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1화. 비침진도(飛針陣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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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역시 법결을 날려 거대 사자 허상을 더욱 크고 또렷하게 만들었다.
쿵! 쿵! 쿵!
핏빛 안개 속에서 육중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나오려는 듯했다.
잠시 후 핏빛이 갈라지고 산만한 거대 두꺼비가 뛰쳐나왔다. 혈홍색으로 번들거리는 피부와 불룩 나온 9개의 금빛 찬란한 눈이 눈길을 끌었다.
“구목혈섬(九目血蟾)! 상고진령의 진혈을 연화했단 말인가?”
거대 두꺼비를 본 노파는 난색을 표했다.
보호막 밖의 청평도인이 구목혈섬을 보고 움찔했는데 한립만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구목혈섬의 이름은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수시로 대형 경매회에 다른 진령의 피와 함께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상고 진령의 진혈과 달리 구목혈섬 진혈을 원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구목혈섬이 맹독을 지녀 대승기 수사도 연화를 시키다 십중팔구 버티지 못하고 독의 반서를 당했고 그보다 수행이 낮은 자들은 닿기만 해도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혈골문 대승기 수사인 소명이 다른 진혈들을 놔두고 위험한 구목혈섬 진혈을 연화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만화수사, 구목혈섬 진혈을 연화한 후로 누군가에게 써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얼마나 위력적일지 저도 확인해 보고 싶군요.”
거대 두꺼비가 소명의 목소리로 말하다 쩍! 입을 벌렸다.
핑!
노파는 육중한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몸을 가눈 그녀 앞에 금색 살덩이가 길게 뻗어 나와 비취색 나무 방패를 공격하고 있었다.
구목혈섬이 혀로 노파가 방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기습공격을 한 것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나무 방패를 주변에 숨겨두지 않았으면 막지 못했을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노파가 꽤나 낭패를 보았는지 열을 받아 기합을 넣었다. 등 뒤의 거대 사자가 입을 벌려 검은 빛줄기를 방출해 두꺼비 혀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굵은 두꺼비의 혀가 잘게 진동하고 괴이하게 종적을 감추었다. 동시에 멀리 있던 구목혈섬의 본체가 방대한 육체를 날렸다.
“이런.”
저계 수사 때부터 온갖 전투를 경험해 온 만화부인은 곧바로 몸을 틀어 자리를 피하려 했다.
쿠릉!
하지만 고공에서 굉음이 들리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후였다. 사라진 구목혈섬이 나타나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팟!
핏빛 고리가 나타나 하강하기 작했고 노파는 금제의 힘에 온몸이 묵직해져 전신에서 빠드득 거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만화부인이 고개를 들어 입에서 노란 거대 인장을 뿜어내고 등 뒤의 검은 사자 허상의 발톱을 세워 하늘을 갈랐다.
쿵!
다섯 줄기의 발톱 허상은 빛의 고리를 맞고 튕겨나갔고 거대 인장은 빛의 고리가 내뿜은 무서운 위력에 통제를 잃고 허공을 떠다녔다.
핏빛 고리는 거침없이 만화부인을 향해 떨어졌다. 노파가 파랗게 질려 끙끙거리자 등 뒤의 사자가 포효하며 검은 불구슬을 뿜었다.
불구슬은 바람을 타고 부풀어 핏빛 고리와 충돌했다.
콰르릉!
불구슬이 터져 불 구름이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막대한 위력이 핏빛 고리를 덮쳤다. 고공의 구목혈섬이 피를 한 모금 토해내 핏빛 고리에 스며들게 했다.
우웅!
부들부들 떨리던 핏빛 고리가 다시 힘을 얻어 불 구름을 밀어냈다. 검은 사자가 계속 화염을 분출해 불 구름을 강화해도 핏빛 고리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만화부인은 핏빛 고리가 코앞에 이른 것을 보고 주저하던 방법을 쓰려했다. 바로 그때 핏빛 고리가 번득 사라지고 구목혈섬이 평온히 입을 열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핏빛을 일으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가면 사내가 지면에 내려섰다.
