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53화 (1,110/2,000)
  • 1353화. 청원자의 겁

    *

    일다경 후에는 700여 개의 금빛이 쌓여 있었다. 법력이 농후한 한립도 이렇게 많은 천지금력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쉬익!

    그가 돌연 소매를 펄럭여 은빛을 쏘아 보내자 집채만 한 은빛이 먹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월륭이 준 또 다른 보물인 세 구슬 중 하나였다.

    그때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먹구름 속에서 둔탁한 폭음이 울리고 은빛 광채가 먹구름을 감싸더니 광채가 사라지고 먹구름 속의 금빛도 자취를 감추었다.

    은색 구슬은 천지금력과 상극인 보물이었다. 이렇게 압력을 줄이며 한립은 새로 떨어져 내리는 금빛들을 막았다.

    월륭은 한립이 은색 구슬을 사용하자 도리어 기뻐했다.

    지금에서야 첫 번째 구슬을 사용한 것은 기대 이상의 성과였기 때문이었다. 한립의 법력은 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후했다.

    ‘든든한 조력자가 있으니 이번 극원정 제련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월륭은 굳게 결심하며 제련에 집중하는 동안 한립은 힐끗 솥 안을 살피고 금속 속성 극원정이 몇 개가 만들어지는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 * *

    두 달 후, 지연의 신비 공간 속 산골짜기.

    아름다운 백의 여인 둘이 새까만 거목 아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아담한 체구에 표정이 다채로웠고, 다른 한 명은 큰 키에 고혹적인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산골짜리를 중심으로 비취색 거목을 쌓아올려 총 7층의 단이 세워져 있었다. 각 층마다 십여 개의 법기가 놓여 있었고 단 꼭대기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꽂혀 현묘한 진법을 형성했다.

    깃발들 가운데에는 커다란 은색 방석이 깔려 있었다. 또 거대 탑 근처에 재질이 다른 조각상들이 널려 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한 것도, 짐승의 모습을 한 것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생생해서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했다. 천여 개의 석상들은 전부 거대 단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리고 다채로운 빛깔의 벽돌이 깔린 산골짜기는 흐릿한 빛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사저, 의부님께서는 이번 천겁을 오래 준비하셔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요 며칠 심기가 불편하신 것일까?”

    수려한 여인이 7층 단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스승님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어. 그래도 추측을 해보자면 혹시라도 천겁에 실패하실까 걱정돼서 그러시는 것은 아닐까? 오랜 세월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아담한 여인이 담담히 답했다.

    “하긴 대천겁은 나날이 강해지고 선계로 비승하기 전까지는 평생 거머리처럼 따라다니니까. 의부님처럼 여러 차례 도겁을 해 오신 분이 겪어야할 대천겁이 얼마나 무서울 지 상상도 되지 않아! 이번에도 의부님께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 무슨 일이 있든 끝까지 의부님을 도울 거야.”

    “원요, 네가 그간 합체기 경지에 이른 것도 스승님의 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잖아. 난 천음지체를 지니지 못해 스승님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야.”

    두 명의 백의 여인은 청원자 문하로 들어간 원요와 연려였다. 특히 원요는 진작 청원자를 의부로 모시고 이미 합체 초기의 경지에 이르렀고 연려도 자질이 나쁘지 않아 연허 후기의 경지에 올랐다.

    오늘이 바로 청원자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대천겁을 치르는 날이었다.

    그동안 청원자는 각종 비술로 고되게 천겁이 도래하는 날을 미뤄왔고 심혈을 기울여 원요의 수행을 합체기까지 끌어올렸다. 원요가 희귀한 신통을 발휘해 그의 천겁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원요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청원자가 비술을 이용해 반인반귀(半人半鬼)의 몸인 그녀와 연려를 사람으로 되돌려 주었고 의부 덕에 단시간 내에 합체기 경지에 이를 수 있었기에 공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이 산골짜기는 바로 청원자가 택한 도겁 장소였다. 도겁을 도울 여러 방법들을 모아놓았고 주변으로 백여 개의 강력한 금제를 펼쳐 놓아 누군가 해를 끼칠 것에 대비했다.

    지금 청원자는 골짜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임시 동부에서 향을 피워놓고 무사히 도겁을 이겨내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반나절이 지나 잿빛 구름이 몰려들고 산골짜기 주변으로 괴이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의부님을 뵙습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원요와 연려가 숙연히 인사를 했다.

