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69화 (1,126/2,000)
  • 1369화. 가면 사내

    *

    3달 후, 어느 중급 종문의 금지 위.

    새까만 거대 선박이 고공에 떠있었고 그 아래로 각종 고계 꼭두각시들이 떠올라 하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동일한 복색을 한 혈천인 만여 명이 대치중이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혈천인들은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한 시진이 흘러 푸른 빛줄기가 금지의 금제를 뚫고 솟아올라 거대 선박에 올랐다. 한립과 주과아였다.

    “뭔가 찾아내셨습니까?”

    혈혼이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다가섰다.

    “이것도 우리가 찾던 제단은 아닌 모양일세. 계속 가지.”

    “예!”

    한립의 말에 화석노조가 답하고 영패로 선박 바깥을 비추었다. 하늘에 깔려 있던 수많은 꼭두각시들이 기척도 없이 거대 선박으로 되돌아갔다.

    쿠르릉!

    검은 주술문자를 일으키며 묵령성주가 출발하자 아래에서 대치하던 종문 수사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종주, 이렇게 저들이 가게 두실 겁니까? 이게 소문이 나면 우리 이화종(離火宗)의 명성은 어찌 되는 겁니까!”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거한이 불퉁거렸다.

    “안 놔두면 어쩌란 말입니까! 상대의 수행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으로 보아 대승기 노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하늘을 뒤덮고 있던 괴뢰만으로도 본 종을 몇 번 멸하고 남을 전력이라고요. 설마 저 장로는 깨지든 말든 계란으로 바위라도 쳐보자는 것입니까?”

    등이 굽은 노인이 사납게 반박했다. 다른 장로들도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본 종이 적수가 안 되면 상종(上宗)에 도움을 구하면 되지 않습니까! 매년 영석을 갖다 바치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 비호라도 받아야지요. 상종이 나서서 상대에게 얼굴이라도 붉혔으면 이렇게 체면이 떨어질 일도 없지 않습니까!”

    “상종에도 고작 대승기 노조 한 분이 버티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다른 동급 수사와 분란을 일으키겠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본 종의 금지에 침입했다 뿐이지 제자들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실질적인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는데 상종에 고한다 한들 나서 주시겠습니까?”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적당한 대가만 치르면…….”

    등이 굽은 노인의 말에 거한이 눈을 부릅뜨고 대꾸했다.

    “됐네,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 짓지! 겨우 체면 때문에 대승기 수사와 척을 지자니. 저 장로, 갑자기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것인가?”

    말이 없던 유생 복장의 중년인이 거한의 말을 끊었다.

    “종주, 제가 무슨 딴 생각이 있겠습니까. 그저 이화종의 명성을 생각해 드린 말씀입니다. 다들 개의치 않으시겠다면 저도 그만하겠습니다.”

    거한은 콧김을 내뿜으며 입을 다물었다.

    “비 장로, 궁 장로는 금지로 가 없어진 보물이 있는지 확인해 주게. 흔적을 확인해 대승기 선배께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녀간 것인지도 확인하고.”

    중년 유생이 등이 굽은 노인과 또 다른 장로에게 분부를 내렸다.

    “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날아올라 금제로 향했다.

    * * *

    이화종 밀실 안.

    “상고제단?”

    “그러합니다. 그 선배님께서 상고제단을 확인하고 가셨더군요. 술법을 펼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등 굽은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래 전에 폐기된 상고제단을 확인하기위해 본문 금지를 찾다니 무슨 의도일까?”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상고제단에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을까요?”

    “되었네. 비밀이 있든 없든 대승기 노조가 직접 나섰으면 우리가 끼어들 틈은 없네. 앞으로 금제를 지키는 인원을 두 배로 늘리고 오늘 일은 잊고 지내세.”

    고민하던 중년 유생이 결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바로 그리 전하지요!”

    등 굽은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거대 선박 대청 안.

    한립이 앉아서 하얀 빛의 장막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막에는 거대한 지도가 또렷하게 그려져 있었고 곳곳에서 푸른 점들이 반짝였다.

    “오는 동안 들를 수 있는 제단은 전부 확인했습니다. 다음 제단은 보름 후에야 도착할 듯싶고요. 그때가 되면 혈도대종인 혈골문 세력 범위로 진입하게 됩니다.”

    빛의 장막 옆에서 혈혼이 푸른 점 중 하나를 짚었다.

