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8화. 혈학성(血鶴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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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
“귀 맹이 귀물들과 싸우기로 한 때와 장소는 어떻게 되며, 몇 차례 전투로 승부를 보는 것입니까? 저 말고도 또 어떤 수사들이 참가하는지요?”
그가 이렇게 세세하게 묻는 것을 보고 승려는 불만을 드러내기는커녕 기뻐하며 대답했다.
“3년 후, 이번에 발견된 소세계에서 강자들끼리 5차례 전투를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이 늙은이를 비롯해 뇌명대륙 분 맹의 수사와 장로회의 객경장로가 나설 예정이고요. 그밖에 혈천대륙의 최상급 강자인 혈살에게 청을 넣어놓았습니다.
수사까지 합류하시면 다섯 차례 전투를 치를 사람들이 다 모이게 되지요. 이번 비무는 일대일로 이루어지니 지더라도 목숨까지 잃을 걱정은 없습니다. 만일 이겨주시면 약조한 보수 외에 제가 책임지고 수사를 본 맹의 등천각(登天閣)으로 모셔 어떤 선가 비술이든 골라 익힐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선가 비술이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본 맹이 선가비술 몇 가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극비는 아니고요. 혁련상맹을 창립하신 몇몇 선배님들은 본래 선계의 선인이 영계에 남긴 후손이셨습니다. 상맹 자체도 원래는 선계가 영계에 설치한 비밀 감시 기구 중 하나였고요.
그러니 선계 비술 몇 가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이후 천지가 뒤바뀌어 각 계면과 선계간의 연락이 철저히 끊겼고 그때부터 능력자들을 모아 지금의 상맹을 꾸려나가게 되었습니다.
본맹이 외부적으로는 상업에 치중해도 사실 암암리에 이곳 계면의 안녕을 위해 외부 세력의 간섭을 막아내고 있지요. 지난번 명충모 사건도 본 맹에서 몇몇 대승기 수사들을 마계로 파견하였는데 시인의 땅 금제에 갇혀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수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한 수사가 본 맹의 많은 장로들에게 은혜를 베푼 셈입니다.”
승려가 혁련상맹의 유래를 밝히자 한립은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귀 맹은 각 대륙의 상고제단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계십니까?”
“얼마나 파악하고 있다니 정확히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한립이 불쑥 던진 질문에 승려가 의아해했다.
“제단의 상세한 위치말입니다.”
“다른 대륙은 몰라도 혈천대륙이야 뭐. 상고제단의 위치를 적잖이 파악해 두었습니다. 열에 여덟은 찾아냈지요. 제단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상고제단은 근본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승기 수사들에게는 굳이 들여다볼 가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귀 맹에 가담하는 것은 심사숙고할 일이지만 강자 결전은 참가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보수 외에 한 가지 조건을 수락해 주신다면요.”
“조건이 무엇입니까?”
“제가 혈천대륙에 머무는 동안 귀 맹의 정보체계를 이용해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 상고제단에 관한 자료도 1부 복제해 주시고요.”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조건을 수락하지요. 상고제단에 관한 정보는 이곳에서 나가시는 대로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어렵지 않은 조건에 승려가 긴장을 풀고 마음 편히 답했다.
“귀 맹이 약조를 지켜주시면 3년 후 강자 결전 때 참가하겠습니다.”
“수사의 신분에 약조하셨으니 당연히 믿어야지요. 이 신물을 지니고 계시면 강자 결전이 시작될 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곳이나 본 맹에 속한 지점으로 가시면 소세계 입구로 안내할 것입니다.”
승려는 원반을 하나 꺼내 던져주었다.
“잘 챙겨 두겠습니다!”
한립이 저물탁에 진법 원반을 챙기자 승려는 주의가 필요한 대륙의 강자들을 설명해주고 상세한 혈천대륙 지도를 주고 그를 배웅했다.
