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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70화 (1,127/2,000)
  • 1370화. 청평도인과 만화부인

    *

    3일 후, 한립이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광장에 나타나 화석노조와 주과아를 데리고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비술 수련에 갑작스런 깨달음을 얻어 상고제단을 찾는 일을 잠시 미루고 한동안 폐관수련을 해야겠다며 그들도 외출을 삼가고 수련에 매진하고 있으라고 일러주었다.

    그날 이후 1달 동안 세 사람은 정말 객잔의 독채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날도 방에 앉아 정좌를 하고 있던 한립이 돌연 눈을 뜨고 금빛 빛줄기로 변해 방을 빠져나왔다.

    쿠콰콰쾅!

    거의 동시에 경천동지할 굉음이 들려왔다.

    태양처럼 거대한 빛기둥이 객잔 상공에서 폭발해 주변 건물들이 죄다 쓰러지고 휩쓸린 혈천인들은 분분히 핏물이 되어 죽어나갔다.

    수행이 비교적 높거나 적시에 보물을 꺼내 몸을 보호한 이들만 다급히 폭발 여파에서 벗어나 노한 얼굴로 고공을 올려다보았다.

    화석노조와 주과아도 물론 그들 중 하나였다.

    금공금제 때문에 아무도 날아올라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막 빛구슬이 폭발한 곳에 두 명이 떠있었다.

    도포를 입은 청년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백발 노파에게서 놀라운 영기의 압력이 느껴졌다. 조금 전 사태는 두 사람의 짓이었다.

    “대, 대승기 노조! 혈학성 금공금제가 얼마나 강력한데 합체기 수사라면 저리 높은 곳에 떠있을 수 없을 겁니다.”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대승기 노조들의 싸움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안 구경꾼들은 바람처럼 흩어져 더 멀리 도망쳤다. 계속 이곳에 남아 있다가는 죽은 목숨이었다.

    화석노조와 주과아는 한립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고공에서 냉랭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다 아주 힘이 넘치시나 봅니다. 이곳에서 거리낄 것 없이 실력을 발휘하시고 혈골문은 안중에도 없으신 겁니까.”

    파동이 일고 청년 도인과 백발 노파 사이에 하얀 가면을 쓴 사내가 나타났다. 은색 문양이 새겨진 가면은 두 눈을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소명 수사, 드디어 나선 것입니까? 이제껏 우리들을 피하며 만나지 않으려 한 것은 수사십니다. 흥, 시간을 더 끌었으면 이 성 전부를 박살내서라도 불러내려던 참입니다.”

    노파가 적반하장으로 눈을 부릅떴다.

    “소 수사, 만화부인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저희도 어쩔 수 없어 이런 하책(下策)을 쓴 것입니다. 다행이 적당히 범위를 조절해 귀성에 큰 손상을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도사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말의 내용과 달리 아주 인자한 얼굴이었다.

    “얼마 손상을 입히지 않았다고요? 이 지역 인구가 천 명에 이르고 탈출한 자는 고작 수십 명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본성은 제가 머문 이래 수백 년간 사고한번 터지지 않았고요. 두 분이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으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가면 사내가 사늘하게 답했다.

    “소 노괴,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저계 수사들이 죽은 게 무슨 대수라고요!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겁니까?”

    노파는 위협적인 눈빛을 보냈다. 옆에선 청년 도사가 미간을 찡그렸지만 나서서 중재를 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혈학성에 와 저를 찾은 것인지 압니다. 허나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안 될 말이지요! 만화부인 저와 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제 공격을 세 번만 막으시면 승부 결과에 상관없이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3번? 으하하, 30번이든 300번이든 다 받아 줄 테니 가십시다!”

    가면 사내의 말에 백발 노파가 광소를 터트렸다.

    “알겠습니다. 이래야 저도 다른 이들에게 해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중요한 일을 잊을 뻔 했군요. 두 분이 혈학성에 가장 먼저 도착한 줄 아시겠지만 먼저 와서 기다리는 분이 있습니다.”

