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2화. 한담(寒潭)
*
“좋다. 그렇다면 내 너를 지지하겠다.”
수라주 족모의 결정에 소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이 전음을 나누고 합의를 보자 혈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충분한 수량의 정핵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도 굳이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 개나 가능하겠습니까? 보유한 수량이 적으면 협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수량을 제시하시지요.”
“이렇게 많은 수사들이 여기까지 왔는데 3, 40개는 되어야 할 겁니다.”
소녀의 물음에 혈연이 통 크게 3, 40개를 원했다.
“과욕은 부리지 마십시오. 모아둔 정핵 일부는 족 내에서 사용해왔기에 남은 수량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 개를 내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수사 분들이 사용하기에 여덟 개면 충분할 듯싶습니다.”
“여덟 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 넷이 나눠 써야 하는데 겨우 여덟 개라니!”
“한 사람당 두 개씩 돌아가겠네요. 그것도 그냥 드릴 수는 없고, 우리 일족을 위해 소소하게 한 가지 일을 해주셔야 내드릴 수 있습니다.”
소녀는 혈연이 얼굴을 굳히든 말든 유유히 말했다.
“무슨 일로 도움을 구하는지나 들어보겠습니다.”
한립이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힘을 합쳐 보물 하나만 찾아와 주시면 됩니다. 보물과 정핵을 교환하는 것이지요.”
“어떤 보물이기에 귀 족의 능력으로도 여태껏 손에 넣지 못한 것입니까?”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보물인지는 아실 것 없고 우리 일족에게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보물은 한담(寒潭)이라는 연못 깊은 곳에 잠겨 있는데 물속이 극도로 차가워 대승기 수사도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허나 수사 분들이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진작 방법을 생각해 놓아 여러분은 약간의 힘만 보태주시면 되니까요. 결코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소녀가 한립 일행의 걱정을 알아채고 설명했다.
“두 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침음하던 한립이 고개를 돌려 혈연과 흑린에게 물었다.
“위험하지 않다면 시도해볼 만합니다. 허나 정핵 여덟 개는 너무 적습니다. 허허, 어찌 되었든 이 일은 한 형께서 나서서 결정을 내리시되 저희가 실망할 일은 만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흑린과 전음으로 상의한 혈연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앵화 수사,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면 8개가 충분치 않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이렇게 하시죠, 정핵 열두 개를 대가로 하되 단 한 개도 부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가 그 보물을 한담에서 건져 오겠습니다. 다만 미리 약속한 정핵의 절반을 내주고, 수사의 말과 달리 한담에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그 즉시 손을 떼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으니 보물을 구해오는 것은 빠르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두 개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더 많은 수량을 요구했다면 본 족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다만 언제 보물을 찾으러 가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능하시다면 바로 움직이실까요?”
소녀가 서둘러 조건을 수락하고 한립 일행보다 더욱 조급한 태도를 보였다.
혈연과 흑린은 한립이 딱 최소한의 수량만 제시해 미미하게 표정이 변했지만 끼어들어 반대하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일행 중 나머지 한 분에게 연락을 취할 것이니 바로 준비해주시지요.”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 속에서 옥패를 꺼내 손끝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파앗!
흐릿하게 은색 문자가 떠올라 옥패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에 소녀는 빙긋 웃으며 비슷한 비술을 이용해 네 명의 성년 수라주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고공에서는 혁 노인이 소환해 낸 자색공간이 점점 작아지다 은색 거대 새에게 잡아 먹혔고 쿵! 하고 고대 등잔이 추락했다.
한립은 거침없이 보물을 끌어와 소매 속에 넣었다. 등잔은 귀한 보물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일다경이 지나 하늘 끝에서 하얀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둔광은 한립 옆에 이르러 빛을 거두었고 막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간리는 창백한 얼굴로 푸른 갑옷에 균열이 가있고 기운도 쇠해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 수사, 수라주 일족이 정핵을 내주기로 했다고요? 어찌 그런 조건을……. 엇, 저 여인은 누구입니까?”
