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8화. 오소의 죽음
*
한립은 다른 공어인들을 물리고 질문을 던졌다. 연단종사에 가까운 그가 묻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오묘해서 평범한 연단사들도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소녀는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했다. 한립은 소녀의 영특함에 크게 놀랐다.
“잘 대답했다. 수행만 따라준다면 연단의 길에서 나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하자, 나를 스승으로 모시겠느냐? 수련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는 것 외에 따로 연단술을 지도해 줄 것이다. 네가 진정한 연단종사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예에? 주인님께서 남약을 제자로 들이시겠다는 소리십니까? 남약, 어서 스승님께 예를 올리지 않고 뭐하고 선 게냐.”
공어족 족장이 뛸 듯이 기뻐하며 손녀를 재촉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소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한립에게 다시 한번 예를 갖추었다.
“하하, 일어나거라. 나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니 당연히 선물 하나를 주겠다. 이건 단약과 수련 상의 깨달음을 담은 서책이다. 가져가서 일단 연허기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수련에 매진하거라. 그 정도는 되어야 내 직접 연단술을 지도해 줄 것이야.”
한립이 미소를 띠고 8개의 약병과 2개의 옥간을 불러내 소녀에게 날려 보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제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병과 옥간을 받은 남약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동천에서 잘 지내고 있거라. 본 족으로 돌아가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다른 사형, 사저들을 만나게 해주겠다. 이제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
한립은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고 수결을 맺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님! 제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가 막 공간을 빠져나가려는데 공어족 족장이 뭔가를 떠올리고 그를 불러세웠다.
“무엇이지?”
“이것입니다.”
노인은 소매 속에서 새까만 함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손짓하자 함이 날아들어 저절로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는 돌조각, 옥간, 두루마리 등이 열댓 개가 담겨있었다.
“이건…….”
“역대 공어족의 강자들이 남겨 놓은 공간법칙에 관한 심득입니다. 본래 족장만이 열람할 자격이 되지만 수행이 너무 낮은 제게는 어차피 무용지물입니다. 주인님께서 가져가 참고하셨으면 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오, 자네는 내가 공간의 힘을 지닌 것을 알고 있었던 겐가?”
“소인 공어족의 족장으로 다른 족인들보다 공간의 힘을 감응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주인님 체내의 공간의 힘이 그다지 강하지는 않지만 어찌 제가 감지하지 못했겠습니까.”
“자네의 성의이니 물건들은 가져가겠네. 자, 이제 나는 정말 가봐야겠다.”
노인을 응시하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파동과 함께 사라졌다.
“남약, 네가 복이 터졌구나! 앞으로 전 족의 명운이 네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총력을 기울여 하루빨리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지원할 것이다.”
공어족 족장은 한립이 동천을 떠나자 몸을 돌려 손녀를 보았다.
* * *
보름 후, 한립 일행이 탄 검은 선박은 무사히 인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 인족 영역으로 들어선 그들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요? 조부님께서 이레 후에 천겁을 치를 예정이란 말입니까? 어찌 그럴 수가!”
천연성 수사를 마주본 은월이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눈앞의 병사는 당직을 서는 천연성 장로였고 한립 일행은 천연성 내의 전송대전 안에 도착해 있었다.
“영롱 선자, 오소 선배님께서 폐관 수련을 하던 중 뭔가 잘못되어 어쩔 수 없이 천겁이 앞당겨졌다고 들었습니다. 천겁을 대비하기 위해 성도에서 특별히 관련 보물과 법기를 요청하지 않았다면 본 성도 듣지 못했을 소식입니다.”
낯선 얼굴의 요족 장로가 씁쓸하게 설명했다.
“이레 후면 전송진법을 이용해 최대한 빨리 이동해도 성도까지는 무리입니다. 오소 형이 천겁을 며칠이라도 버텨주어야 삼청뢰소부를 전할 수 있을 텐데요.”
