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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74화 (1,131/2,000)
  • 1374화. 두 솥

    *

    여섯 무리들은 누가 경고할 새도 없이 분지 바깥으로 벗어나 신중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콰르릉!

    오색 빛의 장막 안에서 강렬한 파동과 함께 공간이 찢어졌다. 하얀 균열 사이로 정교하게 세공된 누각과 궁전 허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팟!

    느닷없이 굉음이 멎고 찬란한 빛의 장막이 균열 입구로 빨려 들어가 입구를 봉했다. 이어서 분지 위 허공에 만장에 이르는 오색 거대 문이 나타났다.

    ‘저건!’

    한립은 문을 장식한 금색과 은색 주술문자들을 보고 동공을 수축했다. 선계에서 쓰는 금전문과 은과문들이었다. 천정진인은 비승에 성공한 수사답게 두 선계 문자에 정통했던 것이다.

    “이게 천정궁 대문이란 거군요. 이걸 열고 들어가야 열쇠로 뒤쪽의 봉인을 풀고 천정궁에 들어갈 수 있군요.”

    화서선자는 신비로운 거대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이 나타났으니 다른 수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겁니다. 본 좌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지요.”

    금의 거한이 탐욕으로 눈을 번쩍였다.

    백 명에 달하는 금의 거한 문하의 수사들이 동시에 기합을 넣으며 각양각색의 법기를 꺼내들었다. 깃발도 원반도 전부 진법을 펼치는 데 쓰이는 법기들이었다.

    우웅.

    그들 머리 위로 노란빛의 진법이 떠올라 회전하자 진법 안에서 열댓 개의 하얀 빛기둥들이 연달아 분출되어 거대 문을 공격했다.

    쿠콰콰쾅!

    하얀 주술문자들이 미친 듯이 반짝였지만 거대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금의 거한이 웃음을 흘렸다.

    “문 하나 여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내 직접 실력발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만!”

    거한은 주술을 외워 수결을 맺고 빛의 진법을 가리켰다.

    우웅!

    빛의 진법의 색깔이 은색으로 바뀌고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은색 비검들이 날아올랐다.

    “가라.”

    은색 비검들이 하나로 뭉쳐 산만한 거검으로 변해 거대 문을 갈랐다.

    쿠쾅!

    거대 문이 부들부들 떨리며 금이 갔다. 그리 넓지 않았지만 사람이 드나들 만했다. 금의 거한이 희색을 드러내며 문중 수하들을 휘감아 그 안으로 사라졌다.

    이때 화서선자가 허공을 박차고 무구노조와 같이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빛줄기로 변해 균열로 뛰어들었다.

    펑!

    빛줄기는 거대 문 멀리서 무형의 힘에 튕겨 나왔다.

    쿠르릉!

    표면의 금은색 문자를 반짝인 거대 문은 스스로 틈을 메우고 있었다. 허공을 선회한 청홍색 둔광에서 화서선자와 무구노조가 나타났다.

    여인은 놀란 표정이었지만 곁의 사내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제가 경솔했네요. 힘을 아끼고자 봉 종주가 만들어 놓은 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안 되겠어요. 부군께서 열어주시죠.”

    여인의 부탁에 무구노조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었다.

    팟!

    보라색 거대 손이 나타나 거대 문을 내리치자 둔중한 폭음과 함께 문에 구멍이 뚫렸다. 얼굴이 밝아진 화서선자는 무구노조와 같이 청홍색 둔광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갔다.

    쿠르릉!

    거대 문의 구멍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메워졌다.

    “크크큭, 한 번에 한 무리밖에는 통과할 수 없나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기다리고 있을 수 없겠지요.”

    추레한 세 명의 노인 중 하나가 괴이한 웃음을 터트렸다.

    노인들은 동시에 몸을 날려 거대 문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굉음이 들리고 괴력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자 노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 형, 먼저 가시겠습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명이 갑자기 웃으며 한립에게 말을 걸었다.

    “소 수사께서 양보를 해주시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혈혼 수사, 가지.”

    한립이 담담히 대꾸하고는 혈혼을 금빛으로 휘감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흐릿하게 사라진 그들은 거대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한립은 뜻밖에도 당당하게 거대 문으로 날아갔고, 혈혼이 그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갔다.

    화륵!

