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7화. 요구
*
콰르릉!
황원자는 살아남기 위해 정혈까지 열댓 모금을 뱉어 목숨을 건 비술을 펼치려 했으나 거대 손의 태산과 같은 압력에 짓눌려 핏덩이가 되고 말았다.
핏물 속에서 노란빛이 금제의 구속을 피해 날아올랐다. 팔뚝 크기의 황포 소인은 황원자의 원영이었다.
신유만리 신통을 대성한 원영이었기에 금제의 위력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는 삼전도인이 자신을 버리고 홀로 달아난 것에 쌍욕을 하며 작은 손으로 연달아 수결을 맺어 연속해서 순간이동을 했다.
멀리서 삼두육비의 거원이 여섯 개의 눈으로 서늘하게 그것을 바라보다 들고 있던 암녹색 목검을 살짝 흔들었다.
쉭!
녹색 초승달 모양의 검빛이 번득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황포 소인 인근에 파동이 일고 초승달 검빛이 등장했다.
잠시 후 처절한 비명이 들리고 원영의 살점이 산산조각 나 허공에서 떠올랐다.
펑!
새빨간 불구슬이 적시에 날아들어 살점들을 완전히 태워버렸다.
“드디어 끝났군! 구환여의문이 조금 까다로웠지만 그 정도는 문제없지. 삼전수사란 자는 빨리 내뺀 덕에 목숨을 부지하는구나.”
삼두육비의 거원이 신속하게 몸을 줄여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립은 삼전도인이 달아난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쉬익!
그가 손짓하자 어디선가 하얀 저물탁이 날아들었다.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십 리 떨어진 작은 산 어귀에 뼛조각과 살점이 쌓여 작은 언덕을 이루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냇물처럼 흘러 내렸다.
그 위로 서금충왕이 변한 소인이 떠서 털이 북슬북슬한 머리를 쥐고 있었는데 바로 잘라낸 불멸천존의 머리통이었다.
불멸체를 지닌 불멸천존이었지만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당한 것이다.
“금동, 돌아오거라.”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서금충왕을 불러들였다. 소인은 부름을 받고 몸을 돌리자마자 쉭 하고 사라졌다가 한립 옆에서 나타났다.
“잘했다! 불멸체의 회복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단 머리를 베고 나면 회복 속도가 급감하기 마련이지. 원영만 몸 밖으로 유인해 내면 죽이는 것은 더 간단해지겠고. 보아하니 가르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이길 방법을 아는 것 같구나.”
한립은 소인이 들고 있는 머리통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인은 시종일관 무표정했지만 그를 향해 몸을 굽혀 인사하고 들고 있던 머리통과 검은 저물탁 하나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한립이 둘 다 끌어와 머리통은 금색 뇌전으로 없애고 검은 저물탁은 거둬들였다.
“혹시 모르니 달아난 자가 인근에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다녀 보거라. 마주치면 처리하고.”
한립이 잠시 고민하다 소인을 향해 명했다. 이에 자금색 소인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삼전도인이 달아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모든 일이 일단락되자 한립은 불멸천존의 잔해가 만들어낸 혈육(血肉)의 산을 불태우고 산골짜기 쪽을 살폈다. 아직까지도 진법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황원자, 삼전도인, 불멸천존과의 싸움을 연려가 모를 리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파앗!
한립은 손끝에서 주술문자들을 불러내 푸른빛의 거울을 만들어냈다. 거울 표면에 금색 부적을 흡수시키자 웅! 하고 아담한 체구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려는 골짜기 밖의 상황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연 수사, 원요와 수사의 사부께서는 안녕하신가?”
한립은 거울에 대고 차분히 물었다.
“……스승님과 원요는 무사하십니다. 아직 남은 천겁을 치르고 있지요. 한 형, 대승기 경지에 이르신 것입니까?”
한립의 말에 겨우 이성을 되찾은 연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승기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면 조금 전 그 자들을 쫓아 보내지도 못했을 걸세. 청원자 수사의 도겁이 끝나지 않았다니 나는 여기서 더 기다려야겠군.”
그녀의 질문에 한립은 담담히 답하고는 소매를 털었다. 그러자 괴이한 파동이 스치고 푸른 거울이 깨져 주술문자로 돌아갔다.
한립은 몸을 돌려 가까운 산을 찾아 깨끗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자신과 청원자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고 원요와의 인연까지 생각하면 퍽 관계가 깊었지만 절대 서로 목숨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골짜기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곧 작은 산에서 전음부 한 장이 날아올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끝에서 파공음이 들리고 새까만 거대 선박이 다가왔다.
* * *
진법 안, 연려가 원반 모양의 법기 위에 앉아 청동 거울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 후로 3일이 더 흐르고 산골짜기에 경천동지할 굉음이 퍼지고 먹구름이 걷혔다. 청원자의 맑은 포효소리 속에 환희가 가득했다.
“도겁을 축하드립니다, 청원자 수사.”
바위에 앉아있던 한립이 조용히 눈을 뜨고 축하 인사를 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렸다.
“허허, 한 수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도겁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노부 역시 수사의 대승기 진급을 축하합니다.”
청원자가 포효를 멈추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천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어도 골짜기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수사께서 미리 대비해 놓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막 도겁을 마쳐 원기를 회복하셔야 하니 제가 며칠간 이곳에서 호법을 서지요.”
“수사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틀 후에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요.”
막 천겁을 치른 그는 확실히 영단을 복용하고 원기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립이 골짜기 쪽에서 고개를 돌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를 쳐다보다가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눈을 감았다.
스슷.
동시에 그가 쳐다보던 산봉우리의 거목 아래에서 금포를 입고 관을 쓴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한립도 만나본 적이 있는 중년인은 명하의 땅의 또 다른 대승기 수사 금염후였다.
