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72화 (1,129/2,000)

1372화. 천정궁(天鼎宮)

*

거대 궁전에 위치한 편전.

소명, 만화부인, 청평도인이 하얀 옥 탁자에 둘러앉아 상의를 하고 있었다.

소명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두 사람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소 노괴, 조건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천정궁에서 얻은 수확의 9할을 원한다고요? 그럼 남은 1할로 우리 둘이 나눠 갖으라 이 말입니까?”

만화부인이 분통을 터트렸다.

“두 분도 천정궁 열쇠도 있고 미리 개방될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면 이런 조건을 내걸었을 겁니다.”

가면 사내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당연히 소 형이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을 아니까 만월산맥에 들어가기 전에 찾아온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와 만화 수사에게 1할만 가져가라는 것은 너무 각박하십니다.”

청평도인의 미간도 펴질 줄 몰랐다.

“두 분은 천정궁을 무엇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도 이 열쇠를 얻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렀단 말입니다. 1할을 내주겠다는 것도 큰맘을 먹은 것이에요.”

“천정선궁 열쇠가 딱 하나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게 진짜 열쇠일지 어떻게 압니까? 지난번에 천정궁이 나타났을 때도 위조품이 나돌았다고요. 위조 열쇠로 안전히 천정궁에 들어가기는 무리라도 선궁이 나타날 대략적인 시간과 위치는 알아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짜 열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허나 감히 장담하건대 제가 지닌 것은 분명 진짜 열쇠 중 하나입니다. 하하, 그런 확신도 없이 이런 조건을 걸겠습니까?”

만화부인의 냉랭한 말투에도 소명은 유유히 미소를 지었다.

“소 형께서 그리 자신이 있으시다니 저희가 찾아온 보람은 있습니다. 하지만 당초 많은 가짜 열쇠가 나돌아서 천정선궁이 개방될 때 운 좋게 뭐라도 주워가려는 합체 연허기 수사들은 물론 우리 같은 동급 수사들도 적잖이 몰려들 겁니다.

백만 년 전 본 대륙에서 가장 많은 회수의 대천겁을 버티다 나중에는 비승까지 성공한 천정진인의 동부가 아닙니까! 안에 얼마나 많은 보물과 영약이 있을지 모르고 진인이 남겨 놓은 공법과 비결만 얻어도 대천겁을 치를 때 어떤 수단을 사용했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수많은 노괴들 사이에서 우리의 도움 없이 소명 수사 홀로 보물을 찾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열쇠를 지닌 다른 이와 합작하면 그만큼 경쟁자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청평 수사, 지금 나를 협박하기라도 해보겠다는 겁니까.”

소명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이게 무슨 협박입니까. 그냥 사실 그대로 알려드리는 겁니다. 저희가 직접 여기까지 찾아왔을 때는 그만한 성의는 표한 것 아닌지요? 소 형께 안심하고 동행할 다른 수사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풍원대륙에서 건너왔다는 한 수사가 그리 실력이 출중한데도 같이 천정궁에 가자고 청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한 수사가 너무 강해 경계심이 들어서가 아닙니까.”

청평도인은 차분하게 상대를 설득했다.

“맞습니다. 상대를 통제할 자신이 없어 천정궁에 대해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가 거래 조건을 조정해야 할 이유가 됩니까?”

소명이 주저 없이 거절하자 청평도인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청평 수사, 소 노괴가 고집을 꺾지 않으니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읍시다. 이걸 들으면 양보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갑자기 노파가 끼어들었다.

“뭘 말입니까?”

“청평 도사의 내력에 대해 아십니까?”

소명이 관심을 보이자 만화부인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청평도사의 내력…….”

“부끄럽게도 사실 제가 진정으로 전승한 것은…….”

소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청평도인이 가볍게 탄식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태연자약하던 소명이 전음을 듣고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 * *

만월산맥 깊은 골짜기 안.

새까만 거대 매 괴뢰를 탄 혈혼이 반짝이는 석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얀빛 속에서 괴이한 주술문자들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이고 있어 마치 무슨 신호를 주는 것 같았다.

“천정궁!”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혈혼은 머릿속이 밝아지며 오랜 세월 봉인되었던 기억 중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 * *

그 시각 혈학성 어느 객잔의 별채.

한립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작은 솥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양식의 푸른 솥에는 곤충, 물고기, 새, 짐승 등의 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한립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만월산맥 속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돌연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궁문이 개방되는구나. 이곳을 떠날 수 있겠어.”

* * *

만월산맥 가장자리의 작은 산골짜기.

다양한 복색을 한 백여 명의 고계 수사들이 모여 함께 거대 진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체구가 우람하고 위엄 있게 생긴 금의(錦衣) 사내가 무표정하게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독충 떼로 뒤덮인 괴상한 습지.

남색 제단 위에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솥이 있었고, 제단 옆으로 용모가 추한 세 명의 노인들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 * *

혈학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거대 성.

“우광국(宇光國), 천운국(穿雲國) 등 제운산맥(齊雲山脈) 인근 8개 국가가 멸망했단 말이냐? 대체 어떻게 된 것이야!”

녹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황의(黃衣) 사내를 향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벽영 대인, 소인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8개 국가의 군주와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1달 전에 전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생존자를 단 한 명도 찾지 못했습니다.”

황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녹포 노인은 한립과 만난 적이 있는 혁련상맹의 벽영이었다.

“제운산맥의 종문들은?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단 겐가?”

“조사해본 결과 제운산맥에 위치한 크고 작은 19개 종문도 텅 비었습니다.”

