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6화. 공어족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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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진 후, 십여 개의 삼각 건물 사이 공터에 은색의 빛의 진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공어인들이 달라붙어 바삐 움직였다.
진법 가장자리에서는 공어족 족인들이 줄을 서서 칼로 손목을 그어 거대한 청동 솥에 피를 모으는 중이었다. 벌써 절반이 차올랐고 솥 안에서는 진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신선한 선홍색 핏물에 남색 구슬이 떠서 영기의 빛을 발했다. 한립이 팔짱을 끼고 허공에 떠서 진법과 솥을 살폈다. 공어인들은 손이 빨라 굉장히 복잡한 준비를 빠르게 마치고 있었다.
족장의 말대로 산해주를 연화시키는데 삼일이 채 걸리지 않을 듯했다.
* * *
혈천대륙 모처 지하의 상고 제단.
쿠르르릉!
제단에 괴이한 파동이 일고 모든 먼지와 돌조각들이 떠올랐다. 오색 빛이 퍼지고 빛의 진법 속에서 누군가 반짝이는 몸을 드러냈다.
“드디어 도착했군. 영기가 이리 희박해서야! 역시 선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곳이야.”
검은 장포를 걸친 청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소매를 펄럭여 주위를 둘러싼 금은색의 주술문자를 없앴다.
청년의 새하얀 피부가 새까만 장포와 대비를 이루어 병약한 분위기를 풍겼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 지를 파악하기 위해 손가락을 튕겼다.
푸푹!
열댓 개의 은색 주술문자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콰르르릉!
진흙과 바위들이 살아 움직이듯 광풍에 휘말려 양쪽으로 밀려나고 지상으로 통하는 깊은 골짜기 같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위쪽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고서야 청년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발밑에서 기운이 뭉쳐져 그를 들어올렸다. 잠시 후 지상으로 올라온 청년은 고공까지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
황량한 땅에는 낮은 관목과 들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흔한 산봉우리나 마부도 보이지 않고 벌레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아주 적막한 땅이었다.
침음하던 청년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고공에서 불경 소리가 울리고 영기의 빛이 모여 거산 크기의 흉수를 응결해냈다.
사자 머리에 기린의 몸을 한 흉수는 상반신은 핏빛 화염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하반신은 은색빛 으로 반짝여 도무지 어떤 영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청년이 갑자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끙! 하고 앓았다. 거대 흉수 허상이 빛으로 흩어져 흐릿하게 그림자로만 남았다.
“법력이 이렇게 제약을 받다니! 관에서 나를 내려 보낸 이유가 있었구나.”
청년은 씩씩 거리다 문득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나쁜 일은 아니지. 그 말은 그 늙은이들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다는 소리가 되지 않는가. 흐흐, 보물 제련을 마치려면 혈제가 필요했는데 하계 생령들의 혈기가 불순해도 수량만 충분하면 될 게야. 어차피 배신자를 잡는 게 급한 일도 아니고.”
그는 비취색 죽간이 가득 든 금색 원통을 불러냈다. 죽간마다 정교하게 은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다채로운 빛이 어려 있었다.
원통을 던진 청년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콰릉!
원통이 금색의 빛구슬로 변해 거대한 팔괘문양을 만들었다.
청년이 주문을 멈추고 원통을 가리키자 비취색 빛이 팔괘문양에서 뻗어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이쪽이 생령이 가장 많다 이 말이지?”
청년은 흉흉한 눈빛을 하고 금색 둔광을 일으켜 비취색 빛을 따라갔다.
흐릿하게 변했던 사자 머리에 기다란 몸을 한 괴수 허상이 붉은 화염이 되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 * *
“이것이 산해주의 진짜 모습이란 말인가!”
한립은 둥그런 구슬을 보고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이전보다 크기는 절반으로 줄어있었지만 구슬 표면은 아주 매끄럽고 오색 빛깔이 감돌고 그 속에 또 다시 우윳빛 기운이 맴돌아 아주 신비했다.
