힌 지 이틀째라고요.”

“빈도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소 형도 진법을 파훼하는데 이리 시간이 걸리고요. 허나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야 지름길을 택해 두 번째 분궁이라도 이미 천정궁 깊은 곳에 위치해 있을 테니까요. 아마 중심부가 멀지 않을 겁니다.”

만화부인의 불평에 청평도인이 진중하게 답했다.

* * *

7일 후.

혈혼이 어느 전당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보니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휘익!

이때 불쑥 적홍색 빛의 뇌전이 날아들어 금색 뇌전 문양이 수놓아진 붉은 장포를 입은 키 큰 노인으로 변했다. 깜짝 놀란 혈혼은 묻지도 않고 소매를 털었다.

푸른 빛덩이 두 개가 소매를 빠져나와 갑옷을 입은 꼭두각시 두 마리로 변했다. 푸른 갑옷을 입은 꼭두각시는 커다란 궁을 들고 있었고 검은 갑옷을 입은 꼭두각시는 남색 창을 쥐고 있었다.

“호오, 합체기 괴뢰는 드문데? 넌 이름이 뭐냐? 누가 데리고 들어온 것이지?”

키 큰 노인이 신기하게 꼭두각시들을 쳐다보다 물었다.

“후배는 혈혼이라 합니다. 한 선배님을 따라 왔고요. 선배님께서는…….”

한눈에 상대가 대승기 노조라는 것을 알아본 혈혼은 긴장감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한 씨 성을 지닌 대승기 수사는 못 들어봤는데? 최근 대승기에 이른 건가. 에이, 상관없고 열쇠나 이 안에서 찾은 보물이 있으면 다 내놓아라. 거짓말로 노부를 속이려 들면 추혼술을 쓸 것이야!”

키 큰 노인은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협박했다.

“이곳에서 찾은 것도 없고 열쇠는 당연히 저와 함께 오신 한 선배님이 지니고 계십니다. 선배님의 신분에 이렇게 후배를 대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요.”

뻔뻔스런 요구에 혈혼은 화가 났지만 예의상 미소를 유지했다.

“안 준다고 내가 못 가져갈 줄 아느냐?”

음산하게 웃음을 흘린 노인이 바로 한 걸음 다가섰다.

신형이 흐릿해진 순간, 노인은 먼 거리를 뛰어넘어 혈혼 코앞에 서있었다.

“……!”

그녀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자 합체급 괴뢰들이 궁으로 노란빛들을 날리고 긴 창을 내질러 창끝에서 남색 거대 꽃으로 피워냈다.

쏴아아.

거대한 꽃은 기이한 한기를 발산해 노인 주변 공기를 싸늘하게 얼렸고, 노란빛들은 사방팔방에서 노인을 향해 쇄도했다.

두 꼭두각시의 협공은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키 큰 노인의 몸에서 붉은 뇌전이 뿜어져 나와 주변의 한기는 물론 금빛도 전부 튕겨냈다.

키 큰 노인이 손을 뻗었다.

펑!

남색 거대 꽃이 터지고 장창으로 돌아가 창끝이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청갑(靑甲) 꼭두각시가 두 손으로 장창을 잡아 버티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흑갑(黑甲) 꼭두각시가 궁에 기운을 불어넣었고 금빛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노인을 노렸다.

키 큰 노인은 허허 웃음을 터트리며 입에서 적홍색 뇌화(雷火)를 훅! 불어냈다.

콰릉!

뇌화는 금색 빛줄기를 집어삼키고 궁을 든 흑갑 꼭두각시까지 태워 재로 만들었다.

퍽!

창을 쥐고 놓지 않던 청갑 괴뢰는 노인의 일장에 압축되어 고철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걸림돌이 사라진 키 큰 노인이 혈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들었으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었을 것 아니냐.”

“이곳에 들어오신 것을 보면 선배님도 천정궁 열쇠가 있으실 텐데 왜 이러십니까!”

“천정궁 중 특수한 지역은 열쇠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단 걸 모를 줄 아느냐! 난 가짜 열쇠를 들고 들어왔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이들이 갖고 온 진짜를 찾아야겠지?”