    은색 화염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어 화인(火人)이 된 그는 그대로 거대문과 충돌했다. 불가사의하게도 치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 문에 사람 모양의 구멍이 생겼다.

    한립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거대 문을 통과했고 혈혼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지켜보던 나머지 수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가운데 사람 모양의 구멍은 빠르게 메워졌다. 다음으로 혈합오자들이 날아올랐다.

    분지 주변에 소명 무리만 남았을 때 만화부인이 입을 열었다.

    “소 형, 우리도 들어가시죠.”

    “조급해 마십시오, 만화 수사. 이제 정말 우리만 남았다고 여기십니까?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소명이 웃음을 지으며 허공 어딘가를 눈짓했다.

    “아직 숨어 있는 자가 있다고요?”

    만화부인과 청평도인도 그렇게 눈치가 없지 않아 그가 쳐다보는 곳을 살폈다.

    “사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이들이라고 그걸 눈치채지 못해 그냥 간 것은 아니니까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게지요. 저희도 이만 출발합시다.”

    소명이 소매 속에서 은빛을 뿜었다. 그러자 거대 은색 고리가 엄청난 기세로 거대문과 충돌했다.

    일다경이 지나 소명 무리가 쳐다보던 허공에 파동이 일고 핏빛 인영이 나타났다. 핏빛 인영은 녹색 눈으로 냉랭히 거대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때 하늘 저편에서 몇 개의 둔광이 나타났다.

    섬뜩하게 눈을 번득인 핏빛 그림자가 몸을 날리자 멀리서 참혹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 * *

    “천정진인이 직접 펼쳐둔 봉인이라 남달라 보이긴 하군!”

    한립은 오색 주술문자들로 구성된 두꺼운 빛의 장막을 보며 감탄했다.

    입구를 막은 봉인은 수백 리에 걸쳐 있었고 거대 문을 통과해 잿빛 공간에 들어선 수사들은 멀리 떨어져 각자 봉인을 풀고 안으로 들어갈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혈혼과 한립만 떠있었다.

    “듣기로 천정진인이 비승하기 1년 전에 펼쳐둔 것이라 합니다. 영계 전체를 뒤져도 이만한 봉인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대승기 수사가 백 년의 시간을 들여 원영의 불길로 천천히 녹이지 않고는 강제로 뚫고 지나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허나 천정궁은 한 달밖에는 존재하지 않고 소실되어 사라지니 천정궁 열쇠를 지녀야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혈혼이 옆에서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강력하다니 오히려 강제로 부수고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한데.”

    그 말에 한립은 더욱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콰르릉!

    혈혼이 빙긋 웃으며 답하려다 굉음과 공간 파동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눈앞의 봉인도 진동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봉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정을 되찾았지만 말이다.

    “누군가 벌써 진입했군.”

    “진짜 열쇠를 가진 자일 겁니다. 모조품으로는 이렇게 빨리 봉인을 풀 수 없으니까요.”

    “알겠네. 시간이 없으니 나도 직접 봉인을 깨보겠다는 소리는 그만두지. 어찌해야 하는지 말해보게.”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혈혼에게 방법을 물었다.

    “선배님 허천정을 꺼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한립은 곧바로 고풍스럽게 생긴 세 발 달린 푸른 솥을 불러냈다. 솥을 확인한 혈혼이 입을 벌려 또 다른 푸른 솥을 뿜었다.

    “음?”

    “이건 허황정(虛皇鼎)입니다. 가짜 열쇠 중에서는 가장 성공작이라 할 수 있어 거의 원래 위력의 7할을 낼 수 있지요.”

    “허황정? 이걸로 봉인을 쉽게 열 수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선배님께서 허천정을 이용해 봉인을 푸실 때 제가 모종의 비술을 이용해 허황정으로 보조하겠다는 것입니다. 제 본체가 직접 제련한 솥이라 정혈을 머금고 있어 다른 열쇠들은 지니지 못한 작용을 하거든요.”

    “자네가 두 솥을 이용하면 봉인을 깰 수 있다 확신하니 시도해 보세. 안 된다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지.”

    한립이 턱을 긁적이며 결정을 내렸고 혈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푸른 빛줄기를 날려 작은 솥에 흡수시켰다.

