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49화 (1,106/2,000)
  • 1349화. 황원자

    *

    “정말 그렇게 되면 무애해 자체가 철옹성이 되겠어요. 한 형의 진정한 기반이 될 테고요.”

    은월은 감격스러운 눈치였다.

    “하하, 부러운 것이냐? 은월랑족에서 또 사람을 보내왔다던데 가보지 않을 것이냐. 네가 돌아간다면 은월랑왕의 직위는 네 것이다.”

    “저는 관심 없는 일입니다. 랑왕이야 누가되든 그곳의 늙은이들이 알아서 정하겠지요. 저는 수련에 매진해 어서 대승기에 이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래야, 한 형이 저를 두고 너무 앞서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

    미소를 띤 한립의 물음에 은월이 눈을 흘겼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랑왕 자리 따위 누가 맡든 상관없겠지. 그보다 네가 수련한 망정결말이다. 여러 경전을 뒤져보니 오소 수사의 말과 달리 아주 되돌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더구나.”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한 얼굴로 화제를 바꾸었다.

    “예? 하지만 조부님께서는 망정결을 포기하면 수행이 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앞으로의 수행에도 차질이 있을 것이고요.”

    “망정결을 완전히 폐하라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단독으로 분리하라는 것이다.”

    “분리요?”

    “간단히 말하자면 화신을 제련해 망정결을 수련해 얻은 진원의 힘을 옮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작용도 따라서 사라질 테니.”

    “그렇게만 하면 망정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망정결로 수련한 진원이 분리되면 당연히 수행이 연허기 경지로 떨어질 것이다. 허나 앞으로의 수련에 지장이 없고 합체기로 돌아올 때는 어떠한 고비도 없을 거란 점이다.”

    “그저 시간을 조금 더 들이면 망정결도 해결하고 다시 합체기 수행으로 돌아올 수 있다니 좋은 방책입니다. 한 형께서 이야기를 꺼내셨으니 확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최소한 8할의 확률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야. 다만 망정결을 분리하는 것은 의식과 수행이 너를 초월하는 수사의 도움을 필요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도와주겠다.”

    은월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한립이 진지하게 말했다.

    “8할이라면 충분하네요. 허나 한 형이 말한 분신을 배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걱정 말거라, 실패한다고 해도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고 분신은 내가 이미 구해 두었다.”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녹색 신영을 불러냈다.

    “이, 이것은 영체가 아닙니까? 설마 제게 주시려는 것인지요?”

    은월이 한립의 지선 영체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맞다. 영체는 다른 화신들과 달리 영성이 없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지. 평소에는 곡아나 내 의식 일부를 깃들여 움직였지만 지금 내 수행에 합체기 영체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네게 주려 한다. 지선의 육체였기에 더없이 정결해 진원의 힘을 쉽게 흡수할 테고 이미 합체 후기를 대성해서 망정결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게다.”

    한립이 영체를 가리키자 영체가 녹색 빛으로 반짝이다 녹색 피부를 지닌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변했다. 은월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은월이 그것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 영체에 신비한 액체를 주입해 수행을 계속 늘리려 했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합체 후기를 대성한 후로는 효과가 없었다.

    이에 마계 혈아성에서 구한 요물의 뼈를 연화시켜 영체를 대승기 경지로 끌어올리려 했는데 그마저도 실패했다.

    지선 영체는 요물의 뼈를 연화시킨 후에도 대승기 고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덕에 곡아가 요물의 뼈에 남겨진 기억 속에서 몇 가지 강력한 신통을 익히기는 했지만 무척 실망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은월에게 화신이 필요하단 사실을 알자마자 영체를 떠올린 것이다.

    “한 형께서 영체 화신을 제게 주신다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미뤄서는 안 될 일이니 바로 영체를 제련해 백일 내로 망정결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은월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묘한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것이 좋겠지. 하루빨리 망정결에서 벗어나야 후환을 없앨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네가 폐관수련을 하는 동안 동부와 진법을 완공해 두겠다.”

    한립은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이 허상으로 변해 종적을 감추고 한립은 차분히 몸을 돌려 각종 금제들을 꼼꼼히 살폈다.

    그가 서둘러 은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유는 머지않아 멀리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대륙으로 가면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 알 수 없는데 은월과 같이 이동할 수는 없었다.