    가면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파가 놀랄 말을 꺼냈다.

    “우리보다 먼저 소형을 찾은 자가 있다고요? 누가 그리 소식에 능통해서 이리 한발 앞서 움직였단 겁니까.”

    청년 도사가 표정이 달라져 끼어들었다.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오래 기다리신 것으로 아는데 인사나 하시지요.”

    가면 사내는 청년 도사가 아니라 허공 한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오, 제가 은신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인사나 나누실까요.”

    그곳에서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 나타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과연 수사셨군요. 수사의 은신술은 고명했지만 성의 금제는 대부분 제가 직접 펼쳐둔 것입니다. 누구든 이 안에서 제 눈을 피하려면 쉽지 않지요.”

    소명이 한립의 얼굴을 알아보고 미소 지었다.

    “어쩐지 수사께서 진법대가셨군요. 그런데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하하, 솔직히 정말 수사의 인내심에 탄복했습니다! 분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 혈학성에 들어온 후로 저를 찾지도 않고 이곳에만 계시지 않았습니까. 1달 넘게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시고요. 만화부인과 청평수사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계속 그러고 계셨을 테지요. 두 수사가 날려먹은 거리에 하필 수사의 거처가 있던 것이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

    “빈도와 만화수사는 이곳에 동급 수사가 있는지 모르고 한 일입니다. 의식으로 미리 살폈는데 수사를 발견하지 못해 생긴 일이고요. 수행을 숨기는 능력이 탁월하십니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될까요?”

    노파와 시선을 교환한 청년 도인이 한립을 훑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한 가이니 한 수사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본래 혈천대륙 사람이 아니니 이곳 일은 잘 알지도 못하고 모두 처음 뵙습니다. 이곳은 그저 길을 가다 들린 것이라 다들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조금 전 일격을 제때 피하지 않았으면 낭패를 당할 뻔 했으니 두 분이 제게도 적절한 해명을 해주셔야겠습니다.”

    한립이 마지막에 이르러 매섭게 청년도사와 백발 노파를 노려보았다. 소명은 의아했으나 청평도인과 백발부인을 보고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산이었다.

    청평도인이 미간을 좁히고 한립의 표정을 살폈다. 상대가 진심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것 같자 청평도인도 웃음을 거두었다.

    “다른 대륙 분이셨군요. 저희가 먼저 실례를 범하기는 했는데 그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설마 소 형처럼 빈도가 수사의 공격을 3번 막기라도 해야 한단 말입니까.”

    “3번까지도 필요 없습니다. 청평수사와 만화수사가 각각 제 공격을 한 번씩만 막는 것으로 족합니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1번? 하하, 좋습니다. 어디 다른 대륙 수사의 손맛이 얼마나 매운지 봅시다!”

    원체 불같은 성미의 노파인지라 한립의 말에 격노했다. 청평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요한 사항을 확인하려 했다.

    “한 수사께서는 그저 지나다 이 성에 들른 것이라 하셨습니다. 전설 속의 ‘그것’을 위해 오신 것은 아니고요?”

    “수사가 말하는 그게 뭔지도 모릅니다. 저는 바쁜 일이 있어 누가 제 일을 간섭하지 않는 한 남의 일에 방해할 생각이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립은 청평도인의 속내를 읽고 덤덤히 말했다. 청평도인은 기뻐했고 만화부인도 얼굴을 약간 풀었다. 눈을 반짝인 소명이 바로 끼어들었다.

    “하하, 한 수사께서 무슨 일로 본 성에 오셨든 이곳의 주인으로서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경기장에서 실력을 겨루시고 제 체면을 보아 모두 제 동부에 모여 이야기나 나누시지요.”

    “저희야 어차피 소 형을 보러 온 것을요. 폐가 안 된다면 아주 며칠간 묵어갈 생각이었습니다.”

    청평도인이 미소로 화답했다. 한립도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일단 가장 가까운 경기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곳은 본문 제자들이 처리하게 하지요.”

    소명이 희색을 드러내며 난장판이 된 이곳으로 몰려드는 혈학성 병사들을 보았다.