“실력이 출중하십니다. 이번은 이 늙은이가 진 것으로 치지요.”
만화부인은 표정이 썩 좋지 않았지만 불 구름과 등 뒤의 법상을 치우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구목혈섬 진신으로 예상치 못한 공격을 해서 그렇지 목숨을 걸고 싸우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한 수사 차례군요? 다른 대륙의 신통은 어떠한지 기대가 됩니다.”
소명은 몇 마디 말로 상대의 체면을 살려주고 한립을 돌아보았다. 핏빛 빛줄기가 경기장을 빠져나와 한립 옆에 이르렀다.
“만화수사, 잠시 휴식을 취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청평수사와 먼저 겨루고 있겠습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청년 도인과 같이 경기장에 오르려는데 노파가 냉랭히 호의를 거절했다.
“됐습니다! 몸이나 푼 것이지 힘을 쓰면 얼마나 썼다고요. 언제든 수사의 공격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에 청평도인은 미소를 지을 뿐 딱히 입을 다물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릿하게 신형을 날려 보호막 내에 소리없이 나타났다.
“딱 한 번 공격하는 것이니 사정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걸 이 늙은이라고 모르겠습니까?”
한립의 충고에 노파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등 뒤로 검은 거대 사자를 불러냈다. 이전보다 훨씬 크고 사나운 기세였다.
소명에게 당한 것도 짜증스러운 데 한립에게까지 당할 수는 없었다. 한립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돌연 한 걸음을 내딛었다.
쾅!
그의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지면에 닫는 순간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노파는 가슴이 서늘해지며 한립의 몸이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은색 문양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피부에 비늘이 생기고 머리 위로 뿔이 솟은 그는 체구까지 커져 흉흉한 마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도공법을 극성으로 익힌 진마체(眞魔體)입니다! 만화 수사, 절대 방심하면 안 됩니다!”
청평도인이 변신 후의 한립을 보자마다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소리쳤다. 옆의 소명은 말은 없었지만 가면 사이로 드러난 눈에 이채가 어려 있었다.
안 그래도 움찔하던 만화부인이 ‘진마체’란 소리에 폭발적으로 기세를 일으켰다. 그녀의 소매 속에서 검은 바늘들이 잔뜩 튀어나가 검은 진법을 형성하고 노파를 보호했다.
노파는 아껴두던 비장의 한 수 비침진도(飛針陣圖)를 쓰고 있었다.
오래 전 상고 유적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련법으로 수백 년간 360개의 흑혈침(黑血針)을 제련해 비침진도를 완성했다.
이걸 사용해 동급 수사와 크게 져본 적이 없었고 못해도 무승부는 얻어 낼 수 있는 그녀만의 필살기였다. 그녀가 이런 신통을 발휘한 것은 그만큼 한립의 진마체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진마체?’
한립은 청평도인의 말에 내심 웃음을 흘렸다. 범성변신을 완전히 발동하지 않으면 몇몇 희귀한 마공을 극성까지 익힌 모습과 유사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천양지차였다.
한립의 본체는 평범한 진령에 버금갈 정도로 강해서 경칩결을 쓰지 않아도 평범한 대승기 수사를 손봐주기에는 충분했다.
거대한 몸을 거침없이 움직여 진법도 앞에 이른 거인은 비늘로 뒤덮인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자 다섯 손가락 끝에서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꽈앙!
진법도 위쪽에 극심한 파동이 일고 웬만한 거대 손보다 배는 큰 금빛 거대 손이 나타났다. 그 중심에 선 만화부인은 거대 손의 기세에 입가를 꿈틀했지만 늦지 않게 법결을 날렸다.
진법도에서 수많은 검은 바늘들이 쏘아져나갔다. 무척 날카로운 바늘이었지만 금색 거대 손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티티티팅!
