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1화. 금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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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대승기 수사에게는 약간 곤란한 일이지만 한 형과 같은 실력자에게는 별 것도 아닌 일입니다. 제가 고생고생해서 극원정을 제련해낸 것은 이것을 재료로 오행의 기운을 지닌 보물을 만들어 다음 번 천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수천 년을 노력해서 물, 불, 흙 세 종류의 극원정을 만들어 놓고 나니 나머지 두 가지 속성의 재료는 반드시 다른 이의 도움이 있어야 제련이 가능하겠더군요.”
“제가 나머지 극원정 제련을 도와주기를 바라신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종류의 천지의 힘을 빌려 극원정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앞서 세 가지는 홀로 그럭저럭 해냈지만 나머지 금속, 나무 속성의 극원정을 제련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말입니다. 천지의 힘을 조절하는데 한 형께서 도움을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월륭은 포권을 하며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첫째로, 처음 본 저보다는 다른 가까운 벗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지 않으십니까? 또한 천지의 힘을 통제하는데 예기치 못한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도움을 드리면 나머지 두 가지 속성의 극원정을 제련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한립은 신중하게 질문을 쏟아내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허허, 저라도 갑작스런 제안에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허나 다 설명할 수 있으니 마음 놓으시지요! 첫 번째 질문은 수사께서 제가 금속과 나무 속성의 천지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을 보지 못하셔서 의문이 생긴 것일 겁니다.
두 종류의 천지의 힘을 조종하는 것은 다른 세 종류의 천지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힘이 몇 배나 듭니다. 결코 평범한 대승기 수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요.
저도 겨우 두 번 도전해보고 감히 세 번째는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가까이 지내는 벗이 몇 있다지만 다들 수행과 신통이 저와 엇비슷합니다. 그러니 그 두 종류의 천지의 힘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천지의 힘을 조종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친다고 될 일이 아니라 강력한 신통을 지닌 한 사람이 미세한 조정을 해주어야 극원정을 제련할 수 있습니다.”
월륭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두 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위험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으나 충분히 대비를 하면 됩니다. 부족한 저도 지난 번 두 번의 도전에서 무사했으니까요. 마지막 질문은…….”
“확신하든 못하든 제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1년 내로 금속과 나무 속성 극원정을 제련해 내지 못하면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이제 저를 도와줄 수 있는 분은 한 형뿐입니다.”
월륭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다분했다.
“기회가 없다니요?”
“한 형의 말씀대로 천지의 힘을 끌어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특수한 지역에 합당한 시일을 골라 천지간 성신(星辰)의 힘의 변화를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다른 극원정들을 제련할 수 있었던 것은 족 내의 점술사가 수명의 대가를 치르고 성신 변화를 예측해 준 덕입니다.
그런데 금속과 나무 속성 천지의 힘에 접합한 성신의 변화는 아주 드물게 나타나 그 기간 동안 극원정을 제련하지 못하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수사를 마주치지 못했다면 소문이 좋지 않은 노괴를 찾아가 부탁하려 했는데 그보다야 한 형이 훨씬 좋은 거래 상대가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마계에서 명충모를 참살하고 여러 영계 수사들을 구해낸 공적이 있으니까요.”
월륭은 단숨에 수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립은 속으로 이해관계를 따져보다 한참 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사와의 교류는 처음이나 성의 있는 답변으로 저를 속이려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걸리지 않는다면 도와드리지요. 다만 보수는 세 개의 극원정 외에 새로 제련하는 나머지 두 종류의 극원정도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극원정 세 개는 미리 주셔야 하고요.”
“받아들이겠습니다. 천지의 힘을 끌어들일만한 지형이 이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언제든 바로 제련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극원정 3개는 이미 수사의 것입니다.”
한립이 내민 조건에 월륭은 흥정하지 않고 곧바로 수락했다.
“그렇게 해주시겠다면 저도 시간을 끌지 않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지요.”
한립은 기운을 날려 쟁반 위의 극원정을 끌어오며 흡족하게 말했다.
“아주 호쾌하십니다. 그런데 금속과 나무 속성 천지의 힘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시고 내일 출발하시는 건 어떨지요?”
“그러시지요. 신세를 지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표정이 밝아진 월륭은 더 많은 시녀들을 불러들이고 과실과 술들을 잔뜩 내놓았다.
“아, 월 수사께 알아볼 인물이 있습니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한립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 제가 아는 사람이라면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비령족 수사 중에 강력한 오색신광 신통을 부리는 오광족 인물을 아십니까. 같은 비령족 대승기 수사시니 수사께서 혹시 아실까 해서 질문 드린 것입니다.”
“오광족! 성이나 이름은 모르십니까? 어디서 만나보셨습니까?”
깜짝 놀란 월륭이 서둘러 물었다.
“하하, 제가 모르니 수사께 여쭤보고 있는게 아닙니까?”
“아, 그렇지요! 제가 실례를 하였습니다. 저희 비령족이 풍원대륙에서 강대 종족이라 할 수는 없어도 대승기 수사가 서른 명 이상은 됩니다. 오광족에서는 근 백만 년 만에 대승기 수사가 딱 한 명 나왔는데 바로 원행을 떠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답니다. 진작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수사가 이야기를 꺼내시니 놀란 것입니다. 어디서 본 족의 수사를 만나신 것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습니다. 아주 오래전 만황 어딘가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쳤던 것뿐이라 딱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혁 씨 성을 썼고 오색공작으로 변신했다는 것만 빼고요. 오늘 비령족인 수사를 만나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라 물어본 것입니다.”