노인이 핏빛 치마 소녀를 보고 움찔했다.
“상황에 변화가 생겨 협상하기로 하였습니다. 저 여인의 비범한 신통이 그 요인 중 하나고요. 막 형께서도 이견이 없으시겠지요? 그런데 성년 수라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립이 다른 둔광들이 나타나지 않자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목숨을 걸지 않고 정핵을 구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요! 그 네 명은 노부가 공들여 설치한 진법에 잠시 갇혀 있습니다. 노부 홀로 넷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뺐고 영총 두 마리도 중상을 입었지 뭡니까. 그 진법도 오래 그들을 가둬두지는 못할 겁니다.”
“진법의 힘을 빌려 그들을 상대하고 계셨군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안타깝게도 한 형이 내준 괴뢰 중 두 마리가 적을 유인하다 훼손되었습니다. 이후 노부가 그에 대한 보상하겠습니다.”
막간리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덧붙였다.
“본래 그 괴뢰들은 수사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전부 망가진다 해도 제게 보상하실 필요 없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한립이 정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을 말하자 막 노인은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하늘 끝에서 네 명의 성년 수라주들이 날아들었다.
넷 중 둘은 거미 본체를 드러냈고 나머지는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다들 의복이 너덜너덜해 고초를 겪은 듯했다.
막간리의 진법을 빠져나오느라 상당히 애를 먹은 눈빛이었다. 모두 석성 위에 모이자 한립이 입을 뗐다.
“앵화 수사 모일 사람들은 다 모였고 이제 보물을 찾으러 가시지요. 정핵은 준비가 되었습니까?”
“제가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 먼저 여섯 개를 드릴 테니 잘 보관하시지요.”
소녀는 손바닥을 뒤집어 하얀 옥함을 꺼내 던져주었다. 혈연, 막간리 등은 눈을 떼지 못했지만 중간에 가로채려 들지는 않았다.
한립이 덤덤히 옥함을 불러와 뚜껑을 열어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옥함에 들어있는 정핵들은 겨우 엄지손톱 크기인데도 신비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그중 세 개를 혈연, 흑린 형제에게 쏘아 보내고 두 개는 막간리에게 날렸다.
정핵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옥함은 그가 저물탁에 챙겨 넣었다.
“고맙습니다, 한 수사!”
혈연과 흑린이 찢어지는 입을 숨기지 못하고 인사를 건넸다.
혈연이 얼른 두 개의 정핵을 챙기자 흑린은 머뭇거렸으나 별말 없이 나머지 하나를 끌어들였다.
“한 수사가 겨우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은 조금 그런 것 같습니다.”
막간리가 정핵 두 개를 집어넣지 않고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제 몫의 정핵은 일을 마치고 받으면 될 일입니다. 어차피 똑같이 세 개씩 챙기게 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수사께서 그리 생각한다면 노부가 일단 2개를 갖고 있겠습니다.”
다들 정핵을 넣어두자 소녀가 차분히 나섰다.
“자, 이제 움직이실까요?”
“물론입니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한립이 동의하자 소녀가 즉시 무어라 명을 내렸다.
놀랍게도 수라주 족인 중 하나가 빙글 돌아 커다란 검은 매로 변신해 소녀와 수라주 족모 등 성벽 위에 모인 족인들을 태우고 날아올랐다.
“우리도 출발하시죠.”
한립이 푸른 거대 비차를 꺼내 먼저 올랐다. 이에 막간리와 혈연, 흑린도 뒤처지지 않고 분분히 날아올라 비차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거대 매와 비차가 쏘아져 나가 하늘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반나절 후, 끝이 보이지 않는 대양 위를 검은 바람과 푸른 기운 덩어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바다 속 해수들은 두 물체의 기운을 감지하고 멀리 달아나기 급급했다.
돌연 검은 바람이 속도를 줄이고 강철 깃털을 지닌 검은 매가 나타났다.
“벌써 도착한 것입니까?”
