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4화. 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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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피라면 천룡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어찌 설명할 건가?”
또 다른 대승기 수사가 반박했다.
“선계에도 진룡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들 기억하십니까?”
호옥쌍은 유유히 대답했다.
“호 수사, 선계 조룡(祖龍)을 말하는 겐가 지금? 설마 정말 조룡의 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본 맹의 감정대사는 그럴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귀한 물건을 묵히지 않고 경매에 내놓은 것이고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텐데?”
부유족 대승기 노인이 담담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실 진혈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어떤 효과가 있고 어떻게 쓰이는지 모릅니다. 오랜 연구 끝에 맑은 물을 피에 담가 놓으면 만년영유처럼 법력을 회복하는 영액으로 변한다는 사실 밖에는 알아내지 못했으니까요. 피에 함유된 무시무시한 힘을 추출할 수도, 피 자체를 연화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연화가 안 된다고?”
“하하, 조룡의 피일 지도 모르는데 연화가 쉬웠으면 본 맹이 두고 쓰지 어찌 경매회에 내놓았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신통이 뛰어나고 인연이 닿는 분에게 낙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정혈을 연화시킬 수 있다면 직접 선계로 비승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 봅니다! 물론 믿지 못하시면 경매에 참가하지 않으시면 그만이고요.”
“어마어마한 힘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 조룡의 피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생각지 못한 강력한 존재의 피가 분명하네. 이 보물은 노부가 가져가야겠군!”
“허허허! 이런 보물을 누가 마다한답니까? 호 수사, 어서 경매를 시작하지!”
연달아 두 명의 대승기 노조가 보물에 관심을 보였다. 다른 비옥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금색 피에 마음이 동했을 것이다.
“이 정혈의 시작가는 10억 영석입니다. 그럼 이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선배님들 아무래도 제가 아는 물건 같은데 감정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평범한 용모에 검은 장포를 걸친 사내가 일어났다.
“정혈의 정체를 아신다고요?”
호옥쌍이 눈을 크게 뜨고 흑포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 소리에 무대 옆에 앉은 상맹 노인들마저 눈을 떴다.
“확실한 것은 아니라서……. 정혈이 혹시 12시진마다 오색 무지개를 분출하지 않던 지요?”
흑포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제가 직접 확인해봐야 정혈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장로님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흑포 사내의 말에 호옥쌍이 상맹 노인 넷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명 형,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른 노인이 고개를 들고 고공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대에 올라 확인해 보라고 하십시다. 허허,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버티고 있는데 겨우 합체기 수사가 딴 마음이라도 먹겠습니까?”
고공에서 명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 형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올라와 살피게 하겠습니다! 단 정혈에 접촉하게 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 판별만 하도록 하게.”
마른 노인은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미부인에게 명했다.
“알겠습니다. 자, 수사분 올라와 보시지요.”
상맹 쪽의 허락이 떨어지자 광장 이족인들의 시선이 흑포 사내에게로 집중되었다. 흑포 사내는 바로 무대로 올라 미부인 옆에 서서 지척에서 발우를 관찰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혹시 아닐지 모르니 직접 영액을 취해 판단을 내리면 안 되겠습니까?”
혼자 중얼중얼 거리던 사내가 미부인에게 물었다.
“그것이……. 아주 약간만이라면 가능합니다.”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던 호옥쌍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시지요, 선자. 먼저 금제를 풀어주시면 약간만 취해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요.”
호옥쌍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발우 위로 가져갔다.
펑!
발우 표면의 빛이 가시고 무형의 파동이 흩어졌다. 그걸 본 흑포 사내가 앞으로 한발 짝 나서서 손끝으로 발우를 가리켰다.
투명한 발우가 잘게 진동하고 내부의 액체가 출렁이다 새끼손톱보다 적은 양이 떨어져 나와 날아올랐다.
호옥쌍은 미량인 것에 안심했다. 그녀는 흑포 사내가 액체를 끌어가자 수법을 펼쳐 발우의 금제를 회복했다.
