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5화. 곡외대전(谷外大戰) (1)
*
“자모시음뢰 한 알로는 지금 당장 금제를 깨기에는 무립니다!”
삼전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한 알이랍니까?”
황원자는 손을 펼쳐 엄지손톱 크기의 구슬 세 개를 내놓았다. 핏빛 실금이 간 회백색 구슬은 무척 괴이한 기운을 풍겼다.
“세 알이나! 정말 이번 일을 위해 아낌없이 준비해오셨습니다.”
삼전도인도 이번에는 기함했다.
“어서 시작합니다. 불멸 수사께서 상대의 비술을 알아챘으니 그 자가 당장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하,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모시음뢰 세 알이면 남은 금제쯤이야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황원자가 재촉하는데도 삼전도인은 미소를 지었다. 청년 도사의 입에서 각기 다른 색의 영패 세 개가 빠져나와 커다랗게 불어났다.
쉬쉬쉭!
수결을 맺자 등 뒤의 거대 구렁이 머리들이 입을 벌려 각기 다른 색의 빛을 분출해 영패에 흡수시켰다.
세 개의 거대 영패가 몸을 떨고 수많은 주술문자를 뿜어냈다.
주술문자들은 허공에서 뭉쳐져 수많은 깃발로 변했고 희미하게 법칙의 힘을 발산했다. 이에 패루 위에 있던 황원자가 회백색 구슬 중 하나를 힘껏 던졌다.
* * *
제3요목을 거둔 한립은 금이 간 푸른 구슬을 보고 서늘하게 눈을 번득였다
“이렇게 멀리서 내 존재를 알아채다니 평범한 대승기 수사는 아니군. 이번 일격으로 판단하건데 수라주 족모보다는 수행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말이야.”
한립은 금색 부적을 꺼내 어딘가로 날리고 무언가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파앗!
그 앞에 금색 화염이 화르륵 타오르며 놀란 여인의 목소리를 뿜어냈다.
“하, 한 형이십니까?”
“연 선자. 어찌 이 전신부를 자네가 지니고 있는 것이지? 내 떠나기 전 원요에게 주었건만.”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한립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정말 한 형이시군요! 아, 어서 이곳에서 달아나셔야 합니다! 스승님께서는 지금 천겁을 치르는 중이신데 강적 세 명이 쳐들어와 골짜기 바깥의 진법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한 형이라도 대승기 수사들의 싸움에 말려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거예요. 이 전신부는 원요가 맡겨둔 것입니다. 원요는 지금 스승님께서 천겁을 치르는 것을 돕고 있거든요.”
반가워하던 연려가 조급히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정말 청원자 수사가 도겁 중이었다니, 그렇다면 떠날 것이 아니라…….”
쿠쿠쿠쿠쿵!
한립이 설명하기 전에 전방의 산골짜기 방향에서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려왔다. 세 개의 하얀 태양이 떠올라 잿빛 기운의 파동을 도처로 내뿜었다.
태양 주변에는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 깃발들이 잔뜩 맴돌며 빛의 실들을 빼곡하게 분출했다.
빛의 실들은 흉측한 얼굴의 거대 악귀 허상들을 하나씩 꿰뚫어 재로 만들었다.
악귀 허상들이 숨어 있던 핏빛 운해도 흩어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십팔천살진이 이렇게 빨리!”
연려의 목소리가 떨려왔지만 기운의 파동에 영향을 받은 듯 금빛 화염이 위태롭게 출렁이다 터져버렸다.
자연히 연려의 말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립은 산골짜기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곧장 허공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푸른 빛줄기는 열댓 번을 번득이며 이동해 산골짜기 인근에 이르렀다.
한립은 고공에서 모습을 드러내 하얀 태양이 사라지고 작열하는 열기만 남은 공터를 훑었다. 그러자 황원자, 청년 도사, 거한이 패루 위에 떠서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청원자를 돕기 위해 온 것입니까?”
황원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하, 보아하니 세 분은 청원자 수사가 천겁이 도래한 틈을 타 원한을 해결하러 여기까지 오셨나 봅니다.”
한립은 상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담담히 미소 지었다.
“흥,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청원자 그놈이 불러들인 것이 맞는지 물었습니다!”
황원자가 얼굴을 굳히며 코웃음을 쳤다.
