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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67화 (1,124/2,000)

1367화. 팔귀서불도(八鬼噬佛圖)

*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소매 속에서 핏빛 두루마리를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손을 까딱여 혈홍색 두루마리를 끌어온 한립은 의식으로 그것을 훑고 미간을 좁혔다.

두루마리를 펴자 먹처럼 새까만 팔귀서불도(八鬼噬佛圖)가 그려져 있었다. 흉측하게 생긴 여덟 마리의 악귀들이 승려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승려를 산 채로 잡아먹기라도 할 듯 생생하고 흉악한 그림이었다. 한립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런 그림을 보낸 벽영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훅!

바로 그때, 두루마리 표면에서 핏빛이 튀어나와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흠칫 놀란 한립이 의식으로 핏빛을 훑고 뜻밖에도 피하지 않았다.

핏빛을 흡수한 한립의 신형이 그대로 두루마리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곁에 서있던 혈혼, 주과아, 화석노조가 화들짝 놀랐다.

특히 화석 노조는 당장 등 뒤로 검은 기운을 일으켜 커다란 거대 구렁이를 만들어내고 여인을 노려보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공격할 기세였다.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벽영 대인께서는 따로 한 선배님을 만나 뵙기 위해 한 줄기 분신을 이용해 그림 속으로 초대한 것이니까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돌아오실 겁니다.”

여인이 침착하게 손을 저었다.

“한 선배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화석 노조가 경고했다.

“기다려 보시고 한 선배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으면 그리 하시지요.”

“화 형,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잠시 기다리지요. 한 선배님의 신통에 위험에 처할 리가 있겠습니까.”

혈혼이 눈을 빛내다 화석노조를 말렸다. 이에 일리 있다고 여긴 화석노조는 거대 구렁이 허상을 거두었고, 주과아는 걱정스런 눈길로 허공에 뜬 악귀도를 바라보았다.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려 해도 전부 튕겨 나와 소용이 없었다. 머지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족인들은 가슴이 서늘해져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스스로 방진이라 칭한 둥근 얼굴 사내만이 잔잔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 *

그 시각, 악귀도 내부의 신비한 공간.

한립은 눈앞에 정좌를 해있는 회색 장포 노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색이 팔귀서불도에서 여덟 악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림 속 승려 같았다.

승려가 있다면 악귀들은?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핏빛 안개가 그득했다.

핏빛 기운은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고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려 해도 극도로 차가운 곳에 들어선 것처럼 움직임이 둔해졌다.

키에에엑!

핏빛 안개 속에서 괴성이 들리고 커다란 여덟 마리의 악귀들이 걸어 나왔다.

하반신을 요수 가죽으로 겨우 가리고 맨 몸을 드러낸 악귀들은 전신에 괴이한 문신을 새기고 머리에 뿔이 솟아 있었다.

“벽영 수사,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립이 승려를 보고 냉랭히 물었다.

“오, 제가 이곳에 있는 줄 어찌 아셨습니까?”

죽은 듯 앉아 있던 승려가 부르르 몸을 떨고 눈을 떴다. 마치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제가 대승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의식을 깃들이는 이런 수법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수사께서 법기를 이용해 불러들이기에 긴밀히 상의할 일이 있다 여겼건만 악귀들을 보고 나니 제 판단이 틀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해 마십시오. 수사께 드릴 말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일에 대해 알 자격이 되는지 확인해야 하는 제 입장도 이해해 주세요. 저 8마리 황천귀왕(黃泉鬼王)은 그리 강하지는 않아도 황천명풍(黃泉冥風)을 조종합니다.

평범한 수사들은 약간만 묻어도 뼈와 살이 녹아내려 대승기 수사들도 꺼리는 바람이지요. 수사께서 황천명풍 속에서 자유자재로 오가거나 보물이나 술법으로 일각 이상 버티시면 제 시험에 통과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후 무례에 대한 사죄를 올리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하겠습니다. 통과하지 못하시면 그림 속에서 나가게 해드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겠지만요.”

