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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59화 (1,116/2,000)

1359화. 향녀(香女)

*

“뭐라? 또 다른 대승기 수사가 현천문으로 들어왔다고? 알겠다. 본 좌가 사람을 보낼 것이니 너희는 할 일을 하거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이 흑갑 병사의 모습이 어린 석벽을 향해 말했다.

그가 있는 곳은 완전히 봉쇄된 대청 안으로 중간에 우뚝 솟은 석벽과 방석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청 사방 벽에 알록달록한 각종 보석들이 박혀 있었고 흐릿하게 푸른 안개가 껴있어 아주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노인은 곰곰이 생각하다 붉은 기운을 날려 석벽의 흑갑 병사의 모습을 지우고 그 대신 새까만 거대 선박과 그 위에 탄 흐릿한 몇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쉭!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법결을 던져 넣자 화면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한립과 혈혼 등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흠? 어딘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보았더라?”

홍발 노인은 평범한 한립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눈을 반짝이던 노인이 하얀 옥간을 꺼내들었다.

주문을 외고 옥간을 가리키자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어떤 인물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푸른 장포를 입고 뒷짐을 쥔 사내는 한립이었다.

“인족에서 새로 대승기에 이렀다는 수사였어. 실력이 평범한 대승기 수사를 초월한다니 최고급 수준의 접대를 해야겠구나!”

혼잣말을 마친 홍발 노인은 손뼉을 짝짝! 쳤다.

대청 벽에 파동이 일고 자색 궁장을 입고 얼굴에 얇은 천을 두른 여인이 나타나 걸어왔다.

“집사 대인, 분부가 있으십니까.”

“비운, 네가 아이들을 꾸려 한립 수사를 접대하거라. 본 맹의 최고급 귀빈으로 대우해 반드시 본 맹에 호감을 갖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최고급 귀빈이요?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 절대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겠습니다.”

놀란 자색 궁장 여인이 신중히 답했다.

“그래, 네가 나선다면 안심이다. 이미 현천문으로 진입을 했다니 서두르거라. 관련 자료를 가져가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없게 해야할 것이야.”

홍발 노인은 또 다른 옥간을 꺼내 던져주었다.

눈앞의 여인을 꽤 신임하는 듯했다.

자의(紫衣) 여인이 옥간을 받아 흐릿하게 사라지고 홍발 노인이 또 붉은 빛을 뿌렸다.

석벽에 유생 복장의 중년인의 모습이 떠올라 노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집사 대인, 마지막 경매품까지 안전하게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잘했다. 이번 경매품들은 아주 진귀한 데다 몇 개는 본 명의 집사장로들이 점찍어 두었으니 보관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이야. 또한 경매회 진행을 할 인력과 금제진법도 다시 한 번 점검을…….”

처리할 일이 많은지 홍발 노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거대한 문에 진입한 한립은 눈앞이 밝아졌다고 느낀 순간 홀연히 석탑 위로 이동했다.

혈혼과 주과아 화석이 그를 따라 전송이 되었다.

‘이곳은…….’

거탑 주위에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목들이 빼곡하게 서있었고 구불구불한 길 하나만 아주 먼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자 까마득히 먼 곳에 회백색 돌벽이 보이고 종유석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지하세계에 위치해 있었다.

석벽 중간중간에 일정하게 머리통만한 광원체가 박혀 있어 은은한 빛으로 지하세계를 대낮같이 밝혔다.

한립은 의식으로 밀림을 훑고 이곳에도 석탑이 여덟 개 더 있으며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하세계로 통하는 전송진이 흑초봉 빛의 문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더 먼 곳까지 살피려 들다 십여 리 밖에서 무언가에 걸려 의식이 튕겨 나왔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개의치 않고 석탑을 내려가 돌길을 따라 걸어갔다.

혈혼, 주과아 그리고 석화 노조가 그 뒤를 따라가며 연신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걸어가자 길이 꺾이며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복잡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 앞에 녹색 나뭇가지를 덮어 만든 간이 천막에 수십 명의 다양한 이족인들이 앉아 있었다.