소식을 듣고 안색이 수차례 변하던 막간리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성도로 출발하시지요. 당장 우리를 성도에서 가장 가까운 성으로 전송해주게!”
표정이 어두워진 한립이 요족 장로를 향해 명했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요족 장로는 전송대전의 병사들을 시켜 전송금제 중 하나를 개방하고 빠르게 영석을 배치했다.
준비를 마친 전송진 위에 제일 먼저 은월이 오르고 나머지 일행들이 차례로 따라섰다.
우웅!
밝은 빛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9일 후, 양족 접경지대의 성도 인근에서 파공음이 들려오며 새까만 거대 선박이 성도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순찰을 돌던 성도 병사들이 빠르게 다가왔으나 선박에 새겨진 커다란 고대 문자를 보고는 멈춰서 예를 올렸다.
“오소 수사가 성도에서 천겁을 치르고 있느냐?”
거대 선박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이어 흐릿하게 선박 앞에 나타난 노인은 인족의 대승기 수사 막간리였다.
“막 선배님을 뵙습니다. 오소 대인께서는 성도가 아니라 십만 리 밖의 홍운곡(紅雲谷)에서 도겁 중이십니다. 성도의 모든 장로들이 호법을 서기 위해 함께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허기 병사가 급히 앞으로 나서 대답했다.
“홍운곡!”
그 소리에 막간리는 움찔했고, 새까만 거대 선박은 방향을 틀어 불가사의한 속도로 날아갔다.
반 시진 후, 만 장 고공에서 질주하는 거대 선박 위에 막간리와 한립 그리고 은월 등이 나와 있었다. 다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고 은월은 초조한 기색이 다분했다.
한립은 그녀를 만나자마자 삼청뢰소부 한 장을 오소 노조에게 주어 도겁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소 노조의 도겁이 돌연 앞당겨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쨍!
은월의 품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은월, 왜 그러느냐?”
한립은 은월의 이상을 알아채고 서둘러 물었다. 그러나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은월은 그의 질문에 답할 새도 없이 입에서 선홍색의 옥패를 분출했다.
손바닥 크기의 옥패 표면에는 사내의 뒷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은 바로 오소 노조였다.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옥패는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은월의 손에서 흩날렸다. 은월은 멍하니 서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오소 수사가…….’
그 모습에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렸다. 이에 한립은 탄식하며 조용히 그녀 옆에 섰고, 막간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만 바라보았다.
주과아와 화석 노조는 시선을 마주치고 감히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묵령성주가 놀라운 속도로 하늘을 가른 지 반 시진이 지나 전방에서 열댓 개의 둔광들이 그들을 맞이하러 날아왔다.
한립이 지긋이 발끝으로 거대 선박을 눌렀다.
웅!
거대 선박이 고공에서 멈추자 둔광을 거둔 성도 장로들이 인근에서 예를 올렸다.
“한 선배님과 막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립과 막간리를 본 양족 수사들이 희색을 드러냈다가 바로 비통한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오소 수사는 결국 천겁을 이겨내지 못한 것인가?”
막간리가 참담한 얼굴로 물었다.
“오소 대인께서는 방금 전 천겁을 치르시다 운명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부서진 호신용 보물 두 개와 영핵 뿐입니다.”
“조부님의 영핵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게 내주시지요.”
그때 은월의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영롱 선자께서도 오셨군요. 오소 선배님이 남기신 당부에 따라 안 그래도 영핵은 선자께 드리려 하였습니다.”
노인은 노란 목함을 꺼내 직접 선박에 올라 은월에게 전해주었다.
주먹 크기의 하얀 정핵은 익숙한 기운을 품고 있었고 그 옆에 조각난 하얀 검과 부서진 노란 종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은월은 손끝으로 정핵을 쓰다듬으며 평정을 되찾고 한립을 돌아보았다.
“잠시 혼자 있고 싶습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도와주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장 선실로 들어갔다.