바로 그때, 마른 노인이 안색이 급변해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만! 뭐 하는 것이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맹 대승기 노인이 손을 뻗었고, 남색 거대 손이 하늘을 뒤덮고 흑포 사내 쪽으로 떨어졌다.
호옥쌍은 그제야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발우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흑포 사내는 진작 키득거리며 머리로 떨어지는 거대 손도 본척만척하고 은색 빛줄기로 변해 앞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은빛이 스친 자리에는 발우는 물론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액까지 흐릿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남색 거대손이 흉흉한 기세로 떨어져내리자 엄청난 압력에 흑포 사내가 도망갈 길은 없어 보였다.
쉭!
흑포 사내 머리 위로 괴이한 파동이 일더니 회색 그림자가 번개처럼 나타나 손을 뻗었고 붉은 거대 손이 솟구쳤다.
콰콰쾅!
곧이어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남색과 붉은색 거대 손이 충돌해 강렬한 파동이 퍼졌고 무대 위의 궁장 시녀 세 명과 호옥쌍은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가떨어졌다.
놀랍게도 흑포 사내와 한 패인 누군가가 금색 피를 강탈해간 것이다.
‘뭐야?’
비옥에 앉은 한립도 어안이 벙벙했다. 노기등등한 마른 노인이 재빨리 수결을 맺어 푸른 구슬과 은색 망치를 불러냈다.
푸른 구슬은 빛의 장막을 퍼트려 무대를 봉쇄했고 은색 종은 거대하게 변해 엄청난 천둥소리를 내었다.
“정체가 무엇이냐! 감히 본 맹의 경매회에서 난동을 부려!”
마른 노인은 냉랭히 소리쳤다. 화가 나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다지 당황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흑포 사내와 회색 그림자 모두 이미 대승기 이상의 기운을 드러냈으니 이름이 알려진 자들일 확률이 높았다.
무대 위 다른 상맹 장로 셋도 무표정하게 일어나 각자 보물을 불러내고 흑포 사내와 회색 그림자를 포위했다.
하늘에서 들려오던 음악 소리가 끊기고 오색구름이 갈라지며 살기등등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물샐틈없이 광장을 에워쌌다. 동시에 무형, 유형의 진법들이 겹겹이 나타나 금제의 파동을 일으켰다.
팟!
회색 그림자가 빛을 거두고 왜소한 체구에 길게 수염을 기른 회색 장포 노인으로 변했다.
“물건은 챙겼습니까? 저들이 가짜로 우리를 현혹한 것은 아니겠지요?”
수염 노인이 흑포 사내에게 물었다.
“하하, 제가 나섰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확실히 ‘조룡’의 핍니다.”
흑포 사내가 웃음을 흘렸다.
“본 족을 떠나 우리가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바삐 움직였습니까.”
그들은 상맹 장로 넷이 노려보고 있는데도 자기들끼리 희희낙락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에 마른 노인은 화가 나면서도 뭔가 이상해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버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혈만 내놓으시면 본 맹이 관대하게 처분을 해드리지요. 만일 보물을 강탈해 달아나려 하시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겁니다.”
“하하, 그냥 내놓으라고요? 고생해서 얻은 물건을 그냥 내줄 리가 있겠습니까!”
“저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 없습니다. 어서 가지요!”
흑포 사내가 광소하며 비꼬듯 말하자 수염 노인은 그런 사내를 재촉했다.
“마음 푹 놓으세요. 우리 둘이 떠나려는데 저들이 막을 수 있답니까?”
흑포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암녹색 진법 원반을 꺼내 던졌다. 그러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웅!
진법 원반이 빛을 발하고 허공에 녹색 싹이 터 순식간에 암녹색 거목으로 자라났다. 거목을 본 한립의 동공이 수축되었다.
“쳐라!”
마른 노인이 주저 없이 명을 내리고 은색 망치를 휘둘렀다.
쿠르릉!
사발 굵기의 은색 뇌전이 암녹색 거목으로 떨어졌다.