“전부 사라졌다고? 그곳 종문들이 작기는 해도 19개나 되는 종문을 소리소문없이 말살할 수는 없을 것이야.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원인을 전혀 모른다는 겐가?”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본 맹에서 이 일을 발견해 처음 조사를 나간 이들의 말로는 여러 국가가 종문 내에서 어떤 전투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잡혀갔거나 아니면 상대의 실력이 불가사의한 지경에 이르러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겠나?”

“소인이 생각할 때 두 번째 이유가 더 합당합니다.”

“어째서?”

“8개 국가의 범인들은 몰라도 종문 수사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기반을 포기하고 떠났을 리는 없습니다. 제운산맥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혈도(血道)의 기운을 포착했는데,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혈도공법 중에 혈제를 이용해 쾌속으로 수행을 올리는 수법이 있지 않습니까?

혈천대륙 역사상 이 정도 인원이 혈제를 위해 끌려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제운산맥에 남겨진 기운으로 판단하건데 대승기 수행의 혈도 강자가 일을 벌인 듯합니다. 그만한 실력이 되니 아무 기탄없이 일을 벌인 것일 테고요.”

“그래, 혈도 기운을 남긴 자가 벌인 짓일 것이야. 심각한 일이지만 본 맹은 강자결전을 준비하느라 모든 것을 그 조사에만 투입할 수 없다. 그렇다고 멸망한 국가 중 2개가 본 맹 소속이었는데 좌시할 수도 없겠지.

조사 결과를 제운산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제혈문(啼血門), 풍사족(風蛇族)에게 알리게. 인근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대승기 노조를 보유하고 있는데다 제운산맥의 적잖은 자원을 취하고 있었으니 가만있지 않을 것이야. 돌아가는 대로 나도 연우진인에게 두 세력과 같이 조사를 해달라고 하겠네.”

벽영은 빠르게 조치를 취했고 황의 사내는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었다.

* * *

제운산맥 북쪽의 광활한 호수.

비취색 물 위로 봄바람이 살랑이고, 수면 아래로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아주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호수 깊은 곳에서는 현묘한 금제들이 층층이 드리워져 있었다. 금제 아래로 핏빛 안개가 짙게 껴서 골짜기를 선홍색으로 물들였기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 핏빛 안개 아래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검붉은 피의 강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출렁이는 강물 위로 누군가 반짝이는 무언가를 들고 앉아 있었고, 피의 강에서는 진득한 물길이 솟아올라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웅-!

보름 후, 별채에서 수련 중이던 한립은 진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는 곧바로 소매 속에서 금색 부적을 불러내 살피고는 흐릿하게 변해 사라졌다.

몇 시진 후, 한립은 화석노조와 주과아를 데리고 혈학성을 떠나 만월산맥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혈학성 중심의 궁전.

“뭐라? 그 인족 대승기 수사가 성을 떠나 만월산맥으로 갔단 말이냐?”

“예! 태상장로님의 분부대로 한 선배님이 성을 나서자마자 바로 보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면 사내의 고함에 합체기 사내가 공경스럽게 대답했다.

“잘했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표정이 오락가락하던 가면 사내 소명이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이에 합체기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대전을 나섰다.

“한립이 만월산맥으로 향했다니 골치 아프게 되었습니다.”

소명 옆에서 파동이 일고 만화부인과 청평도인이 나타났다. 방금 말을 한 사람은 만화부인이었다.

그녀는 한립과 손속을 겨룬 후 그를 상당히 경계하는 눈치였다.

“우연은 아니겠지요? 우리에게는 다른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천정궁이 개방될 날도 되지 않았고요. 벌써 출발하기에는 이릅니다.”

침음하던 소명이 입을 열었다.

“그자가 만월산맥으로 갔는데 우연이라는 소리가 나오십니까? 개방일이 아직 남았는데도 산맥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청평도인은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한 수사가 천정궁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라 확신하시는군요.”

“백이면 백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도 십중팔구 천정궁 때문일 겁니다.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셈인데 대책은 있으십니까?”

소명의 말에 청평도인이 반문했다.

“대책을 짜낼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강해도 열쇠가 없으면 천정궁에 들어갈 수 없고, 다른 이에게 열쇠를 빼앗아도 천정궁 내의 금제가 삼엄합니다. 천정진인 일맥의 전승을 이어받은 수사와 진법에 조예가 깊은 제가 있는데 그자를 걱정할 이유가 없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빈도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우리가 먼저 천정궁 진법의 핵심 구역에 도착하면 그때는 강적들이 힘을 합쳐도 우리를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청평도인이 평정을 되찾고 빙긋 웃었고 만화부인도 마음이 한결 놓인 듯했다. 그런데 소명은 턱을 괴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 * *

7일 후, 만월산맥의 어느 높다란 산봉우리.

임시로 파놓은 동부 안에서 한립이 돌의자에 앉아 혈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렇게 본체는 비상상황에 대비해 천정궁에 들어가기 전 특수한 비술로 분신인 저와 허천정을 바깥에 남겨 놓은 것입니다. 일정 시각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면 분신인 제가 대부분의 기억이 봉인된 채로 깨어나도록 해놓고요!

천정궁이 두 번째로 세상에 나타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본체를 구하려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고요. 허천정은 금궐옥서에 적힌 비술로 복제한 천정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짜 열쇠입니다. 본래 열쇠보다 효력이 떨어져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본체가 천정궁 진법에서 발견한 허점을 이용…….”

혈혼은 거의 한식경 동안 당초 빙백이 겪었던 일을 차근히 이야기했다.

“혈혼 수사, 기억의 대부분을 찾았다니 축하하네. 나와 거래할 때는 기억이 봉인된 탓에 천정진인과 천정궁에 대해서는 몰랐고, 그저 허천정이 대승기 수사도 혹할 만한 초대형 비밀 창고의 열쇠일 거라고만 말했었지. 허천정이 진짜 열쇠의 모조품이라는 것은 말해주지 않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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