한립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한참 뒤에야 성로 장로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자네들도 성주에 오르게. 오소 수사의 도겁 과정에 대해 들어봐야겠네.”
“예,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인이 대답하고 다른 장로들도 선박 위로 올라왔다.
* * *
반년 후, 성도 모처 영산.
비취색 소나무 아래에서 한립이 뒷짐을 쥐고 서있었다. 그는 하얀 안개로 가득한 산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등 뒤로 파동이 일고 노란 인영이 나타나 예를 올렸다.
“월천, 새로운 동부에 관한 일은 진전이 있더냐?”
“스승님이 말씀하신 조건을 찾아 직접 양족의 영역을 두루 살피다 드디어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든 그곳으로 이주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의 직전 제자 중 한 명인 해대소가 예의바르게 고했다.
“그래, 위치가 어디더냐?”
“무애해(無涯海)의 섬입니다. 비록 외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양 종족 사이에 있는데다 영기가 정순하고 자연적으로 대부분 지역이 양의자력(兩儀磁力)으로 뒤덮여 있어 강력한 금제로 작용하는 곳입니다.”
“그곳으로 하자꾸나. 돌아가 짐을 챙기거라. 며칠 내로 성도를 떠날 것이다.”
“예, 스승님! 그런데 은월 사고께서는 괜찮으시겠지요? 아직 출관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아직 출관하지는 않았지만, 며칠 내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드는구나.”
한립은 머뭇거리며 묻는 해대소를 힐끗 보고는 다시 산골짜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는 바로 문하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동부로 이주한다는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해대소는 한립의 말을 굳게 믿고 물러난 다음 산 아래로 내려갔다. 한립은 여전히 소나무 아래 서서 산골짜기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골짜기의 안개가 요동치고 하얀 빛줄기가 날아올랐다.
“한 형,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같이 떠나시지요.”
은색 의복을 입은 고운 여인이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다행이구나. 동부를 마련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놓았으니 앞으로 그곳에서 안심하고 지내면 될 것이다.”
마주 웃는 한립의 목소리가 무척 온화했다.
“새로운 동부요? 하루빨리 보고 싶습니다.”
은월이 두 눈을 빛내며 밝게 답했다.
* * *
인족과 요족 경계 지역에 위치한 방원 만리가 넘는 거대 섬 위.
각종 둔광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수천 명의 중저계 수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 섬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누각과 전당이 빠르게 지어지고 있었다.
여러 진법 깃발과 원반들이 휙휙 날아가 섬 곳곳에 금제의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대 섬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 속에서는 한립이 머리통만 한 흑백의 돌덩이를 대형 진법 안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돌덩이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 순간, 진법이 울며 금은색의 주술문자들을 뿜어냈다.
검은색과 하얀색의 기운으로 둘러싸인 돌덩이가 괴이한 파동을 방출해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이 진법이 양의자광을 조종해 섬 밖에서 들어오려는 적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그의 뒤에선 은월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하, 안심하거라. 이 양의만인대진(兩儀万引大陣)은 내 상고진법을 참고해 만들어낸 것이다. 섬 아래쪽에 대형 자광지맥(慈光地脈)이 여러 개 묻혀 있기에 진법으로 그 힘을 조종해 이전보다 열 배 이상의 범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게다.”
“그렇다면 원합도(元合島)의 방어는 걱정할 일이 없겠네요! 양의자광(兩儀慈光)의 위력은 제가 직접 봤잖아요. 대승기 수사라도 실수로 그 안에 갇히면 한동안은 탈출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뿐이 아니다. 무애해의 자광지맥이 이 섬 인근에 밀집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섬에도 자광지맥이 존재한다. 간소화된 양의만인대진을 설치해 두면 본섬과 다른 섬들이 서로 호응할 수 있어 양의자광의 위력과 작용 범위를 놀라운 경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게야.”
한립이 거대 진법을 살피며 자신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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