“구슬에 남아 있던 흔적을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이제 안심하시고 제련하시면 됩니다.”
옆에 선 공어족 족장이 이전 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답했다. 적잖은 정혈을 소모해 기운이 빠진 듯했다.
“자네는 족인들을 시켜 짐을 싸도록 하게. 내 구슬의 연화를 마치는 대로 자네들을 데리고 소수라계를 떠날 것이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바로 명을 내리겠습니다. 보물을 제련하려면 조용한 곳이 필요하실 텐데 제가 평소 사용하는 밀실을 내드릴까요?”
“그러지. 안내하게.”
한립이 노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함께 삼각형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선배님, 안으로 드시지요.”
노인은 반원형의 청석 대문을 앞두고 옆으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밀실 안에는 평범한 가구 외에도 새까만 선반 위에 죽통, 목함, 옥병 등 용기 류와 적홍색 화로가 구비 되어 있었다.
“연단술도 익혔는가?”
“선배님께 아룁니다. 제가 아니라 제 손녀가 사용하는 물건들입니다. 연단술에 재능이 있는 아이인데 이 계면의 영약이 제한적이라 다양한 종류를 제련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노인이 서둘러 설명하는데 은근히 손녀 자랑이 섞여 있었다.
“허허, 연단술에 재능이 있다면 돌아가는 대로 살펴봐야겠군.”
“선배님께서 지도해주신다면 그 아이에게 천운이 따른 것과 다름없지요.”
“알았으니 이제 나가보게.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기뻐하는 노인을 향해 한립이 손을 저었다. 이에 공어족 족장은 서둘러 사죄를 하고 밀실을 빠져나갔다.
쿠쿵!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석문을 닫고 수많은 부적을 뿌려 금제를 펼쳤다.
장장 이틀 밤낮이 지나고 그제야 석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피곤한 기색의 한립이 밀실을 걸어 나왔다.
“선배님 산해주는…….”
“산해주 연화는 마쳤네. 서둘러 족인들을 소집하게. 벌써 이곳 계면이 나를 배척하기 시작했으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야.”
“잘 되었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노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둔광을 일으켜 급히 날아갔다.
순식간에 넓은 광장에 수백 명의 공어인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꼿꼿이 서서 함부로 사담을 나누지 않았다.
노인이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다가 한립이 인근 건물에서 날아오르자 절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주인님의 크나큰 은혜에 감사 올립니다! 본 족 오백 여 족인들이 이 자리에서 맹세를 합니다. 오늘부터 주인님을 모시며 대대손손 변함없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이 맹세를 어길 시에는 전 족이 천벌을 받고 대가 끊겨 세상에 공어족이란 이름이 사라질 것입니다.”
말을 마친 노인이 단검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깊이 찔러 넣었다.
푸푸푹!
그때 뒤쪽의 공어인들이 엎드려 절을 하며 다양한 날카로운 무기로 피를 쏟아냈다. 이렇게 엄숙할 수가 없었다.
맹세의 영향을 받아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허공에 커다란 핏빛 주술문자가 떠올랐다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졌다.
“모두 일어나거라! 모든 족인들이 피를 이용해 충성을 맹세를 하다니, 그 진심을 알겠구나. 내 너희를 거두어 추호도 경시하지 않고 일족으로 대할 것이다.”
한립이 수백 족인들 위에 떠올라 탄식하듯 말했다.
그는 공어인들이 답하기 전에 입에서 산해주를 분출했다.
스스슷.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구슬이 아름다운 기운을 분출했고 빛이 닿는 곳마다 모여 있던 공어인들이 사라졌다.
광장이 텅 비고 아무도 남지 않자 한립도 괴이한 파동 속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 * *
광활한 공간 내부.
한립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공간 대부분은 쪽빛 바다였고 그 중간에 큰 섬 1개와 작은 섬 3개가 보였다.
한립은 거대 섬 상공에서 이곳으로 이동한 공어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어인들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산해주 내부의 동천이란 말이지? 이곳에 건물을 짓고 거처를 마련하거라! 내 돌아가는 대로 머물 곳을 마련해 너희를 데리고 나가주겠다.”