“뭐, 도움을 주려고 온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친분은 있는 사이입니다. 기왕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았으니 도울 수밖에요! 세 분이 제 체면을 보아 오늘 그냥 물러나 주신다면 가장 좋겠지만 말입니다.”
“체면을 봐서 물러나 달라? 본인이 뭐 대단한 인물인 줄 아나본데, 나는 청원자에게 피맺힌 원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든 오늘 내 앞길을 막는다면 참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아두시오.”
“당신과 청원자가 무슨 사이인지는 관심 없습니다. 수사께서도 그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제가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요.”
상대의 협박어린 어조에도 한립은 담담히 말했다.
“혼자서 우리 셋을 동시에 상대하겠단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권하니 이 일에서 빠지시지요.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셋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봐야 알 일입니다. 이 일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또 어쩔 수 없겠지요?”
황원자가 무어라 협박하든 한립은 느긋하게 답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죽거라!”
참다 못한 황원자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후웅!
한립의 등 뒤에서 별안간 포효소리가 들리고 파동과 함께 검은 주먹이 튀어나왔다. 주먹은 전광석화처럼 빨라 이미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한립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한 팔을 기이한 각도로 꺾어 금색 손바닥으로 검은 주먹을 쳐냈다.
쾅!
하늘과 땅이 울리더니 금색과 검은색 기운이 터져나가며 주변 공간이 왜곡되었다.
한립은 여전히 꼿꼿이 제자리에 서있었지만 등 뒤에 나타난 거구는 연달아 열댓 걸음을 밀려나 비틀거렸다.
놀란 눈길로 한립을 쳐다보고 있는 거한은 불멸천존이었다. 이에 황원자 옆에 서있던 불멸천존이 검은 빛 입자로 흩날렸다.
그는 한립이 도착하기 전부터 은신술을 펼쳐 숨어 있었고 그의 자리에 있던 것은 괴뢰 화신이었던 것이다.
황원자, 삼전도인은 크게 놀랐다. 불멸천존은 괴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한립이 맨몸으로 그의 일격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공격!”
황원자는 한립의 눈빛이 가라앉은 것을 보고 먼저 손을 뻗었다.
쉬쉬쉬쉭!
수많은 노란 실들이 그의 몸을 빠져나가 한립에게 쇄도했다. 곁의 산전도인도 묵묵히 수결을 맺고 손을 뻗었다.
파앗.
청년도사의 머리 위로 파동이 일고 각기 다른 색깔의 구렁이 허상들이 나타났다 푸른 연기로 소실되었다.
다음 순간, 한립의 머리 위로 구렁이 머리들이 나타나 시뻘건 입을 벌려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이빨이 닿기도 전에 독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에 거한도 검은 기운을 일으켜 동산 만하게 커졌다.
휘잉!
거인은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을 번쩍 들어 한립을 찍어 누르려 했다.
커다란 발은 표면에 금색 문양들이 가득했고 천지를 멸할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멸천존의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세 대승기 수사가 즉시 협공에 들어간 것이다. 일격에 한립에게 중상을 입혀 물러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렇게 나온다면야…….’
이때 한립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손을 펼치자 회색 기운이 보호막을 이루었고, 주문을 외거나 수결을 맺지도 않았는데 등 뒤로 삼두육비의 거대 허상이 떠올랐다.
몸을 홱 돌린 삼두육비 허상은 여섯 개의 팔을 휘둘러 거대 발과 구렁이들의 입을 향해 주먹 허상들을 날려 보냈다.
투투투투툭!
황원자가 날린 가느다란 실들이 회색 보호막에 꽂히는 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날카로운 실들은 보호막을 파고 들었지만 겨우 손바닥만큼 들어가고 멈추었다.
한립은 속으로 법결을 맺어 회색 보호막에 기이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가느다란 실들이 부르르 떨더니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콰콰쾅!
거센 파도처럼 몰려든 금색 주먹 허상들이 거대 구렁이들이 뿜은 세 종류의 광채들과 충돌했다. 막대한 힘을 지닌 주먹 허상들에 광채들이 강제로 흩어졌다.
