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3화.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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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저도 기억이 봉인된 상태라 허천정이 진짜 열쇠라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허천정으로 천정궁에 들어갈 수 없다면 결코 선배님께 무리해서 궁으로 들어가 달라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허천정도 그리 실망스럽지는 않으실 겁니다.”
한립의 지적에 혈혼이 민망한 듯 해명했다.
“천정진인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네. 비승 진선이 하계에 남긴 동부라, 과연 혹할 만할 곳일세! 게다가 수사에게 본체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쉽게 어기지 않겠네. 지금의 내 실력이면 열쇠가 없어도 강제로 천정궁에 들어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게.”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본체가 나오는 대로…….”
“됐네, 감사인사는 빙백 수사를 구출하고 듣지. 그보다 빙백 수사와 다른 이들이 금궐옥서의 비술을 이용해 제련한 가짜 열쇠가 하나가 아니지 않나. 산맥에 모인 강자들의 수가 적지 않을 것이야. 혈학성에서 만난 만화부인과 청평도인만 해도 이 일로 혈골문 태상장로를 찾아왔을 테고.”
“예? 혈학성의 혈골문 대승기 수사를 만나셨습니까? 당시 본체와 같이 천정궁에 침입했던 수사들 중 혈골문 강자가 있었습니다. 혈골문에 열쇠 한두 개가 남아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혈골문이 대규모로 만월산맥으로 진입하면 일이 어려워질 겁니다.”
혈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혈학성의 그 태상장로가 대대적으로 수사들을 모집하는 것 같지 않았네. 그랬다면 외부에서 대승기 수사가 찾아올 리 만무하겠지. 그는 물론이고 천정궁의 열쇠를 지닌 이들은 그 사실을 숨기려 할 것이야. 다른 이들은 그저 소문을 듣고 찾아왔을 테니 천정궁에 들어가지 못할 테고.”
한립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들이 열쇠를 지닌 수사들이 천정궁으로 들어가게 놔두지 않을 텐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주과아가 입을 열었다.
“천정궁으로 들어가기 전 분명 살육전이 펼쳐질 게다. 허나 내가 있는데 무엇이 두려운 것이냐. 오히려 천정궁 안이 더 위험할 테지. 화석과 과아는 이곳에 남아 있거라. 이번 일은 혈혼 수사와 다녀오면 된다. 지금 만월산맥에 들어와 있는 자들은 보통이 아닐 테니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한립의 명에 주과아와 화석노조가 공손히 답했다.
“혈혼 수사, 자네의 말대로면 천정궁이 곧 개방되고 때가되면 허천정이 감응해 우리를 정확한 위치로 안내할 것이라고?”
“맞습니다. 모조품이라도 빼앗으려 드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알았으니 앞으로는 휴식을 취하며 천정궁의 등장을 기다리세.”
이렇게 한립 일행은 한동안 임시 동부에 머물렀고, 나날이 만월산맥은 북적였다. 원래 수사가 그리 많지 않던 곳이라 천정궁이 곧 개방될 거란 소식이 혈학성까지 퍼졌다.
인근의 실력자들이 소문을 듣고 점점 더 몰려들었다.
혈학성이 산맥에서 가장 가까운 거대한 성이라 먼저 도착한 이들 대부분은 혈학성 수사들이었다. 혈골문 제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몰려온 수사들 중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성격이 급한 이들은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의심되는 인물들을 가차 없이 살육했다.
처음에는 아무 소득이 없었지만 누군가 수사를 죽이고 작은 솥을 가져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대적으로 피바람이 불었다.
산맥 멀리까지 소문이 퍼져 많은 혈천인들이 만월산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할 터였다.
* * *
우웅!
보름 후, 만월산맥에 위치한 이름 없는 연못에서 오색 빛과 주술문자들이 뿜어져 나왔다.
이에 동부 밀실에 앉아 있던 한립이 눈을 뜨고 요란하게 푸른빛을 뿜는 작은 솥을 방출했다.
“혈혼 수사, 출발하세.”
한립은 푸른 솥에 나타난 괴이한 주술문자를 보고는 바로 전음을 보냈고, 다른 방에 앉아 있던 혈혼이 들뜬 얼굴로 일어났다.
산봉우리에서 푸른 빛줄기가 솟아올라 만월산맥 모처로 쏘아져 나갔다. 이런 일이 산맥의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혼자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고 많게는 백 명에 이르는 수사들이 날아가기도 했지만 방향은 같았다. 이런 눈에 띄는 움직임에 산맥에서 기다리던 다른 혈천수사들도 따라붙었다.