각기 다른 외모와 복색을 한 그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운기 조식을 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들 사이를 머리를 세 갈래로 땋은 어린 동자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차와 과실을 대접했다.

복색이 통일된 것이 상맹의 일꾼 같았다.

천막 아래 이족인들 중 상당수가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에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다만 대다수가 한립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수행에 놀라 재빨리 시선을 돌리거나 공경스런 태도를 취했다.

“한 선배님, 이곳이 상맹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곳인가 봅니다. 경매회 참석자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상맹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 하지요.”

“혁련상맹은 일처리가 아주 꼼꼼하구만.”

혈혼의 이야기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천막 안에 기다리는 이들은 합체기 존재 몇 명과 연허급 수사들이었다.

세 명의 동자가 그들을 보고 급히 나와 예를 올리고 무어라 안내를 하려는데 천막 위쪽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와 함께 하얀 옥 원반이 등장했다.

원반 위에 파동이 일고 나타난 것은 나긋나긋한 자태의 자의 여인이었다.

“안내자.”

누군지가 한 말에 천막 안 사람들의 시선이 옥 원반 위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보라색 궁장을 입은 여인은 얇은 천으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누구나 시선이 마주치면 심장이 두근거릴만한 매혹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자의 여인의 시선이 한립에게 닿았다.

“인족의 한 노조님이 맞으신지요? 후배 비운이 명을 받잡아 선배님을 천(天) 자 호 귀빈각으로 안내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비운 선자, 나는 인족에서 온 것이 맞네. 명을 받았다고 했는데 누구의 명을 받아 나온 것인가?”

한립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을 주관하시는 명존 대인의 명입니다. 총집사 대인께서 한 선배님은 신분이 남다른 분이니 최고급 귀빈으로 대우를 하라 명하셨습니다.”

“최고급 대우! 우와, 정말 대승기 노조가 왔습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대승기 노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천막 안 다른 이족인들이 자의 여인의 말을 듣고 웅성거렸다.

“명존 수사? 명 수사의 존함은 들어본 적이 있네. 혁련상맹의 인물일 줄은 몰랐지만. 알겠으니, 길을 안내하게.”

“예, 선배님! 이쪽으로 오르시지요.”

여인이 옥 원반 가장자리로 물러나자 한립 일행이 신형을 날려 그 위로 올라갔다.

우웅!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옥 원반 아래로 빛의 진법이 나타나 모두와 함께 사라졌다.

무표정한 표정의 한립이 휘황찬란하게 꾸며 놓은 대청에 등장했다.

넓은 대청 중앙에는 그가 타고 온 옥 원반과 똑같이 생긴 기물들이 줄지어 쌓여 있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이때 대청에서 기다리던 묘령의 궁장 여인 열두 명이 그를 향해 절을 올렸다.

열여섯 일곱 정도로 보이는 여인들은 머리에 뿔이 있거나 피부가 녹색이라 다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하나 같이 화용월태(花容月態)를 지닌 미인들이었고 향로나 여의, 불진 같은 물건들을 들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어려 보이는 여인들이 전부 원영기 수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본 맹이 특별히 준비한 향녀(香女)들입니다. 어릴 적부터 백여 가지 꽃의 꿀을 복용하며 자라 향기를 품고 있고 이제껏 순결한 몸을 유지해 취하시면 수행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본맹은 최상급 귀빈께서 경매회에 참석해 주시면 향녀들이 모시게 하지요. 자, 어서 와서 인사를 올리거라! 선배님께서 너희의 새로운 주인님이시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설명을 마친 자의 여인이 열두 명의 여인들을 불러 모았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열두 명의 묘령 여인들은 고분고분하기 짝이 없었다.

“향녀? 하하, 귀 맹의 씀씀이가 대단하군. 기왕 준비해 준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 너희는 그만 일어나거라. 과아, 네가 잠시 데리고 있거라.

의미모를 웃음을 흘린 한립이 정말로 향녀들을 거두었다.

“예.”