승려의 말이 끝나자 동시에 여덟 악귀들이 낮게 포효했다. 커다란 입에서 새까만 음풍(陰風)을 뿜어 거대한 바람의 벽을 만들고 한립을 공격했다.

“황천명풍에서 일각을 버티면 된다고요. 흥미롭기는 한데 저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 아니십니까.”

한립은 날아드는 음풍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쿵!

검은 바람이 달려드는 순간 전신에서 금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황천음풍은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금빛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너무 방심하지 마십시오. 황천음풍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해집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괴이하다면 즐겁게 경험해보겠습니다.”

음풍이 갑자기 거세져 엄청난 힘을 발산했다.

이에 한립의 몸에서 방출된 금빛도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겨우 반 척을 물러나고 금빛이 안정을 찾았지만 한립은 눈을 번득였다.

“꽤 흥미로운 데 제가 조금 가져가 살펴봐도 되겠지요?”

“정말 그러실 수 있다면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노부의 수중에 넘치는 것이 황천음풍이니까요.”

승려는 의외라 여겼지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사양 않고 챙겨 가겠습니다.”

한립은 바로 수결을 맺었다.

팟!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이 떠올랐다. 전신에서 금색 주술문자를 반짝인 법상은 나타나자마자 여섯 개의 팔을 움직이고 주문을 외웠다.

쿠쿵!

금색 빛구슬 여섯 개가 떠올라 하나로 뭉쳐지더니 거대한 금색 소용돌이로 변했다.

“거두어라.”

한립의 손짓에 소용돌이가 금색 주술문자와 강력한 흡입력을 발생시켰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후우웅!

맹렬하게 불던 음풍이 소용돌이의 흡입력에는 속수무책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몇 줄기로 나뉘어 금색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음풍의 모습은 새까만 강물이 흐르는 것과 비슷했다.

거대한 검은 바람의 장벽이 흩어져 얼마 남지 않았다. 악귀들도 똑바로 서있지 못하고 소용돌이의 흡입력에 힘겹게 저항하는 중이었다.

“한 수사, 사정을 봐주시지요! 시험은 통과입니다. 황천귀왕들은 이 늙은이가 쓸데가 있으니 남겨 주세요.”

승려가 놀라 소매를 펄럭였다. 괴이한 파동이 금색 소용돌이 앞에 나타나 방대한 흡입력을 갈라냈다. 자유를 되찾은 악귀들은 낮게 포효하고 검은 알갱이로 변해 사라졌다.

“제가 어찌 귀물들에게까지 손을 대겠습니까. 그저 호기심에 저들의 실력이 어떠한 가 시험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한립이 웃음 짓자 등 뒤의 금색 법상과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그는 손에 검은 구슬을 들고 흥미롭게 살피는 중이었다.

동선금광이 모아 온 황천음풍이었다. 막대한 법력으로 압축을 해 구슬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한 형의 실력이 제 예상을 넘어섭니다. 괜한 시험으로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노승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목석과 다름없었다.

“벽 형의 시험에 통과했다니 이제 무슨 일인지 듣고 싶습니다.”

“수사는 들을 자격이 됩니다. 제 신분은 알고 계시겠지요?”

“바깥의 여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혁련상맹에서 혈천대륙을 담당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허면 저희 상맹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십니까?”

“그다지 아는 바가 많지 않군요. 세 대륙에 걸쳐 있는 얼마 안 되는 초대형 세력 중 하나라는 것만 압니다.”

“본 맹은 비교적 느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 대륙에 각각 분맹이 존재하지만 이익이 되는 일에 자원과 정보를 교류할 뿐 강제성을 띠는 규정은 없지요.