둔술이 빠른 이들은 먼저 움직인 수사들을 따라잡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립은 혈혼의 둔술이 느린 것을 감안해 그녀를 둔광으로 휘감아 같이 이동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푸른빛이 번쩍했다 싶으면 벌써 하늘 끝이고, 눈 한번 깜빡이고 나면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수사들이 흠칫 놀라 푸른 둔광을 노리려던 생각을 버렸는데 용맹스런 기질이 있는 혈천대륙의 수사들 중에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들도 있었다.
우웅!
푸른 빛줄기가 협소한 골짜기 위에 이르렀을 때 아래쪽에서 무수히 많은 범문(梵文)들이 치솟아 현묘한 빛의 진법을 형성했다.
“수사 잠시만 저와 상의하시지요.”
빛의 진법 속에서 누가 소리쳤다. 예의 바른 어투였지만 동작은 신속해서 빙글빙글 도는 빛의 진법에 순식간에 강력한 흡인력이 발생했다.
‘감히!’
그 모습에 한립은 대꾸할 생각도 없이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협소한 골짜기 쪽으로 흡인력보다 열 배 이상 강한 괴력이 떨어져 내렸다.
쿠쿠쿵!
엄청난 괴력에 흡인력과 빛의 진법이 사라진 것은 물론 몇 리에 달하는 골짜기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수사는 피할 새도 없이 핏빛 안개로 터져나갔고 원영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고공의 푸른 빛줄기는 잠시 멈추지도 않고 그대로 하늘을 가르며 나아갔다.
잠시 후, 무너진 골짜기 인근의 작은 산.
핏빛 둔광 몇 개가 날아올라 골짜기를 살피다 허공에서 멈추었다.
여덟 명의 수사들은 남녀노소로 이뤄져 있었고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그들은 피로 물든 지면을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를 어쩝니까. 쫓아가서 아 수사를 대신해 복수해야 할까요?”
비취색 장삼을 걸친 소녀가 무심코 물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하필 대승기 노조를 노려서 공격한 아 수사의 잘못이지 누굴 탓한단 말입니까.”
머리를 산발한 사내가 단호히 반대했다.
“맞습니다. 수행이 우리와 엇비슷한 아 형을 일격으로 멸살한 수사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대승기 노조 중에서도 최상급의 존재여야 하는데 우리가 힘을 모은다고 어찌할 수 있을 리 없지요. 복수하고 싶으면 엽 선자 혼자 가서 하시지요.”
추한 용모의 노인도 얼굴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헤헤, 저도 그냥 해본 말입니다. 괜히 강자의 눈 밖에 나서 뭐하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서 천정궁이 나타난 곳으로 가서 혼란한 틈을 노려야 하지 않겠어요?”
소녀가 간사한 웃음을 흘렸다.
* * *
펑!
길을 막아선 거구의 사내가 한립의 손짓에 머리가 날아가고 원영마저 터져나갔다. 머리를 잃은 시체는 그대로 추락했다.
푸른 빛줄기는 거한 뒤쪽의 수사들도 남김없이 두 동강을 내고 앞으로 뻗어 나갔다.
* * *
한립은 개미를 눌러 죽이듯 달려드는 수사들을 가볍게 처리하고 두 시진 만에 널따란 분지 위에 도착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분지에는 관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관목들에 가려진 연못에서 오색 빛기둥이 뻗어 나와 하늘을 수놓았다.
분지 가장자리에는 놀랍게도 세 무리가 한립보다 먼저 도착해 다른 이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푸른빛이 가시고 한립과 혈혼이 나란히 나타나자 세 무리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안에 함유된 강력한 기운에 혈혼은 자기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이때 한립이 괴상한 각도에서 혈혼 앞으로 움직였다.
팟!
그녀가 느끼던 강력한 압력은 한립의 기운에 의해 흩어졌다. 한립은 우선 연못에서 솟아오른 오색 빛기둥을 둘러보고는 연이어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는 분위기가 확 달랐는데 묘하게 조화로웠다.
여인은 확연히 대승기 수행을 드러냈지만 사내는 수행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무형의 파동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식을 막는 특수한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 다른 방향에는 복색과 용모가 똑같은 청년 다섯이 서있었다. 스무 살로 보이는 청년들은 복제를 한 것처럼 생김새가 닮아 있었다.