두루마리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눈앞이 환해졌다고 느낀 순간 한립이 핏빛에 휩싸여 빠져나왔다.
“한 선배님!”
“선배님!”
일행들이 서둘러 다가와 예를 올렸다.
“걱정을 시켰구나. 일어나거라.”
인사를 받고 있는 한립에게 냉랭한 얼굴의 여인이 다가왔다.
“한 선배님, 찾으시던 자료는 곧 당도할 것입니다. 조그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이곳에 벌써 이렇게 오랜 시간을 붙들려 있는데 조금 더 늦어진다고 달라지겠는가.”
한립은 담담히 답했다. 이에 여인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후 술법으로 팔귀서불도를 회수했다. 동그란 얼굴의 청년은 공손한 자세로 옆으로 물러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쉬익!
한 시진이 지나자 하늘 끝에서 새빨간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여인이 수결을 맺어 손짓하자 노란 옥간에 묶인 붉은 비검이 떨어져 내렸다.
“선배님, 상고제단에 관한 자료입니다.”
“상세하구만. 귀 맹이 고생했겠어. 시간도 늦었고 바로 가겠네.”
한립은 의식으로 내용을 확인하고 만족했다. 그는 상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검은 빛을 쏘아 올렸다.
쿠르릉!
광풍과 함께 산만한 거대 선박이 나타나 떠올랐다. 바로 묵령성주였다. 동그란 얼굴 청년과 냉랭한 미녀의 얼굴에 동시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한립은 일행들을 데리고 선박에 올랐고 검은 빛줄기가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동그란 얼굴의 청년과 냉랭한 얼굴의 여인 뿐이었다. 선박이 드디어 보이지 않자 여인이 갑자기 청년에게 깊게 예를 올렸다.
“벽영 대인, 한 선배님께서 참가해 주시기로 하셨나 봅니다. 축하드립니다! 강자 결전에서 본 맹이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졌습니다.”
“허허, 한 수사의 신통이 비범하기는 하네만 음사십왕 정도의 강력한 귀물과 싸워서 승리할 확률은 5할에 불과하네. 더 적합한 인물을 3년 내로 찾을 길이 없어 제안한 것뿐이지.”
청년의 신형이 커지고 얼굴이 흐릿하게 일그러져 두 눈이 혼탁한 녹포 도인으로 변했다. 동그란 얼굴의 청년이 벽영 본체였던 것이다.
그가 어떤 비술로 용모를 바꾸고 수행을 합체기 경지로 끌어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 * *
뱃머리에서 혈혼이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한립을 보고 있었다.
“한 선배님, 상맹에서 어째서 보자고 한 것입니까? 일정에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요?”
“안심하게. 사소한 일을 부탁한 것이라 일정에는 큰 영향은 없을 것이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한립은 혈혼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느닷없이 손목을 털며 말했다.
“전 선자, 이제 나오시지요. 벽영 수사와의 대화는 함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헤헤, 무슨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 데요. 그리고 겨우 소세계쯤이야 본족은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손에 넣을 수도 있고요. 심마를 걸고 맹세하건데 절대 이 일을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겠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한립의 손목에서 녹색 빛이 번지자 녹색 장포를 입은 여인이 모두 앞에 나타났다. 생김새가 청수하기 그지없는 미인은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한 쌍의 비취색 뿔이 자라나 있었다.
지난번에 말한 대로 본모습을 드러낸 전비아였다.
이에 혈혼, 화석노조, 주과아는 깜짝 놀랐지만 한립의 말을 듣고 공격하지는 않았다.
“선자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겠습니다.”
한립은 뜻밖에도 상대를 퍽 신뢰하는 것 같았다.
“한 형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했으니 도과대회에서 반드시 이 빚을 갚겠습니다! 저는 오래 머물 수 없어 바로 돌아가 봐야겠네요.”
전비아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몇 마디하고는 곧바로 인사를 했다. 한립은 당연히 말리지 않고 그녀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영계를 떠나 본 족으로 돌아갈지는 관심 밖이었다.