평소에는 맹의 대승기 수사들로 이루어진 장로회가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합니다. 이 늙은이도 혈천대륙 장로회가 천거해주어 잠시 총 집사 직위를 맡고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몇몇 대승기 수사들도 본 맹에 들어오고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객경장로 직위를 지니면 수련에 방해받지 않고 누리는 이익이 상당하니까요. 유일한 의무는 본 맹이 위험에 처하면 나서서 도움을 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정식으로 본 맹의 객경장로 직을 제안합니다. 흥미가 있으신지요?”

승려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하려고 저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은 아닐 텐데요.”

“물론입니다. 수사가 본 맹의 일원이 되면 이야기가 쉬워질 것 같아 미리 제안해보았습니다.”

“혁련상맹에 흥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본론이 무엇인지 듣고 싶군요.”

한립은 담담히 노승을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이전에 명계(冥界) 음사(陰司)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명계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직접 가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음사는 전설 속에서나 전해져 내려오지 실제로 존재하는지 모르겠고요. 수사가 하시려는 이야기가 명계와 관련이 있습니까?”

“대략 백 년 전, 본 맹은 혈천대륙의 공간균열을 조사하다 우연히 신생 소세계(小世界)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정말입니까!”

놀랄만한 이야기였다.

“존재한지 꽤 세월이 흐른 소세계였는데 아직 고계 생령이 탄생하지 않아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각종 자원이 풍부해 대량의 물자와 인원을 동원해 개발하려 했지요. 그런데 또 다른 계면의 존재들도 비슷한 시기에 그곳을 발견해 침입해 오고 말았습니다.”

“다른 계면이라면…….”

“적들과 처음 교전하고 본 맹은 크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전부 수사가 보았던 귀물과 같은 존재였거든요. 약한 것들은 본 계의 연허기 정도의 수행을 지녔지만 강자는 영계의 대승기 수사와 맞먹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황천귀왕들도 얻은 것이고요. 이것들은 귀물의 기운을 흡수해야 형상을 유지할 수 있어 진정한 귀왕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황천귀왕은 우리와 어깨를 견줄만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니까요.

귀물들은 자신들이 온 계면을 ‘명계’라 칭하고 음사십왕(陰司十王)이라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저희 상맹은 그런 귀물들과 몇 차례 대대적인 전쟁을 치르고 결판을 보지 못한 채 사상자만 나왔지요. 명계와 우리 쪽 모두가 크게 세력을 잃기 전에 급히 그들과 맹약을 맺었습니다.

강자들로 이루어진 결전을 통해 소세계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결정하자고요. 이 늙은이는 한 수사께서 본 맹을 대표하는 수사 중 하나로 그 결전에 나가 주십사 부탁드리려 합니다. 본 맹에 아예 들어와 주시면 더욱 명분이 서겠지만요. 결전에서 승리를 하든 패배를 하든 도와만 주신다면 후한 사례를 하겠습니다.”

승려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명계라 부르는 계면이 우리가 아는 그 명계가 맞습니까? 음사십왕은 또 어떤 존재입니까? 결전에 그들도 참가하는지요?”

이야기를 다 들자 한립이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관련 사항을 조사를 해두었습니다. 몇 가지 증거를 통해 저는 그곳이 전설 속의 진정한 명계는 아닐 거라 판단합니다. 거대한 귀물들이 생존하기에 적합한 황천 귀물들의 나라라고 보는게 낫겠지요.

소위 음사십왕이란 자들도 평범한 귀왕들보다 강한 10명의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본 맹의 세력으로 그들과 지금까지 힘겨루기를 하겠습니까? 이번 강자들끼리의 결전에는 음사십왕이 대부분 참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쉽습니다. 드디어 진정한 윤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으려나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진정한 명계는 아니라도 귀물들이 수련한 신통이 우리의 공법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평범한 생령이 다루는 법칙과 대도가 아닌 힘을 함유하고 있더군요. 수사께서 그들과 손속을 나눠보시다 운 좋게 윤회의 신비를 깨우칠지 누가 알겠습니까!”

승려는 미소 지었고 한립은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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