표정마저 똑같았지만 눈길에서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섯 청년은 전부 합체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마지막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놀랍게도 그들은 백 명이 넘었다.
그들은 대부분 연허급이었지만 합체기 수사 몇 명이 끼어 현묘한 진법을 이루었고 중간에 있는 금의 거한을 둘러싸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핏빛을 번들거리는 거한은 대승기 노조였다. 한립은 거한 주변 수사들이 이룬 진법을 흥미롭게 살폈다.
세 무리의 수사들도 한립이 대승기 수사인 것을 알고 유심히 관찰했지만 아무도 뒤쪽의 혈혼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허기 여인을 봐두어 무엇하겠는가?
그들은 수상한 기운을 풍기는 낯선 얼굴의 대승기 수사를 향해 경계심을 높였다.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휘잉!
하늘 끝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였다. 다른 방향에서 두 무리가 동시에 분지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한립은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나란히 선 두 사내와 여인은 그가 아는 자들이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소명, 청년 도사 청평도인 그리고 백발 노파 만화부인이었다.
다른 쪽은 깡마른 몰골의 노인 세 명이었는데 표정은 다 달랐지만 전부 대승기 노조였다.
대승기 노조 6명이 동시에 도착한 것에 한립을 제외한 다른 세 무리의 안색이 변했다.
이때 다른 수사들을 훑던 소명이 한립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여기 계셨습니다, 한 수사. 진작 이곳으로 오실 줄 알았으면 같이 출발했을 것을요. 그런데 다른 용무로 이곳에 들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천정궁을 가리키는 것일 줄은 몰랐군요.”
“저도 소 수사께서 도모하시는 일이 저와 같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말씀드렸을 텐데요.”
한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수사의 신분에 거짓말을 하셨을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만 조금 아쉽군요. 마음이 잘 통할 것 같아 오래 친분을 유지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가면 사내는 탄식하며 정말 아쉬워하는 듯했다.
“하하, 혈골문의 광마 노조로 명성이 자자하던 분이 언제 이렇게 감상적으로 변하셨나요? 몇 년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변하셨나 봅니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수사 중 여인이 방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무구노조와 화서선자 아니십니까. 무구 형께서는 얼룡(孼龍)을 마주쳐 싸우다 중상을 입는 바람에 원기를 크게 상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제 괜찮으십니까?”
소명이 여인과 듬직해 보이는 사내를 향해 반문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군은 진작 원기를 회복하고 기연을 얻어 수행이 떨어지기는커녕 늘어났답니다.”
사내가 대답하기 전에 화선 선자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에 무구 노조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이에 소명은 잠시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봉 종주, 종문의 개파 노조가 친히 여기까지 오시면서 이렇게나 많은 문하의 수사들까지 대동하셨습니까? 이곳에서 전부 죽어나가 공들여 키운 종문이 덧없이 사라질까 걱정도 안 되시나 봅니다.”
소명은 상대에게 적의가 있는지 말투도 아주 싸늘했다.
“소 형이 왔는데 저라고 못 올 이유가 없지요. 천정진인이 뭐 혈골문 출신이라도 된답니까? 본 좌의 문파는 진법의 도를 기반으로 합니다. 천정궁에서 보물을 얻으려면 진법을 펼치기 충분한 문하 수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게다가 본 문이 덧없이 사라질지 말지는 소 형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의 거한이 코웃음 쳤다. 이에 소명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지만 더는 말을 섞지 않고 똑같은 얼굴을 가진 청년들을 보았다.
“혈합오자(血合五子)가 소 수사를 뵙습니다.”
청년들은 소명이 말을 걸기 전에 먼저 앞으로 나서 포권을 했다. 행동까지 모두 똑같았다.
“혈합 수사의 위명을 들어온 지 오래입니다. 원래 대승기 수행을 이루셨던 분이 원영을 다섯으로 나누어 동시에 다섯 분신을 대승기 경지로 끌어올릴 결심을 하시다니요. 그 굳센 의지에 탄복하였습니다.”
소명은 합체 경지의 청년들을 향해 동급 수사의 예를 차렸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리 한 것입니다. 광마의 명성은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다섯 청년들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마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소명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하려다 훽! 하고 오색 빛기둥을 쳐다보았다.
우우웅!
안 그래도 하늘과 땅을 이을 기세이던 빛기둥이 빠른 속도로 넓게 퍼져 나갔다. 눈을 찌를 정도로 강렬한 오색 빛의 장막이 분지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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