“가자. 상고제단이 대략 어디어디에 있는지 파악했다. 아마 가까운 곳에도 있는 것 같은데 그곳부터 가보면 되겠구나.”
한립은 전비아가 멀리 떠난 후 명을 내렸다. 이에 화석노조가 명을 받들어 꼭두각시들을 부려 선박의 속도를 높였다.
“혈혼 수사는 나를 따라 대청으로 가지. 할 이야기가 있네.”
한립의 말에 혈혼은 고분고분 따라갔다.
잠시 후 대청 안.
한립은 자리에 앉고 혈혼이 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혈천대륙까지 왔으니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난 자네가 강적을 만났을 때 비호를 해주기로만 했지 본체를 찾는 것은 자네의 능력에 달렸네.”
“계획을 세워두었습니다. 예전에 실마리를 발견한 혈학성(血鶴城)으로 가보려고요. 본체가 남겨둔 표식을 발견했는데 적에게 쫓기느라 제대로 수색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반드시 더 많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혈학성. 잠깐, 내 그곳의 위치를 확인하겠네.”
한립은 옥간을 꺼내 의식을 불어넣었다.
“전송진을 이용하지 않으면 반년은 걸릴 거리로군. 허나 가는 길에 적잖은 상고제단이 분포하고 있어. 자네의 뜻대로 혈학성으로 가세! 가는 길 인근에 있는 상고제단들을 하나씩 살펴야 하니 일정이 약간 지체가 되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제 일로 선배님의 용무를 방해할 수야 없지요. 그저 혈학성은 제가 원한을 산 혈도대종의 세력 범위라 조심해서 움직여야할 것입니다.”
혈혼이 기뻐하며 예를 올렸다.
* * *
며칠 후 묵령성주는 청록색 호수 위에 나타나 황량해 보이는 작은 섬으로 내려갔다. 반나절 만에 다시 떠오른 거대 선박이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 * *
한 달 후, 혈천대륙 모처의 이름난 산맥.
십여 명의 혈천대륙 이종족들이 두 패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첫 번째 무리는 붉은 피부에 뺨에는 흐릿한 비늘이 자라나 있었고, 두 번째 무리는 짙은 눈썹에 큰 눈을 지니고 전신에 살기(煞氣)가 가득했다.
양자의 아래쪽 수풀엔 기이한 향기를 발산하는 영약 몇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
영약 양쪽으로는 핏빛 장포를 걸친 노인과 회색 의복을 입은 노인이 서있는데 각자 바구니와 원반 형태의 법기를 부려 싸우는 중이었다.
그들은 영약을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쿠르릉!
그때 느닷없이 검은 거대 선박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수풀로 날아들었다.
거대 선박이 접근하자 엄청난 기세가 몰려와 고공에서 싸우던 혈천 이족인들이 싸우다 말고 놀라 물러났다.
겨우 결단, 원영기의 수사들이 견딜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아래쪽에서 대치중이던 연허기 노인들도 안색이 변해 다급히 고공의 거대 선박을 올려다보았다.
거대 선박으로 인해 두 이족인들이 싸우던 곳에 소용돌이가 쳤다. 이에 숲은 난장판이 되었고 땅이 깊이 파여 고랑을 형성했다.
검은 선박은 그러는 동안 번득 시야에서 사라졌다. 핏기가 가신 두 노인은 귀신이라도 본 듯 얼어붙었다.
“대승기 노조! 대승기 선배님이 아니고서야 이런 위력을 낼 수 없을 테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 노조께서 이곳을 지나시는……. 엇, 내 영약!”
혈포 노인과 회의 노인이 정신이 팔려 한 마디씩 주고받다가 얼른 싸우던 곳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영약들은 기적처럼 무사했다. 이렇게 혈포 노인과 회의 노인의 싸움이 다시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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