“예, 주인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한립의 분부에 공어족 족장이 고공을 향해 깊이 예를 올렸다. 이에 다른 공어인들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하하, 매번 그리 과한 예를 차릴 것은 없다. 잘 들 지내고 있거라!”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성큼 앞으로 나서는 듯하더니 공간을 빠져나갔다.
족장은 그제야 격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족인들에게 이런저런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 외부 세계의 한립은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와 바닥에 정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을 배척하려는 계면의 힘에 굉장히 불편한 상태였다.
웅웅!
오래 기다리지 않아 머리 위로 이상한 파동이 몰려와 먹구름을 만들어내더니 한립 주변이 왜곡되어 풍경이 흐릿해졌다.
‘이때다.’
한립이 눈을 번쩍 뜨고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부서트렸다.
콰릉!
마른하늘에 굵은 벼락이 내리쳤고, 한립은 뇌전에 휩싸여 종적을 감추었다.
* * *
영계의 황량한 석산 꼭대기.
콰르릉!
고요하던 하늘에 공간균열이 생기더니 오색 광채를 뿜어냈다. 그리고 오색 광채가 뭉쳐져 거대한 빛의 진법을 만들어내더니 누군가 진법 속에서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그는 소수라계에서 막 돌아온 한립이었다. 그가 막 몸을 가누었을 때 공간균열과 빛의 진법이 동시에 사라졌다.
한립은 주변을 살피며 손끝을 미간에 가져다댔다. 방대한 의식의 힘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휴, 지정해 둔 좌표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구나.”
한숨을 내쉬며 그는 평평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의 소매 속에서 법기 하나가 깜빡깜빡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 시진 후, 하늘 끝에서 하얀 빛줄기가 날아들어 석산으로 다가왔다.
둔광을 거두고 나타난 것은 막간리였다.
“한 수사도 무사히 돌아와 다행입니다. 이 근방으로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오는 좌표를 멀리 설정할 리가 있겠습니까? 막 형과도 만났고, 바로 영왕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삼청뢰수부의 수량이 부족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한립은 자신을 반기는 막간리를 보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일어났다.
“맞는 말입니다. 어서 복령산으로 가지요!”
그들은 둔광을 일으켜 같은 방향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 일행은 영왕이 머무는 성산 인근에 도착했고 바로 산 정상으로 쏘아져 나갔다.
우웅!
전방에서 금제의 파동이 겹겹이 일어나 다채로운 빛을 내뿜으며 길을 막았다.
한립이 금제를 파훼하고 나아가려는데 빛의 장막 안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영왕 대인께서 진작 두 분을 안으로 모시라 명을 내려두셨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빛의 장막이 갈라지고 대머리 사내가 나와 한립과 막간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영인’이라 불리던 영족 성령이었다.
“자네로군. 어서 안내하게.”
“예, 이리로 가시지요.”
상대를 알아본 한립은 거침없이 명을 내렸고 영인은 허리를 숙이고 앞장섰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금제가 갈라져 길을 열었다.
일다경이 지날 무렵 한립과 막간리는 이전에 와보았던 전당 건물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대청에 마련된 의자에 혈연과 흑린이 앉아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한립과 막간리가 들어오자 말을 멈추었다.
막간리가 순간 동공을 수축했지만 살갑게 웃음을 터트리며 다가갔다.
“두 분이 먼저 와계셨습니다. 벌써 거래를 마치신 것은 아니겠지요?”
“오해십니다. 우리도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영 형의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혈연은 슬쩍 한립을 살피고 웃으며 답했다.
“저희가 그리 늦지는 않았군요. 영왕 형께서는 언제쯤 만날 수 있답니까?”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안내를 받으며 들으니 며칠 동안 폐관 수련중이라 공법을 거두는데 시간이 필요하니 잠깐 기다려 달라 했다더군요.”
“그럼 노부도 안심입니다.”
막간리는 한립을 불러 대청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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