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63화 (1,120/2,000)
  • 1363화. 금궐옥서

    *

    “한 선배님, 번천기를 포기하시는 것입니까?”

    한립이 딱 한 번 가격을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자 혈혼이 불쑥 물었다.

    “나쁘지 않은 보물이지만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낙찰 받는다고 꼭 좋은 일이라 할 수 없네. 온전한 현천의 보물이 아니라면 인족에 직접적인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화만 불러들일 수 있으니 말일세.”

    “그렇게 생각하면 득보다는 실이 크겠네요. 번천기의 음양기가 전부 모였으면 선배님께서 나서셨을 텐데요.”

    “하하, 온전한 현천의 보물이면 상고 진령 중 하나와 소통해 상고 진령을 소환해 인족을 수호할 수 있었겠지. 그럼 인족은 하루아침에 중등 세력으로 부상할 테고 말이야. 허나 지금은 굳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닐세.”

    한참 후 현천의 보물은 부유족 노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낙찰이 되었다.

    다른 대승기 노조들은 열불이 나면서도 씁쓸하게 상맹 대승기 노조가 번천기를 들고 부유족 대승기 수사가 머무는 비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다경이 지나 상맹 노인이 비옥에서 돌아왔다.

    부유족 대승기 수사는 현천의 보물을 얻었지만 이 때문에 지니고 있던 영석과 보물 대부분을 잃어 앞으로 경쟁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이어 무대 위 미부인은 또 다른 은색 쟁반의 금제를 거두고 옥함을 들어올렸다.

    광장 수사들의 시선이 옥함으로 집중되었다.

    “선가의 물건인 금궐옥서에 대해 들어보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다음 경매품은 금궐옥서 내장 중 한 장입니다. 본 맹이 보장하건데 36장으로 이루어진 원본 중 한 장으로 선가 법결도 수련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법결의 이름과 효과는 말씀드릴 수 없으니 낙찰을 받아 가실지 마실지는 스스로 판단을 하시면 됩니다.”

    호옥쌍이 옥함을 열자 사발 굵기의 빛줄기가 솟아올라 금빛 찬란한 서책으로 변했다.

    표면에 어른거리는 금색 주술문자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신기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바로 선계 특유의 금전문이었다.

    “정말 금궐옥서 내장이잖아! 이런 보물을 혁련상맹이 손에 넣다니!”

    “금궐옥서에는 진정한 선가 공법과 비술이 기록되어 있다는데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다시 한 번 광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만큼 관심을 보이는 자가 많다는 소리였다.

    “기록된 비술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뭔가 손색이 있거나 제한이 있어서일 테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설명을 못한단 말인가.”

    천명족 대승기 수사가 물었다. 많은 이들의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힐 만한 질문이었다.

    “저희를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비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금궐옥서를 낙찰해 갈 분을 위해서입니다. 선가 비술을 탐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수련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제한은 없습니다.”

    “귀 맹의 명성을 생각하면 거짓말은 아니겠구만.”

    천명족 대승기 수사가 웃음을 흘렸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었다.

    “1억5천.”

    “1억7천!”

    “2억!”

    이번에는 대승기 노조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광장의 수사들이 분분히 가격을 불렀다.

    “그만한 영석으로 금궐옥서 내장을 가져가겠다고? 헛꿈꾸지 말거라. 3억!”

    그때 비옥에 있는 대승기 수사가 가격을 확 끌어올렸다.

    “저도 금월옥서에 관심이 있어서요. 6억! 저보다 높은 가격을 부르실 분은 가져가 보십시오. 그 전에 당부드릴 것은 호 수사의 말대로라면 수련하는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텐데 겨우 깨달음을 얻고 수련에 참고하는 용도로 쓸 것이라면 너무 큰 액수로 낙찰 받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가격을 두 배로 올린 석소족 대승기 수사가 몇 마디 덧붙였다. 이에 다른 대승기 노조들도 머뭇거렸다.

    “기왕 수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는 6억1천만을 불러보겠습니다.”

