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7화. 영왕과의 재회
*
혈연과 막간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립은 잔잔히 미소를 띠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눈에 혈연과 흑린이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며칠 전 소수라계에서 보여준 그의 실력에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아, 차읍자 소굴을 찾아가신다고 들었는데 흉수는 찾아내셨습니까?”
한립이 먼저 맞은 편 이종족 대승기 수사들에게 말을 붙였다.
“찾아내기는 했습니다만, 교활하기 짝이 없는 흉수더군요! 싸움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소굴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시간만 충분했으면 반드시 잡아왔을 텐데 아쉽습니다.”
혈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아쉬워했다.
“정말 아깝게 되었습니다.”
혈연이 한립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는데 대청 밖에서 기쁨에 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다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본 왕이 목 빠지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백포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영왕 형, 드디어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요구하신 수라주 정핵을 구해왔습니다.”
흑린이 벌떡 일어나 누구보다 먼저 말했다.
“그렇습니까? 노부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흑린의 손에서 녹색 고리가 날아갔고 영왕이 그것을 받아 의식을 불어넣었다.
“호오, 확실히 성년 수라주의 정핵입니다. 함유된 시간의 힘이 적지 않아 광음의 힘을 추출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허허, 약속한 물건을 드려야겠지요. 흑 수사, 잘 받으십시오.”
긴장한 흑린을 향해 백포 노인이 부적으로 봉인된 옥함을 날려 보냈다.
쉭!
흑린은 눈을 크게 뜨고 입에서 검은빛을 쏘아 보내 옥함을 낚아채왔다. 그때 옆에서 혈연이 막간리와 한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벌일까 감시하는 모양새였다.
막간리가 열기 어린 눈빛으로 옥함을 바라보기만 하고 한립은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자 그제야 혈연은 한숨을 돌렸다.
콰릉!
흑린은 부적을 뜯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천둥소리와 함께 팔뚝 절반 크기의 옥패가 날아올랐다. 금색 문자가 어른거리는 옥패에서 놀라운 뇌전의 힘이 느껴졌다.
“이게 삼청뢰소부?”
흑린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영 형, 저도 수라주 정핵을 세 개 구해왔으니 확인해 보시지요.”
이번에는 막간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 말에 혈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다들 그리 조급해 않으셔도 됩니다. 삼청뢰소부가 많지는 않아도 여러 분이 지닌 정핵으로 교환할 만큼은 있으니까요.”
“하하,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막간리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서둘러 비취색 목함을 꺼내 던져주었다. 혈연도 늦지 않게 저물탁을 꺼내 날려 보냈다.
한립만이 전혀 걱정 없다는 얼굴을 하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이에 백포 노인은 그를 힐끗 보더니 막간리와 혈연의 정핵을 확인하고 부적으로 봉인된 옥함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막간리와 혈연은 옥함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겨 부적을 뜯고 뚜껑을 열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수사께서는 삼청뢰소부를 교환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빈손으로 돌아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영 형의 수중에 삼청뢰소부가 몇 장이나 남아 있습니까?”
“몇 장이요? 설마 수라주 정핵을 3개 이상 구해오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드디어 평온하던 백포 노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나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길게 설명하지 않았고, 혈연, 흑린, 막간리는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수라주 일족에게 얻은 정핵의 수량은 딱 12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백포 노인은 침음하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삼청뢰소부는 영족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귀한 보물이라 저도 그리 많이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세 분께 한 장씩 드린 것을 제외하면 이제 두 장이 더 남았군요. 수사께서 충분한 수라주 정핵을 갖고 오셨다면 전부 교환해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남은 두 장을 제가 가지고 가지요.”
한립은 망설임 없이 답하며 옥함과 수정 단검을 꺼내 쏘아 보냈다. 무의식중에 두 물건을 끌어온 노인은 수정 검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살폈다.
“엇, 이건…….”
“하하, 역시 알아보십니다. 소수라계에서 강적과 싸워 손에 넣은 비검입니다. 수라주 정핵을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라 정핵 서너 개 분량의 시간의 힘은 지니고 있을 겁니다. 원래 다섯 자루였는데 전투 중에 네 개는 망가지고 겨우 하나 남았습니다.”
한립의 설명에 다른 수사들도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것은 혁 노인이 사용하던 수정 검들 중 한 자루였다.
네 자루는 전투 중에 망가져 통제를 잃었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머지 한 자루를 챙겨온 것이다.