그런 그가 청원자가 도겁하는 곳에 줄곧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은 좋지 못한 뜻을 품고 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금염후는 멀리 한립이 있는 쪽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고 사라져 버렸다. 한립과 서금충왕이 동급 수사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을 목격하고 마음을 접은 것이다.
게다가 방금 한립이 이쪽을 쳐다볼 때 어찌나 가슴이 뛰고 긴장이 되던지 잠시도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아졌다.
금염후는 만리 밖 허공에 나타나 자신의 동부로 날아갔다.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합체기에도 이르지 못했던 녀석이 본 왕과 동급 존재가 되어 나타날 줄이야. 그 자금색 소인은 정체가 또 무엇인지…….”
그는 서둘러 돌아가면서도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 * *
이틀 후, 고풍스런 대청 안에서 청원자가 한립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안색이 좀 창백하고 기운이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정신은 더없이 맑아보였다.
원요와 연려가 청원자 뒤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한립과 그 뒤에선 혈혼, 주과아를 힐끔거렸다.
다행히 원요는 청원자의 도겁을 돕고도 반서를 당하지 않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립이 대승기 수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요를 본 한립은 그를 보고 놀라워하던 귀여운 모습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수사의 자질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지금의 경지에 이를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게다가 노부와 비슷한 수준의 강적들까지 격살하였고요. 허허, 보아하니 노부가 수사를 너무 낮게 평가했던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제 자질은 그리 뛰어나지 않으나 마계에 다녀오며 얻은 기연으로 겨우 대승기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청 수사야 말로 도겁에 성공하셨고 이후 수행이 더 높아지면 선계로 비승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한립은 평온히 고개를 저었다.
“비범한 사람에게 비범한 인연이 따르는 법입니다. 적어도 수사께서 마계로 가는 위험을 무릅썼기에 지금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게지요. 노부야 도겁을 해서 간신히 얼마간 더 살게 되었지만 어찌 감히 비승선계를 노리겠습니까. 젊은 한 수사야 말로 앞으로 앞날이 창창할 것입니다.”
청원자가 손을 휘저었다.
“하하, 선계로의 비승은 제게는 아직 요원한 일입니다. 수만 년의 고된 수련없이 어찌 그런 꿈을 꿀 수 있겠습니까.”
“수만 년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금방이 아닙니까. 허나 한 수사가 진정으로 선계에 뜻이 있다면 미리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립의 겸손한 태도에 청원자가 숙연히 당부했다.
“뭔가 알고 계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노부가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아무 것도 모를 수가 없지요. 그밖에도 만일의 상황을 생각해 대천겁도 미리 대책을 세워두어야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노부가 관련 깨달음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수사의 가르침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립과 청원자는 문답을 하며 비승선계와 대천겁에 관한 깨달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반나절 간 이어졌고, 잠시도 끊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립이 원요를 훑고 갑작스레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이번에 찾아온 것은 사실 원요와 연려 수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수사께서 천겁도 무사히 치르셨고 두 선자도 인족의 몸을 회복하였으니 제가 인족으로 데려가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한 형, 요아는 제 양녀이고 연려는 직전제자입니다. 스스로 떠나고 싶어 한다면 언제든 허락할 것입니다. 허나 이곳에 조금 머무는 것이 인족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되는 군요.”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까?”
청원자의 말을 듣고 한립이 의외라는 듯 원요와 연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들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요아, 네가 직접 설명을 하는 것이 좋겠구나. 한 수사께서 오해하시는 일이 없게 말이야. 물론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청원자는 진지하게 원요를 쳐다보았다.
“한 형, 저희는 바로 인족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적어도 의부님 곁에서 2, 3백년은 남아 있어야 해서요. 그 이유는 직접 저희 자매의 육신을 점검해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원요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육신을?”
이상하단 얼굴을 한 한립이 무형의 의식의 힘을 방출해 원요의 몸을 감쌌다.
금방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육신이 이렇게 불안정 하다니 사람의 몸으로 돌아올 때 후환이 뒤따랐던 것이냐?”
“스승님께서 특수한 단약을 제련해 저희의 몸을 되돌려 주셨지만 저희가 반인반귀(半人半鬼)로 살아온 세월이 상당히 길지 않습니까? 명하의 땅의 특수한 영물 두 가지를 이용해 오랫동안 보양을 해주어야 지금의 육신을 안정화 시킬 수 있다 합니다. 당장 이곳을 떠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테고요.”
연려가 자세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지금 떠나서는 안 되겠군.”
한립도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형, 안심하시지요. 요아와 연려는 노부가 이번 천겁을 무사히 마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안 그래도 도겁 후에 강력한 신통 몇 가지를 전수해 주려 했고요. 제 곁에서 몇 백 년 더 머문다면 얻는 것도 많을 테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후 우리와 같은 경지에 이를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청원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의부님, 그게 정말이십니까? 연려 사저와 제가 정말 대승기에 이를 날이 올까요?”
듣고 있던 원요가 기뻐하며 물었다.
연려도 가슴이 뛰어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허허, 다른 이들은 몰라도 네 녀석들은 기회가 없지는 않을 게다. 노부가 정성을 다해 지도를 해주는 것은 물론 한 수사와도 인연이 있지 않더냐? 다른 평범한 수사들은 평생토록 얻지 못할 기연들이지. 한 수사, 안 그렇습니까?”
청원자가 능청스레 한립에게 눈짓을 했다.
“무슨 말을 하시나 했더니 다 제게 떠넘기려 하십니다. 허나 원요와 연려 선자가 진정으로 대승기 경지에 도전하는 날이 온다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해줄 것입니다.”
빙긋 웃은 한립이 기꺼이 약조했다.
원요의 아름다운 눈에 묘한 감정이 어렸고 연려도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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