혈혼이 굴하지 않고 버티자 노인이 다섯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러자 혈혼은 마치 사방에 벽이 생긴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여인의 위쪽에서 파동이 일고 무언가가 전광석화처럼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방심하던 차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대승기 노조인 노인도 흠칫 놀라 피하기 바빴다.

퍽!

조금 늦었는지 노인이 뻗었던 팔뚝이 반짝거리는 빛에 휘감겨 여덟 조각으로 갈라졌다. 키 큰 노인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혈혼 위쪽을 놀려보았다.

“누구기에 노부를 기습한 것입니까?”

말을 하는 와중에도 노인의 잘려나간 팔뚝에서 핏빛 안개가 흘러나와 꿈틀꿈틀 새로운 팔을 만들어냈다.

잘린 팔이나 다리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은 혈도공법을 위주로 하는 혈천대륙 수사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노인이 공격당해 주변의 압박이 사라지자 혈혼은 안정을 되찾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에 키 큰 노인은 악독하게 혈혼을 쏘아보고 멀쩡한 팔을 들었다.

콰릉!

붉은빛이 쏘아져나가다 중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혈혼 앞에서 붉은빛이 나타나 날카로운 칼로 변해 그녀의 가슴을 노렸다. 너무 빠른 속도라 혈혼의 수행으로는 방어용 보물을 꺼내거나 달아날 수가 없었다.

혈혼이 하얗게 질려 있을 때, 팔뚝 크기의 금색 소인이 번득 나타나서 한 손으로 붉은 칼날을 쳐냈다. 서금충왕 금동이었다.

그 모습에 키 큰 노인이 동공을 수축했다.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계집과는 무슨 사입니까?”

노인이 질문을 하든 말든 금색 소인은 덤덤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작은 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금색 수정 실들이 떠올라 그물을 이루고 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지금 싸우자 이겁니까? 어디 그만한 실력이 되나 봅시다!”

상대의 안하무인 태도에 대노한 키 큰 노인이 수결을 맺어 몸에서 무수히 많은 붉은 뇌전을 일으키고 입에서는 은색 고대 거울을 뿜어냈다.

고대 거울에서 은색 고대문자들이 쏟아져 나와 뇌전구슬로 변했다.

“가라!”

노인의 고함에 붉은 뇌전과 은색 뇌전구슬이 섞여 거대한 구름을 이루고 기세등등하게 나아갔다. 금색 소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금색 수정실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뇌전 구름을 꿰뚫었다.

피피피핏!

보일 듯 말 듯 얇은 수정 실들이 순식간에 뇌전 구름을 구멍투성이로 만들었다. 영력이 유실된 뇌전 구름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키 큰 노인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지닌 최강의 필살기는 아니지만 자주 쓰는 강력한 신통이 무력하게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은색 고대 거울은 현천잔보였고 붉은 뇌전은 수많은 혈천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신통이었다. 노인이 경악하고 있을 때 금색 소인이 열손가락을 튕겼다.

휘휘휘휙!

빼곡한 무형의 검기가 노인의 전신을 노렸다. 이에 노인이 안색이 급변해 소매 속에서 나무 그릇을 꺼내 던졌다.

그러자 나무 그릇이 회전하며 푸른 보호막으로 변해 그를 보호했다. 동시에 노인이 수결을 맺자 등 뒤로 적홍색 거대 뱀 허상이 떠올랐다.

뱀은 사납게 입을 벌려 적홍색 뇌전으로 주변을 파괴했다.

서걱! 서걱!

그런데 무형의 검기에 닿은 뇌전들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잘려나갔다. 푸른 보호막은 그래도 뭔가 현묘한 힘을 품고 있는지 검기를 막아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가슴이 서늘해진 노인이 다급히 저물탁에서 구불구불한 핏빛 괴검을 불러냈다. 괴검을 쥔 노인은 정혈을 뱉어 흡수시켰다.

우웅!

괴검은 진동하며 놀랍게도 살아 움직이는 뱀의 모습을 갖추었다.