    “이번 천겁은 요아가 도와줘야겠다. 그리고 연려 너는 이곳 주위를 경계하거라.”

    푸른빛이 가시고 나타난 회색 장포 노인이 두 여인에게 명을 내렸다.

    “예!”

    “존명!”

    원요와 연려의 공손한 대답에 청원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푸른 기운으로 원요를 감싸고 홀연히 사라졌다. 곧 거대 단 꼭대기에 파동이 일고 청원자와 원요가 나타났다.

    “요아, 너는 이곳에 있다가 내가 나서라고 하면 나서면 된다. 절대 먼저 나서서는 안 될 것이야.”

    “안심하세요, 의부님. 일러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허허, 내 너를 곁에 두니 든든하구나. 천겁의 위력에 휘말리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거라.”

    청원자가 웃으며 당부하자 원요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산골짜기에서 멀리 떨어진 돌무지 위로 돌풍이 일고 기다란 손톱이 달린 거대 손 두 개가 나타나 허공을 갈랐다.

    쫘악!

    허공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거대한 신형과 두 개의 빛줄기가 빠져나왔다. 빛이 걷히고 둔광 속에서 청년 도사와 앙상한 황포 사내가 나타났다.

    검은 빛을 발산하는 거대한 신형은 머리에 굽은 뿔이 달리고 등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자라난 새까만 거인이었다.

    얼굴은 평범한 인간 사내와 비슷했지만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불멸 수사가 변신한 몸으로 공간을 찢어준 덕분에 쉽게 진입했습니다.”

    황포 사내가 웃는 낯으로 거인에게 말을 붙였다.

    “황 형께서 구환여의문으로 공간 계면의 힘을 줄여주셔서 가능했던 일이지요.”

    거인은 미소 지으며 검은빛 속에서 줄어들어 팔척장신의 거한으로 변했다.

    “서로 얼굴에 금칠해 주는 것은 그만하시지요. 빈도는 헛소리나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니 어서 처리할 이나 찾읍시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청년 도사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냉랭히 끼어들었다. 수직으로 곧게 선 노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급할 것 없습니다, 삼전 수사. 청원자의 천겁이 시작되면 하루 이틀 내로는 끝나지 않을 터이니 느긋하게 가도 충분합니다.”

    황포 사내가 차분히 답했다. 황포 사내는 황원자였고 다른 두 명은 그가 불러들인 ‘불멸천존’과 ‘삼전도인’이었다.

    “도겁 시간과 장소까지 알아내고 청원자를 처리하기 위해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셨나 봅니다.”

    청년 도사가 황원자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물론이지요! 청원자는 본래 우리 장원족(長元族)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이종족의 원신이 저와 직계 혈족인 형님의 몸을 빼앗아 지금의 경지에 이른 것이란 말입니다. 족형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기에 원한을 잊지 않고 끝까지 복수하리라 다짐하며 성과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언젠가 족형의 육신을 되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황원자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그런 원한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으하하, 본 좌가 그 자에게 인과응보가 무엇인지 알려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지요!”

    거한이 입을 쩍 벌리고 크게 웃었다.

    “당신과 청원자의 은원은 제가 알 바 아닙니다. 대가를 받은 만큼만 도울 것이니 정말 청원자를 죽일 수 있을지 없을 지는 스스로의 능력에 달렸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삼전도인은 사정을 듣고도 흔들림 없이 선을 그었다.

    “제가 삼전 형을 모셔 온 것은 수사께서 진법에 대해 조예가 깊어서입니다. 진법대사인 수사가 제가 빌려온 구환여의문의 도움을 받으면 청원자가 펼쳐둔 금제들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도 그러기를 바라지요. 듣자니 청원자란 자도 진법에 정통하다던데 도겁을 대비해 만만치 않은 금제를 펼쳐 놓지 않았겠습니까.”

    “허허, 저는 그저 삼전 형만 믿고 있겠습니다. 자, 가실까요. 이번에야 말로 저와 청원자 중 단 한 사람만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황원자가 둔광을 일으켜 출발하자 시선을 마주친 불멸천존과 삼전도인이 그 뒤를 쫓았다.

    * * *

    산골짜기 안에서는 청원자가 이미 단 위에 떠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를 수십 자루의 푸른 비검들이 맴돌았다.

    아래로는 백여 개의 깃발들이 영롱한 오색 기운을 머금고 주술문자들을 분출했다.

    웅웅!