    “혈골문이 자네가 척을 졌다는 세력인가. 앞으로 몸을 좀 사리며 다녀야겠군. 괜히 불필요한 싸움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혈골문은 대승기 노조만 대여섯 명을 보유하고 있는 혈천대륙의 강력한 세력 중 하나입니다. 대승기 수사의 수가 다른 세력보다 부족해도 문파 특유의 혈도공법이 아주 패도적이라 다른 평범한 대승기 수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면 묵령성주에서 내려 이동해야하지 않을까요?”

    “묵령성주가 너무 눈에 띄기는 하지. 혈골문 세력 범위에 이르면 거둬야겠군! 혈학성에 이르면 자네는 따로 본체를 찾아 행동하게. 합체급 괴뢰 두 마리를 내줄 테니 대승기 수사만 마주치지 않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게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하루 빨리 실마리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의 배려에 혈혼이 고마움을 표했다.

    “나와 자네도 어찌 보면 인연이 깊다할 수 있겠지. 별 것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 * *

    한 달이 훌쩍 지나 한립 일행은 혈골문이 통제하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묵령성주를 거두고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비차로 바꿔 탔다.

    비랑(飛狼) 꼭두각시들이 끄는 비차는 빠르게 이동했다. 다시 두 달이 흘러 그들 앞에 핏빛 거대 성이 나타났다.

    성은 구조가 특이해서 양옆으로 푸른 호수를 끼고 있었고 성문 방향의 성곽이 불룩 튀어나와 철(凸) 자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부분은 따로 한 마을을 이루고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甕城) 역할을 하는 듯했다. 성벽 위에는 핏빛 갑옷을 걸친 병사들이 여유롭게 순찰을 돌았다.

    다양한 혈천 이족인들이 착실히 성문 앞에서 둔광을 거두고 병사들에게 약간의 영석을 주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혈학성은 혈골성이 보유한 중요 거점 중 하나입니다. 중, 고계 수련자들이 필요로 하는 특산물이 몇 가지 나와 항상 정예 병력이 머물고 대승기 태상장로가 성 안에 은거하고 있어 아무도 소란을 떨지 않지요. 다만 성 안의 물가가 비싸서 오래 머물려면 상당한 액수의 영석을 지불해야 합니다.”

    비차 안에서 혈혼이 공손히 거대성을 소개했다.

    “오는 동안 지나친 혈골문 제자들은 수행의 고하에 상관없이 흉살의 기운을 품고 있더군. 패도적인 혈도공법을 익힌다는 것이 사실이었어. 거기다 혈학성은 여러 대형 산맥 중간에 위치해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으니 성을 방문하는 외지인들이 많겠구만.”

    한립은 의식으로 혈학성 인근을 훑고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이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으면 외부 방문객들을 주로 상대하는 성일 겁니다. 하지만 성 안의 대형 상가는 대부분 혈골문이 장악하고 있어 이곳에 기반을 잡으려면 다른 거대 세력을 등에 업어야 합니다. 또한 이곳에는 종종 신분이 묘한 인물들이 숨어들기도 합니다.”

    “혼잡한 곳이군. 혈골문에서는 그런 수사들을 상관하지 않는 것인가?”

    “혈학성은 혈천대륙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라 성 안에서 대놓고 싸움을 벌여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혈골문에 지불해야할 영석이 밀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덕에 성이 오늘날까지 번성한 것이고요. 성 안에 따로 대형 경기장이 마련되어 있어 원한이 있는 자들은 그곳에서 고하를 가리거나 생사를 걸고 싸우기도 합니다.”

    “대충 어떤 곳인지 알아들었네. 혈 수사,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겠나?”

    “저는 들어가지 않고 이전에 발견한 표식이 있는 만월산맥(万月山脈)부터 수색해보려 합니다.”

    한립의 물음에 혈혼이 고개를 숙이며 진지하게 답했다.

    “그리 마음을 먹었다면 뜻대로 하게. 난 그동안 인근에 있는 두 곳의 상고제단을 찾아보겠네. 이 전음부를 잘 지니고 있다가 뭔가 발견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태우게. 내 바로 감응해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야.”

    한립이 금색 부적 한 장을 쏘아 보냈다.

    “감사합니다. 전음부를 지니고 다니면 훨씬 마음이 놓일 듯합니다.”

    혈혼은 부적을 받아들고 그를 향해 예를 취한 뒤 비차를 나섰다.

    웅!

    빛줄기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지긋이 비차를 밟아 속도를 높였다.