주과아가 앞으로 나서 답하자 묘령 소녀들이 일어나 그녀의 뒤로 가서 섰다.

“열두 명의 향녀들 외에도 본 맹이 따로 준비한 약소한 선물들이 있습니다. 이것들도 받아주시지요.”

자의 여인이 손뼉을 쳤다.

대청 바깥에서 청수한 이족 소녀 셋이 붉은 천으로 가려진 은색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이미 충분히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이것들은 되었네.”

한립이 세 쟁반을 훑고 손을 저어 거절 의사를 표했다.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다면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먼 길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거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밤은 푹 쉬시지요.”

자의 여인은 미미하게 움찔했지만 똑같이 손을 저어 세 이족 소년들을 물렸다.

“안내를 부탁하지.”

한립이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자의 여인은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대청을 나섰다.

문밖을 나서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청석을 깔아 만든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길 양쪽으로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다.

놀랍게도 지나는 이들의 수행이 다들 비범해서 점포 앞에 선 점원 복장의 수사들조차 결단기 이상이었다.

그들이 대청을 빠져나온 출구는 곧 사라져서 다른 길로 이어졌는데 주변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들은 귀 맹의 경매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람들인가?”

“그럴 리가요. 귀빈분들은 대부분 외빈루(外賓樓)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거의 본맹 수사들입니다. 그저 이번 기회에 평소에 보기 드문 물품을 사고팔려고 나온 것이지요. 본맹 수사들이라도 특별한 자질이 없는 이들은 경매회 참석이 어렵습니다.”

한립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은 자의 여인이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그렇구만.”

한립은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때 자의 여인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발밑에서 하얀 안개를 일으켜 한립 일행을 태우고 질주했다.

“……저곳에서 이번 경매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진작 출품이 된다고 소문난 물건 외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물건 중에 대승기 선배님들께서 만족하실 만한 보물들이 있으니 참석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자의 여인이 골목을 돌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저곳에서 말인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데 내부에 남다른 장치가 되어 있나 보군.”

“과연 알아보시는군요. 저 탑은 동천으로 연결되는 경매회장 입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수사 분들을 수용할 수 있고, 또 누군가 경매회에서 안 좋은 마음을 품고 행동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귀 맹이 이번 경매회를 위해 공을 많이 들인 걸로 보이는데 이번에 대승기 수사들은 몇이나 왔는가?”

“아직 정식으로 경매회가 열리려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결과적으로 몇 분이 참석하실지는 미정입니다만 이미 도착해 계신 분들이 스무 분이 넘습니다.”

숨길 일도 아니라 자의 여인은 착실히 답했다.

“이렇게 얼마 안 되는 시간 만에 동급 수사들을 스무 명 이상 불러 모으고, 귀 맹의 명성이 작지 않구만.”

“하하, 많은 선배님들이 찾아주시는 것은 본 맹이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 때문입니다. 이전 경매회에서 적잖은 수확을 얻으셨기에 이번에도 참석을 해주시는 것이지요.”

“선자가 이번 경매회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알겠네. 허나 나는 대륙간 전송진을 이용하기 위해 온 것일세. 이번에도 관련 경매를 하겠지?”

한립이 차분히 관심에 둔 이야기를 꺼냈다.

“대륙간 전송진 전송 인원에 관한 것은 경매회에서 특별히 다루는 경매품 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쉽게 취소되지 않지요. 그런데 뇌명대륙 쪽에 마련된 대륙간 전송진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 뇌명대륙 전송 정원은 거래되지 않고 혈천대륙 행 인원수를 늘려 경매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자의 여인은 조금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뇌명대륙은 취소되었다고?”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예. 설마 원래 뇌명대륙으로 가시려던 것입니까?”

“뭐, 상관없겠지. 혈천대륙이 남았다면 그리로 가면 되는 일이긴 하네. 어차피 한 번은 다녀오려 했으니까 말이야. 그저 원래 세운 일정을 조정해야겠구만.”

한립은 턱을 쓸며 별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뒤따르던 주과아, 혈혼, 화석노조는 깜짝 놀라 각기 다른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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