    어떤 위기에 처해도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을 지킬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한립은 몇 년 후 다른 대륙으로 향할 때 주과아 외에 화석 노조만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소령계로 통하는 통로를 찾기 위해 주과아의 의식의 힘이 필요했고, 화석은 물 속성 신통에 정통해 다른 대륙에서 십중팔구 도움이 될 것이다.

    * * *

    3년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원합도는 3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섬이 되어 있었다. 영기가 이전 보다 충만해진 것은 물론 크고 작은 산에 영조와 영수들이 유유자적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또한 무장을 한 괴뢰 병사들이 각종 전당과 누각을 지키고 순찰을 돌았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에 괴뢰 병사들이 삼엄한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었다.

    대앵! 대앵! 대앵!

    거산 꼭대기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인근 산에서 수많은 빛줄기들이 솟아올라 모여들었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사조님의 출관을 경하 드립니다.”

    수천 명의 중고계 수사들이 거산 정상에 나타나 은색의 궁전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들 대부분은 기령자 등이 들인 제자들이었고 일부는 3년 사이 해대소가 인요족에서 모집해 새로 입문한 수사들이었다.

    한립은 앞으로 매 십년 마다 문하 수사들의 인원수를 보충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수백 년이 지나면 평범한 거대 종문의 규모에 이를 수 있을 테고, 수천 년이 지나면 화신, 연허급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잠재력이 뛰어난 제자들은 합체기 경지에 이르는 것도 가능했다. 원합도의 청원궁(靑元宮)이 오래지 않아 풍원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 청원궁 제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립이 은월, 주과아 및 해대소 등의 직전 제자들을 데리고 은색 궁전에서 걸어 나왔다.

    “모두 일어들 나거라. 내가 떠나 있는 동안 모든 사무는 월천이 맡아 처리할 것이다. 청원궁은 너희 은월 사고에게 맡길 것이니 분부에 따르도록 하라.”

    한립은 몸을 돌려 수천 명의 제자들과 직전 제자들에게 말했다.

    “제자, 스승님의 명을 명심하겠습니다.”

    새로 제자가 된 남약까지 모든 직전 제자들이 허리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저는 정말 데려가지 않으시려고요? 연허기 수행으로 경지가 떨어졌어도 합체기 영체 화신이 있고, 일신의 신통은 그대로입니다. 대승기 수사를 만나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습니다.”

    은월이 한립을 보며 간청했다.

    “안 된다. 영체 화신으로 진원의 힘 일부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적어도 10년 동안은 경지를 안정시켜야 한다. 그러니 그동안은 네가 청원궁에 남아 있어야 나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형께서 그리 결정을 내리셨다니, 저도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지요.”

    은월이 촉촉한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말거라.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면 백 년이면 돌아올 수 있을 게야. 석화, 주과아는 나를 따라 출발하자꾸나.”

    한립의 말에 은색 궁전 위로 파동이 일고 검은 거대 선박이 떠올랐다. 그가 먼저 흐릿하게 선박 위로 오르고 주과아와 석화가 함께 날아올랐다.

    우웅!

    잠시 후 묵령성주는 수천 수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출발했다.

    * * *

    쿠쿠쿠쿵!

    비취색 초원 위를 만여 마리의 짐승들이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영성이 개발되지 않은 평범한 짐승들이었고 소수만이 저계 요수의 수행에 이르러 날개를 펴고 비행하거나 요풍으로 몸을 감싸고 이동하고 있었다.

    휘이잉!

    뒤쪽에서 붉은 기운이 밀려들고 커다란 세 개의 머리통이 나타났다. 두꺼운 비늘로 뒤덮인 세 개의 머리는 노란색 눈동자를 지닌 거대 구렁이였다. 세 머리가 동시에 입을 벌려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쿠르릉!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의 각기 다른 기운이 초원을 뒤덮자 달아나던 짐승들은 사정없이 거대한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 구렁이 머리들은 순식간에 만여 마리의 우두마신(牛頭馬身)의 괴수들을 전부 먹어치웠다.

    꺼억!

    중간 머리가 흡족하게 트림을 하고 고개를 털었다.

    세 머리가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지려는데 옆쪽이 또 다른 머리가 눈을 번득이고 쉭쉭 거리며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어느 분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벽원소축(碧原小築)을 찾아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머리의 말에 나머지 두 머리가 깜짝 놀라 서둘러 흉흉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허허, 삼전 수사 놀라셨습니까?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낯선 목소리가 가볍게 미소 짓더니 마른 장작개비 같은 앙상한 모습의 황포 사내가 나타났다.