    성문 앞에 이르자 이미 일고여덟 명의 혈천 이종족들이 영석을 지불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간단한 신상과 얼마나 혈학성에 머물 것인지 등을 물은 후 영석을 받았다.

    성에 들어가려는 이들은 전부 착실히 대답했지만 사실대로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혈골문 수사들은 불필요한 사항을 캐묻지 않고 대략적인 내용을 기록한 다음 철패를 하나씩 주어 수사들을 성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립 일행의 차례가 되자 화석노조가 앞으로 나서 합체기 수사의 기운을 드러내고 중계 영석 하나를 던져주었다.

    “세 명이다. 남은 영석은 돌려줄 것 없다.”

    십여 명의 혈갑 병사들 중 가장 수행이 높은 자가 원영기였다. 화석노조가 내뿜은 영기의 압력에 숨이 막힌 병사들은 뒷걸음질 쳤다.

    우두머리 병사가 중계 영석을 받고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철패 3개를 내주고 물러났다.

    “영기의 압력이 매서운 것이 또 합체기 선배님인가. 대충 세어 보아도 이번 달에만 합체기 수사가 서른 명 넘게 성에 도착했어.”

    우두머리 병사는 한립 일행이 들어가고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갑자기 합체기 강자들이 우르르 몰려든 것이 앞으로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어요.”

    곁에 있던 눈치 빠른 병사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몇 달 사이 상부에도 낯선 얼굴이 늘지 않았습니까? 다들 어찌나 우쭐대는지 상당한 배경을 지닌 인물들 같았습니다. 본 종의 제자들 같지는 않았어요.”

    또 다른 병사가 작게 속삭였다.

    “됐다, 더는 이 일에 대해 거론하지 말거라! 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리 같은 저계 제자들이야 문지기 노릇만 잘하면 되는 것이야. 본문의 문규가 엄하단 것을 잊지 말고 항상 유의하거라.”

    우두머리 병사가 흠칫 놀라 수하들을 질책했다. 병사들은 ‘문규’라는 두 글자에 황급히 입을 다물고 제 자리로 돌아가 더는 떠들지 않았다.

    성문 뒤 옹성 안에 들어선 한립 일행은 기다란 길과 양쪽으로 늘어선 간단한 점포들 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막 성 안으로 들어온 수사들은 점포 앞으로 가 물건을 보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의식으로 살펴보니 팔고 있는 물건들이 다양하고 풍성했지만 화석노조와 같은 합체기 수사도 마음에 찰만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길가에 오래 머물지 않고 옹성 시장가를 지나자 드디어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드넓은 광장에는 커다란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다.

    상점에 걸린 편액에 재료, 영수, 법기 등 파는 물건들이 확실히 표시되어 있었다. 화석노조와 주과아가 시끌벅적한 풍경에 눈을 반짝였다.

    “며칠간은 자유롭게 활동해도 좋다. 3일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하자.”

    한립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반년 가까이 상고제단을 찾느라 바빠서 제대로 성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대륙에 왔으니 신기하고 희귀한 재료와 보물을 구경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

    화석노조와 주과아가 뛸 듯이 기뻐하며 예를 올리고 광장의 상점으로 향했다. 3일이면 상점 전부를 돌아볼 수는 없어도 서두르면 규모가 큰 곳은 그럭저럭 다 들러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한립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무의식중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이되어 어둠이 드리우자 무형의 금제 밖으로 초승달 몇 개가 떠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로 붉은 빛이 번져 하늘 전체가 핏빛으로 물든 듯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혈천대륙의 낮은 풍원대륙, 뇌명대륙과 똑같은데 밤만 되면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대륙의 이름도 혈천대륙이 아닌가!

    한립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광장에 연결된 어느 길로 접어들었다.

    “대승기 수사? 전혀 모르는 얼굴인걸. 보아하니 저쪽도 날 발견한 것 같은데…….”

    한립이 하늘을 쳐다본 순간 허공에 은신해 있던 가면 쓴 사내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대승기 수사에게 들켰으니 더는 숨길 수 없겠군. 신속히 소문을 퍼트려 그들의 힘으로라도 행동에 옮겨야겠어. 시기를 놓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가면 사내는 결심을 하고 흐릿하게 허공에 녹아들었다.

    한립은 거리를 지나며 규모가 있는 상점 몇 곳을 들러 예비용 재료들을 보충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한 객잔의 독채를 빌려 수련에 들어갔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