혁 노인과 수라주와의 긴밀한 관계로 보았을 때 대량의 수라주 정핵을 구해 비검들을 제련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립이 쏘아 보낸 옥함에는 당연히 나머지 수라주 정핵 세 개가 들어있었다.
확인을 마친 백포 노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삼청뢰소부 두 장을 꺼내 한립에게 건넸다.
광음사를 더 많이 제련할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는 따로 보물 3개씩을 고르게 해주겠다는 약조도 잊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보물을 보관하는 밀실로 이동해 각자가 원하는 보물을 골라가게 했다. 이에 영왕은 물론 나머지 네 수사들도 아주 만족스럽게 거래를 마칠 수 있었다.
대승기 수사들은 원하는 바를 얻었기에 영왕과 인사를 나누고 영족의 성산인 복령산을 떠났다.
한립과 막간리도 은월 등이 기다리는 묵령성주로 가기 위해 서둘러 이동했다.
반나절 만에 그들은 어느 산골짜기에 도착했고, 은월, 주과아, 화석노조가 한립과 막간리를 반겼다.
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골짜기를 떠난 새까만 선박이 인족 방면으로 쾌속으로 날아갔다.
* * *
선박 가장 아래층의 밀실 안.
한립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몇 가지 물건을 띄워놓고 살피고 있었다.
고대 등잔, 뇌전으로 둘러싸인 옥패 두 개, 오색 구슬 그리고 우윳빛 병이었다. 전부 이번 여정에서 얻은 수확이었는데 의외의 수확도 많았다.
한립이 그 중 옥패 하나를 가리켰다.
츠츠츳!
표면에서 무수히 많은 금색 주술문자가 떠올라 뇌전을 뿜었다.
뇌전은 그의 손끝에 맞고 자잘한 뇌전 실들로 흩어져 튕겨나갔다. 손끝이 저릿하고 순간적으로 손의 감각이 사라졌다.
뇌전을 직접 맞은 손끝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기까지 했다. 한립은 진원의 힘을 끌어올려 손바닥으로 법력을 모았다. 그러자 금빛이 흐른 피부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새까맣게 탄 부분도 회복되었다.
“전설 속의 선가 밀부(密符) 답구나. 천겁을 막는데 효과가 있어야 할 터인데.”
한립은 두 개의 옥함을 꺼내 옥패를 하나씩 담아 넣어두었다. 그 다음은 고대 등잔이었다.
쉭!
등잔을 불러들인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폈다. 모란성조와 비슷한 공작 화신을 소환해내는 것을 보면 내력이 있는 보물이 분명했다.
보물의 주인인 혁 노인이 오광족인에 본체가 공작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찬찬히 고민해볼 문제였다.
고대 등잔은 표면에 새겨진 문양도 그렇고 사용된 재료들도 희귀해서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그가 아는 몇 가지 재료들도 굉장히 진귀한 것이라 무척 놀라웠다.
휘릭!
그가 잠시 고민하다 미간에서 수정 실을 뿜었다. 수정 실이 등잔 안으로 사라지고 그는 꼬박 하룻밤을 새고 나서야 눈을 떴다.
수정 실이 돌아오고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원혼정(元魂灯)이라는 보물이었어. 안에 공작의 정혼 한 줄기를 품고 있어 영조(靈鳥)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이었어!”
원혼정은 강대한 보물을 담아 둘 수 있는 기이한 보물이었다. 다른 법기나 보물도 정혼이나 의식 일부를 넣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본체와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분혼과 의식이 쇠약해져 흐트러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원혼정에 담아 놓은 분혼 일부는 반대로 보물의 기운을 받아 더욱 기운이 강해졌다.
이런 분혼은 나중에 특수한 비술로 제련을 거처 신외화신과 비슷한 원혼화신(元魂化身)으로 만들 수 있었다.
화신이 얼마나 강하든 원혼정만 손에 있으면 반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보물의 주인은 이런 조건이라면 본체와 맞먹는 위력을 지닌 원혼화신을 배양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고대 등잔을 보는 한립의 눈빛이 뜨거웠다.
수행이 높아진 그에게 제2마영의 수행은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화신을 길러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꼭 알맞은 보물이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한참 동안 혼백을 배양하는 효과가 있고 다른 숨겨진 후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립은 조심스럽게 정혼 한 줄기를 등잔 안에 심어 놓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원혼화신으로 만들지는 천천히 고민해볼 참이었다. 그는 소매를 펄럭여 소중하게 원혼정을 거두고 이번에는 작은 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병에 담긴 것은 얼마 되지 않는 현무진혈이었다.