    허천정이 바람을 타고 거목 크기로 불어나 표면에 새겨진 꽃, 새, 곤충, 물고기, 짐승 등이 살아 움직이듯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혈혼도 바로 허황정을 들어 올려 입에서 정혈을 뿜었다.

    팟!

    핏물이 안개로 흩어져 작은 솥을 둘러쌌다. 주문을 외며 몸을 날린 혈혼이 핏빛 그림자가 되어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웅!

    허황정이 맑게 울며 빙글빙글 회전했다.

    핏빛을 모조리 흡수한 솥이 수없이 많은 핏빛 주술문자를 분출해 허공에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괴이하게도 혈혼과 똑같이 생긴 여인의 얼굴이 떠있었다.

    “한 선배님, 저는 딱 한 번 밖에는 힘을 보탤 수 없으니 이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여인의 얼굴이 입을 달싹이고 핏빛 실뭉치를 뿜었다.

    쉬쉬쉬쉭!

    핏빛 실들은 괴이하게도 가볍게 오색 빛의 장막을 뚫고 들어갔고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핏빛 실들은 오색 빛의 장막 안에서 커다란 문자를 만들었다.

    이에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거대해진 허천정을 한 손으로 두들겼다.

    댕!

    맑은 울림이 있고 거대 솥 표면의 꽃, 새, 곤충, 물고기, 짐승들이 날아올라 오색 빛의 장막을 덮쳤다.

    파파파팟!

    허상들은 봉인을 무시하고 핏빛 주술문자 속에 박혀 들어갔다. 주변의 오색 빛의 장막이 흔들리고 있었다.

    핏빛 주술문자 안에서 하얀 기운들이 새어나와 공간파동을 일으켰다. 한립은 봉인이 풀리려고 하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옆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허공에 뜬 여인 얼굴이 검붉은 피를 토하고 일그러지고 있었다.

    “반서의 힘! 괜찮으니 나머지는 내게 맡기고 비술을 풀게.”

    한립은 여인의 얼굴로 푸른빛을 날렸다. 여인 얼굴은 낮게 신음하고 흩어져 허황정 안으로 되돌아갔다.

    솥 안에서 핏빛 그림자가 빠져나와 한립 뒤에서 다시 혈혼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팟!

    그러나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삼두육비의 금신법상을 불러냈다. 여섯 개의 눈을 뜬 법상이 여섯 손바닥을 펼쳐 거대 솥에 가져다 댔다.

    허천정의 푸른빛이 눈을 찌르고 멀리서 보면 푸른 태양처럼 변했다.

    쩌저정!

    오색 보호막 속의 핏빛 문자도 이에 반응하듯 하얀 기운을 더욱 많이 방출해 봉인을 뚫고 새까만 통로를 만들어냈다.

    “가세!”

    얼른 법상을 거둔 한립이 거대 솥을 가리켰다. 허천정이 두 줄기 기운을 방출해 한립과 혈혼을 감싸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새까만 통로로 날아들었다.

    콰르릉!

    푸른빛이 사라진 순간 오색 주술문자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어 구멍을 채웠다. 눈앞이 확 밝아진 한립은 자신이 햇살이 따사로운 초원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한립이 푸른빛을 작은 솥으로 되돌렸고 혈혼은 기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산봉우리들이 보이고 녹음이 푸른 공간은 외부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에서 빛을 반짝이며 방대한 의식을 방출했다.

    “환술! 이렇게 고명한 환술은 보기 드문 데 대단하군.”

    허공을 가르는 그의 손에서 푸른 검기가 날아갔다. 아름답던 푸른 초원과 하늘이 왜곡되고 돌연 풍경이 뒤바뀌어 탑과 전각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궁전이 나타났다.

    건물들 중간 중간에 거대한 빛기둥이 치솟고 있어 그걸 중심으로 보호막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런 보호막으로 나뉜 구역이 백 개는 되었다.

    남색빛을 어른거린 한립은 보호막 안을 대략적으로 살필 수 있었다. 각 구역마다 주전(主殿) 하나에 그와 어우러진 십여 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속해 있었다.

    그 안을 살피려 들면 의식이 튕겨 나와 각 건물들 자체에 의식을 차단하는 금제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동급 수사를 월등히 초월하는 그가 아니라 다른 대승기 수사였다면 이마저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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