상맹 노인은 동급 대승기 수사를 겨냥해 공격하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갑자기 나타난 거목을 공격한 것이다.
거목이 무슨 작용을 하는지 몰라도 일단 부숴두는 것이 옳았다. 이에 다른 세 장로들도 공격을 개시했다.
여덟 개의 보물들이 날아올라 고공에서 광채로 이루어진 거산으로 변해 추락했다. 거산은 떨어져 내리기 전에 무형의 실들을 잔뜩 분출해 무대에 구멍을 숭숭 뚫었다.
그러나 흑포 사내는 번득이며 이동해 거목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수염 노인도 빛줄기로 변해 거목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쿠쿵!
은색 뇌전이 거목에 내려치자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가느다란 뇌전 실에 휩싸인 거목이 재가 되어 사라졌는데 그 안으로 들어간 흑포 사내와 수염 노인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달아났어?”
마른 노인이 자신의 두 눈을 믿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세 상맹 장로들도 시선을 주고받았다.
상맹이 겹겹이 펼쳐 놓은 진법이 얼마나 많았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순식간에 이동해 달아났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당황할 것 없습니다. 이곳은 동천 내부가 아닙니까? 절대 달아날 수가……. 이런, 어찌 본 맹 장로의 진입부(進入符)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금제를 찢어내고 동천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장로 분들은 어서 쫓으세요!”
고공에서 상맹 관리자인 명존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이어 금빛 빛줄기 몇 개가 하늘을 가르고 멀어져갔다.
마른 노인을 비롯한 상맹 장로들도 안색이 달라져 둔광을 일으켜 그 뒤를 쫓았다. 이제 광장에 남은 것은 경매 참가자들뿐이었다.
호옥쌍이 창백한 얼굴로 다시 무대에 올라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질서를 유지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러지 않아도 비옥의 대승기 수사들은 물론 광장의 수사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때 움직이면 혁련상맹에서 흑포 사내와 한패라 오해하거나 혼란을 틈 타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여길 것이다.
조룡의 피를 얻을 수만 있다면 오해하든 말든 추격을 해볼 만도 했지만 당당하던 흑포 사내와 수염 노인의 작태로 보아 추격을 따돌리고 달아날 자신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상맹 대승기 수사들은 금방 돌아왔고 우윳빛 빛의 진법 안에서 명존도 침착한 얼굴로 나타났다. 분위기가 그대로인 것이 흑포 사내와 수염 노인은 놓인 듯했다.
“즉시 그들의 초상화를 상맹 전체에 알려라!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가 뭔지 알 수 있겠지.”
“예, 바로 그리 하겠습니다.”
명존의 명에 호옥쌍이 서둘러 수결을 맺고 흐릿하게 사라졌다.
그때 비옥 안의 한립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파앗!
그가 한 팔을 들어 올리자 파동과 함께 암녹색 목검이 나타났다. 검을 든 한립이 팔뚝의 검 문양을 쓰다듬었다.
곁의 혈혼과 주과아는 그의 생각을 방해할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송구스럽게 마지막 경매품에 문제가 생겼지만 관례대로 대륙 간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한을 낙찰 받을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명존은 고개를 돌려 광장의 수사들에게 안내를 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경매회는 마지막 경매품이 낙찰되면 끝이지만 혁련상맹은 대륙 간 전송진 이용권한까지 낙찰되어야 끝이었다.
그 소리에 한립은 잠시 딴 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를 조룡의 피가 아니라 대륙 간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남궁완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이후의 경매는 아주 순조로웠다. 갑자기 혈천대륙으로만 목적지가 한정되고 인원수도 늘어 경쟁자는 줄고 낙찰가는 자연히 낮아졌다.
한립도 손쉽게 네 자리를 얻어내고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의 경매는 이것으로 마치겠고 모두 동천을 떠나셔도 좋습니다. 본 맹이 이번 경매회를 주최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명존이 모두를 향해 포권을 했다. 대륙 관리자인 그가 대륙 간 전송진 관련 경매를 진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광장의 이족들은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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