    노파와 청평도인이 반대하지 않자 한립은 주과아와 화석노조에게 전음을 보내두고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주과아와 화석노인은 말없이 그곳을 떠나 인근 길목으로 숨어들었다.

    * * *

    반 시진 후 커다란 고리 형태의 건축물 중간.

    하얀 보호막 속에서 소명과 노파가 마주보고 있었다. 한립과 청평대인은 평온한 얼굴로 보호막 밖에서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첫 번째입니다.”

    소명이 시작을 알리며 입에서 핏빛을 뿜었다. 핏빛 속에서 거대 백골 칼날이 나타났다. 병기의 칼날에 은색 고리들이 박혀 있어 짤랑짤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명은 거대 백골 칼날을 쥐고 휘둘렀다.

    휘익!

    핏빛 주술문자가 뿜어낸 칼날이 공간을 뛰어넘어 노파 지척에 나타났다.

    “겨우 이런 걸로 되겠습니까?”

    하찮다는 듯 이죽거린 노파는 실제로는 전혀 긴장을 놓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검은 나무 비녀를 꺼내 허공을 갈랐다. 나무 비녀에서 검은 화염이 분출되어 뼈 칼날을 휘감고 폭발했다.

    놀랍게도 뼈 칼날은 검은 화염에 휩싸여 녹아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입니다.”

    소명은 놀라지 않고 다음 일격을 준비했다. 그가 녹아내린 뼈 칼날을 가리키자 검은 화염 속에서 은색 고리들이 부르르 몸을 떨며 사라졌다.

    다음 순간 안색이 달라진 노파가 푸른 빛줄기로 변해 솟구쳤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은색 고리 여러 개가 나타나 수축하고 있었다. 한발만 늦었으면 은색 고리에 붙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소명은 주문을 외고 수결 맺기를 멈추지 않았다.

    쿠릉!

    매끄러운 표면에 수많은 뇌전을 일으킨 고리가 튀어 올라 고공의 노파를 노렸다. 이에 만화부인이 얼굴을 굳히며 나무비녀로 아래쪽을 그었다.

    검은 화염이 쏟아져 내려 빛의 고리의 속도를 늦추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노파가 연신 자리를 피했지만 은색 고리들이 순간이동을 하듯 따라 붙었다.

    “이걸로 마염을 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소 노괴, 이 참에 식골마화(蝕骨魔火)의 진정한 위력을 구경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노파가 나무 비녀를 던지고 입에서 정혈을 뿜어 흡수시켰다. 동시에 등 뒤로 검은 기운이 일어나 거대한 사자 허상을 형상화했다.

    검은 화염으로 이루어진 사자는 기이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무 비녀는 빛을 머금고 거무스름한 단도로 변해갔는데 그 작은 단도가 얼마나 고온을 뿜어내는지 주변 공기가 다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은색 고리들이 그 틈을 타 만화부인 머리 위에 나타나 떨어져 내리려 했다.

    크아앙!

    검은 사자가 포효하며 입에서 불 구름을 뿜어 빛의 고리들을 막았고, 만화부인은 단검을 발동했다.

    우웅!

    단검이 맑게 울며 빛줄기로 변해 사자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쿠릉!

    검은 사자의 화염이 더욱 강렬해지며 은빛 고리를 향해 새까만 빛기둥을 내뿜었다. 검은 단검이 변한 빛기둥인지 표면에 기이한 불꽃 문양이 어른거렸고, 쾌속으로 불 구름을 뚫고 은색 고리들을 때렸다.

    고리들은 부러져 빛 입자로 흩어졌다.

    “만화수사의 보물로 잘 알려진 참린마검(斬麟魔劍)이 보통이 아닙니다. 제 태악환(泰岳環)들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군요. 그럼 저도 마지막 공격에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겠습니다!”

    소명은 노한 기색 없이 손바닥으로 단전 부근을 내리쳤다. 그러자 몸에서 갑자기 핏빛 기운이 터져 나와 그를 잠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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