“크크큭, 가라!”

키 큰 노인의 웃음소리와 함께 뱀은 허공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금색 소인 옆에 핏빛 안개가 꿀렁꿀렁 모여들었다.

소인의 두 눈에서 수정빛이 번득 날아가 핏빛 안개를 갈랐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그냥 스쳐지나갔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눈앞에서 핏빛 안개가 뱀으로 변해 금색 소인의 어깨를 깨물었다. 멀리서 노인이 고개를 쳐들고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넌 죽은 목숨이다! 혈천 10대 독충인 혈망사(血芒蛇)에 물렸으니 금광불괴의 몸을 지녔더라도 끝장이다!”

“10대 독충? 맛은 어떠하지?”

금색 소인이 고개를 갸우뚱해하며 어깨를 물고 있는 뱀을 보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온몸에 소름 돋게 했다.

“뭐, 뭐하는!”

노인이 소인의 말에 의아해하다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금색 소인이 혈망사의 목을 틀어쥐어 어깨에서 떼어내더니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머리를 물어뜯었던 것이다.

금색 소인의 입은 얼굴 아래 갑자기 찢겨 나간 허공과 같았다. 그 균열 속에 날카로운 이발이 가득했으니 입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혈망사의 몸통이 마구 발버둥 치다 독이 가득한 검은 피를 쏟아냈다. 금색 소인의 몸에 반짝이는 빛이 흘러 피를 밀어내고 있었다.

키 큰 노인은 놀라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책을 강구하기도 전에 금색 소인이 먼저 서늘하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노인 앞에 수정 검기 두 자루가 날아들었다. 평범해 보이는 검기들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접근해 보호막을 베었다.

쾅!

푸른 보호막은 부들부들 떨다가 산산이 부서졌다.

노인은 상대를 얕봤던 마음을 접고 더는 힘을 아끼지 않고 황급히 미간에서 오색 기운을 일으켜 방패를 응결했다.

금방 거대하게 변한 방패에는 정교한 문양과 주술문자가 가득했다.

챙!

첫 번째 검빛이 거대 방패와 충돌해 눈부신 빛을 터트렸다. 공간 파동이 퍼져나가고 굉음이 울렸다. 검빛이 먼저 흩어지긴 했어도 방패에 굵게 자국이 남았다.

챙!

두 번째 검빛이 바로 그 자리를 똑같이 공격했다. 이미 틈이 벌어진 방패가 더 이상 공격을 버틸 리 없었다.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키 큰 노인은 오색 방패를 방출하자마자 연달아 두 번의 충돌음을 듣고 정신을 잃었다. 수정 검기가 노인을 스쳐 지나가자 목이 데구루루 굴러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노인 등 뒤의 거대 뱀 허상이 폭발해 뇌전을 마구 잡이로 방출했고, 소란스런 틈을 타 적홍색 빛구슬이 노인의 몸을 탈출해 뇌전 중 하나로 스며들어 날아갔다.

팟!

금색 소인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적홍색 빛구슬 앞을 막아섰다. 빛구슬 안에는 소인과 비슷한 크기의 원영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원영이 이를 악물고 수결을 맺으며 핏빛 기운과 적홍색 뇌전을 일으켰다. 뭔가 대단한 비술을 쓰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 전에 뒤쪽에서 굵은 수정 검기가 날아들어 적홍색 빛구슬을 사정없이 갈랐다.

쾅!

구슬과 원영이 동시에 잘려 소멸되었다. 명성이 자자하던 적뢰노조는 서금충왕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혈혼이 그제야 안심하며 서금충왕이 변한 소인에게 다가가 예를 올렸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덕분에 겨우 살았습니다.”

“주인님의 명대로 한 것뿐일세. 내가 숨어서 지켜볼 테니 하던 일을 계속 하게.”

금색 소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하고 키 큰 노인의 잔해에서 저물탁을 챙겨 사라졌다. 지금의 서금충왕은 막 화형을 했을 때보다 훨씬 지능이 높아져 있었다.

혈혼은 금동이 사라진 허공에 대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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