    “황원자 수사. 전 또 누가 벽원소축의 금제를 뚫고 침입했나 하였습니다.”

    중간 구렁이 머리가 경계심을 풀고 말했다. 그러나 말투가 상당히 냉랭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벽원소축의 금제는 대단해서 저라도 파훼하려면 한참이나 걸릴 텐데요. 오늘 이렇게 쉽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이것 덕분이었습니다.”

    황원자라 불린 앙상한 사내가 낮게 웃으며 손바닥 크기의 하얀 패루를 불러냈다. 옥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패루가 하얀빛을 머금고 있었다.

    “구환여의문(九幻如意門)! 구환 노괴가 보물처럼 여기는 것을 어찌 손에 넣은 것입니까?”

    “허허, 당연히 제가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로 설득한 덕분이지요.”

    “흥, 설득은 무슨! 저를 세 살짜리 어린애로 아십니까. 그런 보물을 말 몇 마디로 얻어냈다고요?”

    중간 머리가 얼굴을 굳히며 음산하게 물었다.

    “말만으로 되었겠습니까. 거기다 대가도 치렀지요.”

    “무엇으로 말입니까?”

    “장원단(長元丹) 세 알을 내주었습니다. 한 알로 천겁을 3천여 년씩 미룰 수 있는 단약이니 구환 노괴에게 다음 천겁을 준비할 시간이 만 년 정도 더 주어진 셈이지요. 이걸로 그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황원자는 느긋하게 답했다.

    “통이 큰 건 인정하겠습니다. 장원족(長元族)의 성약인 장원단은 한 알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세 알씩이나 내놓다니 구환 노괴가 본명 법보를 빌려준다고 할 만 합니다. 헌데 저는 왜 찾아오신 겁니까? 저는 장원단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데 무엇으로 저를 설득하시려 하십니까.”

    “장원단은 마음에 두지 않을지 몰라도 명옥진경(冥獄震驚)이라면 어떻습니까?”

    “명옥진경.”

    “그걸 갖고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돼!”

    황원자의 말에 구렁이 머리가 안색이 달라져 동시에 쉭쉭 거리며 소리쳤다.

    “명옥진경이 어떤 보물인데 제가 지니고 있겠습니까. 그저 그 중 절반을 찾을 실마리를 알고 있는데 흥미가 생기셨는지 모르겠군요?”

    “사실입니까?”

    중간 구렁이 머리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제가 어찌 수사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좋습니다. 어찌 하면 명옥진경의 실마리를 알려주실 겁니까? 설마 정보를 주고 이야기나 나누고자 찾아온 것은 아닐 텐데요.”

    “삼전 수사에게 부탁할 일이 찾아온 것은 맞습니다. 수사께서 저를 도와 강적 한 명을 상대해 주셨으면 해서요. 불멸동(不滅洞) 불멸천존에게도 청을 넣어 놓았습니다.”

    단번에 용건을 털어놓는 황원자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감돌았다.

    “불멸천존, 그 자를 움직였다고요? 적잖은 대가를 치렀겠군요. 이렇게 공들여 도대체 누굴 노리는 겁니까?”

    거대 구렁이 머리가 동시에 사라지고 얼굴에 뱀 문양이 새겨진 청년 도사가 나타났다. 구렁이와 꼭 닮은 청년의 눈이 황원자를 향해 흉흉하게 번득였다.

    “청원자란 인물을 아십니까?”

    황원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전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허나 수사의 이름이 황원자이고 그 자가 청원자라 불린다면 관계가 깊을 거라 추측됩니다. 대승기 수사겠지요?”

    “나와 그 자가 무슨 관계인지는 알 것 없습니다. 그저 불구대천의 원수인 그 자를 죽인 다음에야 삼전 수사께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게다가 그 자는 대승기 수사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승기 수사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을 지녔습니다. 적어도 일대일로 붙으면 저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성가신 작자라고요? 우리 셋이 협공하면 이길 수는 있어도 솔직히 죽이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달아나면 그만 아닙니까?”

    삼전 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두 분을 모셨는데 확신이 없는 일에 나서겠는지요? 곧 대천겁을 치를 예정이라 지금이야 말로 그 자를 죽일 다시없을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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