    한립의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뒤에서 혈혼과 주과아가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정말 더 높은 가격을 부르다니, 스스로 한 말은 지키겠습니다. 수사께서 가져가시지요.”

    석소족 대승기 수사는 미련 없이 물러났다.

    “양보 감사드립니다.”

    “좋습니다. 6억1천만 나왔습니다. 셋을 셀 때까지 더 높은 가격을 부르지 않으시면 금궐옥서는 저 선배님께 돌아갑니다.”

    호옥쌍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진귀해도 예상 가격을 3, 4억으로 잡았었는데 그 배로 값을 치르겠다는 자가 나와 무척 기뻤던 것이다.

    결국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없어 상맹의 노인 중 하나가 직접 금궐옥서를 가지고 비옥을 찾았다.

    영석을 치른 한립은 금궐옥서를 살피지 않고 곧바로 저물탁 안에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마지막 경매품을 기다렸다.

    관례에 따르면 마지막 물품이 가장 진귀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대승기 노괴들이 고민 끝에 한립에게 금궐옥서를 양보한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무대 위 미부인이 드디어 마지막 궁장 여인이 든 은색 쟁반 위에 손을 가져갔다.

    은색 쟁반에 드리운 빛의 장막에 틈이 생겼을 뿐인데 맑고 그윽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맡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하지는 향이었다.

    ‘영약! 경매회의 마지막 물품으로 영약이!’

    마지막을 장식할 경매품은 이전 보물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영약류라면 누구나 필요했기 때문에 다들 기대하고 있었다.

    호옥쌍의 고운 손이 결계 틈에서 손바닥만 한 은색 발우를 꺼내들었다. 그윽한 향기는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들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 하실 줄로 압니다. 그럼 바로 보여드리지요!”

    호옥쌍은 미소를 지으며 발우를 허공에 띄우고 법결을 던져 넣었다.

    팟! 팟!

    놀라운 광채가 터져 나오자 발우가 투명하게 변해 내용물이 드러났다. 이에 수사들의 탄성으로 광장 안이 가득 채워졌다.

    투명하게 변한 발우 안에서 찰랑이는 액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 오조(五爪) 금룡(金龍)이 헤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크기의 금룡이었지만 비늘이 뚜렷하고 입가의 네 줄기 수염까지 생생했다. 마치 전설 속의 진령 천룡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천룡의 후예! 다, 당신들 미친 것 아닙니까! 감히 천룡의 후예를 잡아 경매회에 내놓을 생각을 하다니!”

    “용족 일맥의 진령들이 찾아오면 풍원대륙……. 아니, 아니지. 영계 전체가 큰 화를 면치 못할 겁니다. 장난이라면 그만 두시지요!”

    “제 기억에 다른 계면에서 천룡의 직계 후손을 납치해간 일이 있었는데 결국 작은 계면 하나가 용족들의 손에 짓밟혔다고 합니다. 비교적 큰 계면이라도 용족들이 보복하려들면 원기를 크게 상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이족인들이 겁에 질려 발우 속의 작은 금룡을 쳐다보았다. 비옥 안의 대승기 노괴들도 경악했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미부인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가 광장 안의 소란이 점점 더 거세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정숙!”

    이때 무대 모퉁이에 앉은 마른 상맹 장로가 눈을 뜨고 냉랭히 한 마디를 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대청 안 수사들의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이족인들을 진정시켰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상맹의 근거지에 있으며 눈앞에는 대승기 노조들이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 수사,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상맹에서 정말 천룡의 후예를 잡아 왔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허나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그 물건에게서 진룡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천명족 대승기 여인이 먼저 사정을 물었다. 그 상대는 호옥쌍이 아니라 마른 상맹 장로였다.

    “맞습니다. 이런 일은 흐지부지 넘어갈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설명해주셔야 할 일입니다.”

    낯선 목소리의 이족 대승기 수사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호옥쌍이 해명하려는데 마른 상맹 장로가 손을 젓고 나섰다.

    “설명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천룡의 후예라고 생각하시는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자연히 사정을 아실 테니까요.”