    드디어 단마다 놓인 법기들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원요가 긴장한 얼굴로 어느 커다란 깃발 아래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고공에는 붉은 구름이 가득했고 시커먼 바람이 허공을 찢을 듯 흉흉한 기세로 불어대고 있었다.

    두꺼운 붉은 구름은 하늘을 거의 가렸고 그 안에서 열기가 감지되었다.

    콰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 속에서 열기를 머금은 빛구슬들이 응결되어 비처럼 쏟아졌다. 동시에 눈을 번쩍 뜬 청원자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쉭!

    기다란 푸른 검기가 빠져나와 보호막을 형성해 단 전체를 감싸 안았다. 반짝이는 붉은 빛구슬이 보호막에 부딪쳐 쾅쾅 폭발하고 불씨가 사방으로 튀었다.

    붉은 빛구슬들은 천겁의 시작에 불과했다.

    만여 개의 빛구슬을 떨군 하늘은 천둥소리와 함께 자금색 뇌전을 만들어냈다. 시커먼 바람도 응결해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어 투명한 바람의 칼날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와라!”

    청원자는 겁먹은 기색 없이 크게 기합을 넣고 눈부신 푸른빛을 터트렸다. 푸른 보호막이 거산 크기의 장검으로 변했다가 꿈틀꿈틀 거대한 교룡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교룡의 날카로운 발톱이 하늘을 할퀴고 파공음이 들려왔다.

    채채채챙!

    검기들이 교차하며 자금색 뇌전과 투명한 바람의 칼날을 막아섰다. 이에 단 구석에 선 원요의 표정이 밝아졌다.

    바로 그때 고공의 붉은 구름이 점점 옅어지고 그 속에 품고 있던 용암의 하천을 드러냈다.

    용암 하천의 붉은 물결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세상 전부를 태워버릴 듯 뜨거운 기운을 품은 붉은 물결이었다.

    그러나 청원자는 차분하게 수결을 맺었고 깃발들이 분출한 주술문자들은 고공으로 솟아올라 오색의 진법을 만들어냈다.

    파파팟!

    진법은 청원자의 법결을 흡수하고 진동하다 만여 개의 수정 실들을 뿜어내 떨어져 내리는 붉은 물결을 꿰뚫었다.

    치지지직!

    푸른 연기가 사방에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 순간, 길게 포효한 청원자의 뒤통수에서 푸른 장포를 입은 소인이 떠올라 고공을 향해 작은 두 손을 펼쳐 빼곡하게 푸른 검기들을 방출했다.

    * * *

    열흘 후, 산골짜기를 중심으로 만 리 하늘이 먹구름과 강한 바람으로 완벽하게 가려졌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하늘이 쩌렁쩌렁 울렸고 수시로 오색 빛이 어른거렸다.

    천겁이 가장 왕성한 시점이었다.

    그 시각, 천겁의 영향력에서 막 벗어난 작은 산의 거목 아래에는 세 사람이 조용히 서서 산골짜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불멸천존, 삼전도인 그리고 황원자였다. 이틀 전에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최적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원자의 대천겁이 이리 대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본 좌였다면 이런 대천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불멸천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청원자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뜻이겠지요.”

    삼전도인도 신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황원자는 그들의 말을 듣고 냉소했다.

    “청원자의 실력이 우리 셋을 뛰어넘는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이번 대천겁을 이겨낼 수 있을 지는 둘째 치고 고비를 넘겨도 원기를 크게 상한 상태로 우리 셋의 협공을 버텨내지 못할 텐데요. 그러니 참혹한 결말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청원자의 법력과 신통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번에는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불멸천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천겁이 닷새에서 엿새는 더 이어질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외부 금제라도 파훼해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천겁이 끝나는 대로 청원자가 몸을 숨길 가능성도 큽니다.”

    산골짜기로 몰려든 먹구름을 바라보던 삼전 도인이 냉랭히 지적했다.

    “어디 그럼 움직여 보실까요? 흐흐, 우리가 금제를 파훼하는 것을 눈치 챈다 해도 그가 어떻게 할 여력은 없을 테니까요. 기껏해야 미리 준비해둔 방법을 쓰겠지요.”

    “으하하, 여러 가지 대비를 해놨겠지만 지금 처리하면 나중에 그 자를 직접 상대할 때 수월해 질 겁니다.”

    황원자의 살기어린 말에 불멸천존도 광소를 터트리며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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