거인의 시커먼 발은 주먹 허상들이 마구 두들기는 대로 극심하게 떨뿐 여전히 주술문자를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의 등 뒤에 있던 거대 법상이 흐릿하게 사라져 불멸천존이 변한 거인 뒤에서 그에 못지않은 크기의 금빛의 범성금신으로 나타났다.
무표정한 얼굴의 금신은 두 팔을 괴이하게 움직여 거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뭐야!’
화들짝 놀란 불멸천존이 어깨를 털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금신의 두 손바닥에서 화려한 자금색 화염이 일어나 엄청난 힘을 쏟아냈다.
불멸천존은 몸이 묵직해지며 찰나의 순간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틈에 범성금신의 나머지 네 팔이 주먹을 불끈 쥐고 거인의 가슴을 가격하려 했다.
“크악!”
거인은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몸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와 암녹색 갑옷으로 변해 전신을 가렸고 머리 위에 난 두 개의 굽은 뿔은 칼날처럼 두 팔을 노렸다.
퍼펑!
그러나 자금색 주먹이 굽은 뿔을 쳐내고 남은 두 주먹이 기척도 없이 거인의 앞가슴을 노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한립은 범성진마공을 극성까지 익혔고 다른 여러 비술로 범성금신을 강화했기 때문에 평범한 대승기 수사는 절대 버틸 수 없는 공격이었다.
가슴이 뜨끈해진 불멸천존은 암녹색 갑옷이 움푹 들어가 깨지고 강력한 힘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져 날아갔다.
쿠쿵!
아래쪽 땅이 크게 흔들렸다. 불멸천존이 변한 거인은 땅 속 깊숙이 파묻혀 몸 절반이 흙더미 속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그러나 한립은 멈추지 않고 연이어 손에서 푸른 장검을 불러내 휘둘렀다. 푸른 검기들이 모여 검산(劍山)을 이루어 날아갔다.
불멸천존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막 금신에 공격당하고 전신의 기운이 엉망이 되어 피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입에서 새까만 방패를 분출해 보호막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치치치칙!
평범해 보이는 보호막은 뜻밖에도 한립이 방출한 푸른 검기의 위력을 대부분 막아냈다. 그저 다른 검기들보다 날카로운 몇 개만이 보호막을 가르고 거인의 몸을 베었을 뿐이었다.
거인의 몸에 기다란 칼자국들이 여럿 남았다. 그러나 괴이한 일은 이제부터였다.
중상을 입은 불멸천존이 낮게 포효하자 상처에서 핏빛 실들이 흘러나와 육체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불멸체.”
한립은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들고 있던 장검을 다시 한 번 휘두르려 했다. 그런데 주위의 공기가 묵직해지고 커다란 깃발들이 나타나 그를 중심으로 작은 진법을 이루었다.
웅웅웅!
모든 깃발들이 진동하며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들을 토해냈다. 한립은 여러 금제들에 겹겹이 둘러싸여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시선을 돌리니 청년 도사가 수결을 맺고 거대 영패 세 개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옆의 황포인은 붉은 수정 고리를 꺼내 언제든 공격할 수 있게 술법을 준비하는 듯했다.
한립이 얼굴을 굳히자 수중의 푸른 장검과 커다란 범성금신이 동시에 사라졌다.
크아아앙!
그는 짐승의 포효소리를 내며 금색 주술문자로 둘러싸여 거대한 금털 원숭이로 변했다. 거원은 두 팔을 휘둘러 강력한 힘을 발산했다.
이에 대부분의 금제가 괴력에 무너지고 진법을 형성하던 깃발들은 부들부들 떨었고 일부는 그 자리에서 꺾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삼전도인은 안색이 달라져 수결을 바꾸며 날카롭게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한립의 지척에서 파동이 일고 손가락 굵기의 각기 다른 색 뱀 세 마리가 나타나 달려들었다.
거원이 눈을 부릅뜨고 세 손가락으로 뱀들을 튕겨냈다.
텅! 텅! 텅!
세 마리의 뱀들 중 두 마리가 벼락에 맞은 것처럼 죽 뻗어 날아갔다. 마지막 적홍색 뱀만이 교묘하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흐릿하게 이동해 거원의 손끝을 깨물었다.
“…….”
거원이 콧김을 내뿜으며 작은 뱀을 잡아떼 힘껏 으깨 터트려 버렸다.
‘그렇지!’
그러나 삼전도인은 희희낙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