검은 바늘들은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 튕겨나갔고 금색 거대 손은 멀쩡했다. 만화부인은 크게 놀라지 않고 수결을 맺은 다음 팽이처럼 회전했다.
대여섯 개의 법결의 진법도 속으로 흡수되었다.
우웅!
진법도에서 열댓 줄기의 밧줄이 자라나 금색 거대 손을 꽁꽁 묶었고, 밧줄에서 검은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덕지덕지 금색 거대 손을 감쌌다.
“봉하라!”
만화부인이 회전을 멈추고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검은 주술문자들이 꿈틀꿈틀 형태를 바꾸어 거대 손을 완전히 봉하려는데 한립이 변한 거인이 입을 열었다.
“깨트려라.”
천둥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거대 손에서 금색 뇌전들이 튕겨 나와 검은 주술문자들을 찢어발겼다.
자유를 되찾은 거대 손이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고 검은 밧줄들을 뜯어냈다.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에 검은 밧줄이 거의 가루가 되어 찢겨나갔다.
금색 거대 손은 흐릿하게 변해 검은 진법도를 내리쳤다.
쿠앙!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지켜보던 소명과 청평도인도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빛이 가셨을 때는 진법도가 거의 찢겨나가 있었다.
만화부인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꼼짝 못했다. 비침진도가 망가진 것은 물론 등 뒤의 검은 사자도 엄청난 압력에 둥글게 몸을 말고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비취색 나무 방패와 강력한 방어보물 몇 가지가 남아 지키고 있었지만 거대 손의 위력에 당해내지 못할 게 뻔했다.
진마체가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양보 감사합니다.”
한립이 변한 거인이 한 마디를 남기고 뻗었던 팔을 회수했다. 동시에 만화부인에게 떨어져 내리던 금색 거대 손이 자취를 감추었다.
노파는 자기가 어떻게 경기장을 벗어났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걸어 나왔다. 놀란 청평도인과 소명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청평 수사께 가르침을 구할 차례인가요?”
경기장에 서있는 한립이 이번에는 청평도인을 불렀다. 청평도인은 방금 노파가 호되게 당하는 것을 보았기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압도적인 마공을 펼치는 수사를 어찌 감히 빈도가 상대하겠습니까. 굳이 겨룰 것 없이 제가 진 것으로 하겠습니다.”
청평도인은 아주 유들유들한 성격인지 쉽게 패배를 인정했다.
한립도 힘으로 상대를 핍박할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범성진신을 거둔 후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한 수사처럼 실력이 뛰어난 분은 제 평생 몇 분 보지 못했습니다. 아,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풍원대륙에 마계로 건너가 명충모를 참살했다는 인족의 한립 수사가 아니신지요?”
소명이 한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물었다.
“과찬을 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제가 인족의 한립인 것은 맞습니다.”
잠시 눈빛이 달라졌지만 한립은 겸손히 답했다.
“하하하, 과연 한 수사셨군요! 귀한 분이 멀리서 와주셨는데 성에서 한동안 대접해 드리고 교류해야겠습니다.”
소명은 다른 두 수사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열정적으로 청해주시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안 그래도 혈골문의 혈도공법이 궁금하던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잘 됐습니다! 만화부인, 청평수사, 같이 제 동부로 돌아가시지요.”
“소 수사께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온 것인데 어찌 대답을 듣지 않고 돌아가겠습니까. 당연히 따라가야지요.”
만화부인과 눈짓을 주고받은 청평은 흔쾌히 소명의 말에 따랐다.
“제가 미리 분부를 해놓아 성대한 연회가 준비 되어 있을 겁니다. 모두 흡족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소명은 다른 수사들을 데리고 혈학성에 위치한 거대 궁전으로 날아갔다.
반나절 후,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한립은 조용히 거대 궁전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장 혈학성 거리 구석의 객잔을 찾아들어가 별채에서 화석노조와 주과아를 만났다.
곧 별채의 대문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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