한립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혁 씨 성을 쓴다면 본 족의 수사가 확실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모르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니 더없이 좋은 소식이군요. 하루 빨리 무사 귀환하기를 바라야겠습니다.”
월룡이 미소를 띠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한립의 얼굴이 굳었다. 보아하니 상대와 오광족 대승기 수사는 관계가 깊은 듯했다.
그는 조금 놀랐지만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혁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월륭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더는 캐묻지 않았고 한립과 수련상의 깨달음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문밖에서 비령족 시녀가 들어와 예를 올렸다.
“노조께 아룁니다. 천붕족의 금 장로가 찾아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불러들일까요?”
“됐다.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이니 물리거라! 귀빈을 모시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월륭이 얼굴을 굳히고 시녀를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그리 전하겠습니다.”
시녀는 깜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려 했다.
“잠깐. 금 장로라면 혹시 천붕족 대장로 금열을 말하는 것이냐?”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 금열 장로를 아십니까?”
“안면이 있는 사이이니 어떻게 보면 오랜 벗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를 불러 들여 만나주시지요.”
“한 형과 아는 사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가서, 금 장로에게 들라 전하거라.”
월륭은 의외라는 얼굴이었지만 지체 없이 분부를 내렸다.
“예!”
시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색 날개를 지니고 하얀 의복을 입은 비령족 여인이 들어왔다. 평범한 용모의 소녀는 온화하고 점잖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월 노조님을 뵙습니다.”
금열은 대청에 들어와 바로 월륭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장 한립을 훑고 익숙한 모습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월륭 노조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존재라면 대승기 수사일 텐데, 어디서 보았더라…….’
한립의 수행이 이전과 크게 차이가 났기에 바로 천붕족 가짜 ‘성자’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일어나게. 금열, 천붕족 사무를 관리하기도 바쁠 터인데 여기는 어쩐 일인가? 내가 직접 불러들이지 않으면 어느 일족이라도 나를 만나볼 기회가 백 년에 한 번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 텐데.”
“노조님께 아룁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갑자기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반년 전 적융족이 본 족의 규정을 어기고 느닷없이 본 족의 열댓 개 영맥과 여러 성을 차지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천붕족 족인들도 쫓아냈고요. 제가 직접 찾아가 담판 지으려 했으나 적융족의 여러 장로들이 협공하는 바람에 부상을 당해 반 년 간 요양을 하다 이제야 노조님께 찾아와 아뢴 것입니다.”
금열이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상황을 설명했다.
“큼, 또 자네들과 적융족 일인가. 그 일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네.”
탄식을 한 월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예? 설마…….”
“세 달 전 적융족 대장로가 노부에게 달려와 똑같이 하소연을 하고 갔네. 그의 말로는 천붕족이 먼저 그들의 영지를 침략해서 보복을 한 것뿐이라고 하더구만.”
“적융족이 저희를 모함한 것입니다. 1년 전 일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적융족이 먼저…….”
“그만! 대천겁을 앞두고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 판에 노부가 자네들의 사소한 분쟁까지 중재해야겠는가? 구구절절한 설명을 듣고 있을 시간 없으니 일족의 생사존망이 걸린 일이 아니라면 다시 찾아와 귀찮게 하지 말게. 이만 물러나게.”
금열이 창백한 얼굴로 급히 해명하려는데 월륭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세력이 강한 적융족이 날뛰게 두면 천붕족은 멸종하지는 않더라도 점점 쇠약해지고 말 것입니다. 노조께서 은혜를 베풀어 부디 저희에게 공정한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금열이 안색이 급변해 청했다.
“흥, 뭐라? 방금 노부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가, 아니면 노부가 불공정하다 따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월륭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분출되었다. 금열은 몸이 더없이 무거워져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했다.
“화를 푸시지요! 절대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융 수사, 금 수사는 저와 어쨌든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 체면을 보아 한 번 도와주시지요.”
이때 가만히 앉아 있던 한립이 소매를 펄럭이며 한 마디 했다. 찰나의 순간 금열을 억누르던 무형의 압력이 또 다른 파동의 간섭으로 씻은 듯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금열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 형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금열, 무엇하고 있는가? 어서 한 수사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게.”
월륭은 한립이 나선 것에 화내지 않고 웃는 낯으로 허락했다.
“너, 너는!”
이제야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를 알아채고는 금열이 아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라니? 여기가 어디라고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인족의 한 수사는 일신의 신통이 노부보다 뛰어난 분이거늘!”
월륭의 호된 질책이 떨어졌다.
“하, 한 수사……. 아니, 한 노조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갑자기 선배님을 다시 뵙게 되어 합당한 예를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금열이 흠칫 놀라 황급히 대례를 올렸다.
두 번이나 그녀와 거래한 한립에 대한 기억은 단 시간에 수행이 높아졌던 것과 ‘성자’로서 세운 업적 덕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겨우 수백 년 만에 비령족의 노조와 같은 존재로 나타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엄청난 격차에 차분하고 치밀한 성격의 금열도 얼떨떨한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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