    말을 마친 마른 노인은 다시 눈을 감고 더는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다.

    광장 안의 수사들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발우 속의 작은 금룡을 뚫어져라 살폈고 동시에 수많은 의식의 힘들이 날아들었다.

    한립도 눈을 가늘게 뜨고 남색빛을 반짝였다.

    “어, 저건…….”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목신통이나 비슷한 비술을 익힌 대승기 노조들 몇몇이 탄성을 터트렸다.

    “저 금룡은 영물(靈物)이 화형을 해서 만들어진 것이로군요! 그런데 진짜 진룡의 기운을 품고 있다니 기이한 일입니다.”

    “노부도 이제야 영물이 화형을 했다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본체가 무엇인지도 알아내셨습니까?”

    “천룡의 모양으로 화형 할 수 있는 영물이라면 본체도 만만치 않은 내력을 지녔을 테지요!”

    몇몇 비옥 사이에서 빠르게 말이 오갔다.

    “제가 무언가를 보긴 했는데 영물의 본체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턱을 쓸어내리며 차분히 한 마디 했다.

    “오, 괜찮으시면 한 번 말씀해 보시지요.”

    부유족 노인이 그 말을 듣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시종일관 정체를 알 수 없어 궁금했는데 다른 대승기 무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발우 속 영물의 진면목을 봤다니 더욱 관심이 갔던 것이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금룡의 원형은 피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뭐라고요? 피 한 방울?”

    “그럴 리가요. 어찌 피 한 방울이 화형을 해 천룡의 모습을 갖출 수 있단 소립니까.”

    “설마 천룡 진혈?”

    “아닙니다, 천룡 진혈을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절대 저렇지 않았습니다.”

    대승기 수사들 사이에서 이론이 분분했다.

    광장의 평범한 이족 수사들은 웅성웅성 거리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호옥쌍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한립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다들 논쟁할 필요가 있습니까? 보물의 원형이 무엇인지는 호 수사가 알아서 설명해줄 것인데요.”

    “하긴 상맹이 경매물로 내놓았으니 어찌 되었든 정체를 밝혀야 할 겁니다. 호 수사,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어서 알려주게.”

    그의 조언에 다른 대승기 노조가 얼른 동조했다.

    “제가 감히 시간을 끌겠습니까. 그저 너무 열심히 의견을 나누시어 끼어 들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호옥쌍이 쓴웃음을 지으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알았으니 어서 말해보게.”

    “예, 조금 전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이 화형 영물의 본체는 한 방울의 피입니다.”

    호옥쌍은 하얀빛을 발하는 손바닥으로 발우를 쳤다.

    펑!

    발우가 흔들리고 맑은 향기가 몇 배로 그윽해 지더니 금룡이 몸을 말고 정말 한 방울의 금색 액체로 변했다. 광택이 도는 액체로 변해 서서히 회전하자 굉장히 신비로웠다.

    “천룡 진혈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혁련상맹에서 천룡 진혈을 경매에 올린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럼 그건 도대체…….”

    “모릅니다. 본 맹이 감정한 결과 이 정혈은 외부에 알려진 어떤 강력한 존재의 피와도 달랐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어떤 강력한 존재의 정혈도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요.”

    수사들의 물음에 호옥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교할 수 없다니, 천룡의 진혈을 뛰어넘는단 소립니까?”

    “그렇습니다! 여러 수사들과 선배님들도 간단한 시험을 해보시면 정혈에 함유된 역량이 천룡 진혈의 백배 이상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시겠지요?”

    “백배 이상! 그렇다면 그 피의 주인이 천룡보다 백배 이상 강한 존재란 말입니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엄청난 격차가 나는 존재일거라 생각합니다.”

    미부인의 말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상고 진령 천룡보다 백배 이상 강한 존재라면 결코 우리 계면의 생령은 아닐 테고……. 상계의 존재!”

    천명족 대승기 여인이 놀라 말을 흐렸다. 그녀가 지칭한 상계는 선계였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