진혈을 삼키고 경칩결로 연화를 거치면 그의 경칩술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것이다. 생각할수록 절로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솔직히 처음 경칩결에 적혀 있는 12가지 진혈과 변신술을 보고 이걸 다 모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진룡, 천봉, 뇌붕, 청란, 오색공작, 산악거원에 현무까지 절반이 넘는 진혈을 모았다.
12가지 경칩 변신술을 전부 익혀 진령의 육체를 지니게 되면 얼마나 강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립은 묵묵히 작은 병을 집어 뚜껑을 열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 *
며칠이 지나 현무진혈의 연화를 마친 한립이 눈을 떴다.
파아앗!
조용히 변신술 법결을 되뇌인 그는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찬란한 광채 속에서 까무잡잡한 거대 거북으로 변신했다.
밀실을 가득 채운 거북의 등껍질에 무수히 많은 수정 문자들이 흘러 저절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나쁘지 않은데?’
비록 산악거원이나 다른 종류의 변신에 비해 그 능력은 떨어지지만 방어력에서 만큼은 최고였다.
진령 현무 자체가 고대 진령들 중 몸이 단단하고 피부가 두껍기로 유명했기에 놀랄 일도 아니었다.
광채가 걷히고 거대 거북이 사라졌다.
밀실 바닥에 선 한립은 변신술로 인해 요동치는 진원을 안정시키고 소매를 펄럭였다.
휙!
밀실 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구슬이 날아들었다. 공간의 힘을 발산하는 오색 기운을 품은 구슬은 산해주였다.
팟!
동천 보물을 응시하던 그가 수결을 맺고 흐릿하게 사라졌다. 다음 순간 산해주 내부의 동천에 그가 나타나 거대 섬을 내려다보았다.
의식을 방출했지만 거대 섬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
한립은 손끝을 미간에 대고 의식의 힘을 더욱 넓게 퍼트렸다.
의식이 광활한 영역을 장악하고 다른 섬들까지 수색했다. 뭔가를 발견한 그가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또 다른 작은 섬 위에 나타난 그가 미소를 머금었다.
황량하던 섬 위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 가득했는데 높낮이가 다를 뿐 전부 삼각형 형태로 반인반어의 공어족인들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은 한립을 발견하고 놀라 분분히 대례를 올렸다.
잠시 후 모든 공어인들이 한립과 가까운 지면에 모여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섰다.
“주인 어르신께서 다시 동천을 찾아주셨습니다.”
공어족 족장이 희색을 띠고 얼른 날아올라 저공에서 멈추었다.
“환영하지 않는 것인가?”
한립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님.”
족장이 화들짝 놀라 예의 바른 웃음으로 답했다.
“하하, 농이었으니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더 큰 섬도 많았을 것인데 왜 다들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인가?”
“저희를 이 공간에 들여보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어찌 함부로 훼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동천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동천이 그렇게 쉽게 망가질 것이었으면 산해주가 보물이라 불릴 일도 없었겠지. 이렇게 하지, 가장 큰 섬은 다른 용도가 있으니 남겨두고 다른 작은 섬들은 자유롭게 이용해도 상관없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저의 일족이 영약을 재배하는데 꽤 능통한데 동천에 주인님을 위해 약재밭을 만들어도 되겠습니까?”
공어족 족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약재밭……. 나쁠 것 없겠지, 일단 해보게. 아, 지난번에 말한 연단술에 자질이 뛰어나다던 자네의 손녀를 만나볼 수 있겠는가?”
“남약, 얼른 이리로 와 인사를 올리거라.”
공어족 족장은 곧장 몸을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남약이 주인님을 뵙습니다.”
모여 있던 공어인들 중 청수한 얼굴의 소녀가 날아올라 공손히 예를 올렸다.
“남약이라고? 연단술에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사실이더냐?”
“단약 제련에 흥미가 있을 뿐 재능이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소녀는 낯선 이와의 대화가 어색한지 수줍게 답했다.
“하하, 겸손하구나! 내 네가 사용하던 연단로와 재료들을 보았다. 연단술에 조예가 깊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 내 몇 가지 질문을 할 터이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해보거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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