뒤쪽의 푸른빛이 가시고 비차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형, 한담은 전방의 섬에 있습니다. 때가 되면 모두 최선을 다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매에 탄 핏빛 치마 소녀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답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해 다행입니다. 더 멀리 갔으면 저희도 어쩔 수 없이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을 테니까요.”
“하하, 여기까지 와서 저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나머지 정핵을 손에 넣기 전까지 어찌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한립의 느긋한 대답에 소녀가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전방에 검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섬들이 무리를 이룬 군도(群島)가 보였다.
섬들은 크기도 다르고 경치도 완전히 달랐다. 밀림이 울창한 섬도 있었고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 섬도 있었다.
“이곳의 천지원기 분포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각기 다른 속성의 천지원기가 머물고 있군요.”
막간리가 신기하다는 듯 섬들을 둘러보았다.
“앵화 수사, 금제 파동도 있는데 이곳은 뭐하는 곳입니까?”
혈연도 의식으로 섬을 훑고는 놀라 물었다.
“괜한 걱정을 하십니다. 이곳은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전투장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진법과 금제가 남아 있는 것이고요. 대부분 망가진 터라 그다지 위협은 되지 않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수라주 족모가 냉소했다.
“과연 망가진 금제들입니다. 원래 효력의 100분의 1밖에는 내지 못하겠군요.”
막간리가 의식으로 살펴보고 마음을 놓았다.
“허허, 수사의 말대로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혈연도 얼굴을 풀고 웃음을 흘렸다.
거대 매와 비차는 멈추지 않고 군섬이 있는 해역으로 진입했다.
수라주 일족은 이곳 지형에 익숙한지 고공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틀어 금제가 남아 있는 부분을 피해 날아다녔다.
한 시진 후 공기가 서늘해지고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섬이 눈앞에 나타났다.
멀리서 보니 만여 리의 거대한 섬이 거위 털 같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높고 험준한 산봉우리도 여럿 보였다.
“이곳입니다! 저 산골짜기 속에 한담이 있습니다. 어서 가시죠.”
소녀가 들뜬 모습으로 먼저 섬으로 향했고, 한립 일행이 그 뒤를 쫓았다.
* * *
일다경 후, 그들은 두껍게 눈이 쌓인 골짜기 속에 떠있었고 거대 매와 비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 한담이란 곳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흑린이 의식으로 주변을 훑으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흑린 수사, 이곳이 외지기는 해도 본족의 중요한 보물이 있는 곳인데 그냥 놔두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진법으로 가려 두었습니다. 여봐라, 환진을 거두어라.”
수라주 족모가 무표정한 얼굴로 명을 내렸다. 네 명의 성년 수라주 중 두 명이 산골짜기 구석으로 날아갔다.
한 명은 사각형의 곱게 생긴 진법 원반을 꺼내고, 다른 한 명은 입에서 하얀 깃발을 뱉어냈다. 그들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보물들을 던졌다.
파팟!
사각형 진법 원반이 빙글 돌아 오색 주술문자를 흩날리고 하얀 깃발은 거대한 백호 허상을 만들어냈다.
입을 쩍 벌린 백호가 산골짜기 구석으로 투명한 빛기둥을 쏘아 보내고 오색 주술문자는 흩날리는 눈 속으로 스며들어 같은 곳으로 향했다.
산골짜기 구석이 요란하게 빛나고 불현듯 대형 진법이 드러났다.
진법 곳곳에 다채로운 빛깔의 큼지막한 수정돌이 박혀 있었고 중간에 현빙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탑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한담입니까?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돌기둥 모양의 탑을 보고 혈연이 미간을 좁혔다.
“진법과 극도의 양기를 품은 보물들로 한기를 봉해 둔 겁니다. 봉인이 풀리면 섬 전체는 물론 인근 해역까지 얼어붙어 봉인이 될 테고요.”
수라주 족모가 혈연을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 위력적이란 말입니까?”
막간리가 안색이 변해 중얼거렸다.
“어떤지는 보면 알겠지요. 나 수사 한담을 열어 직접 살피게 해주시지요.”
한립이 차분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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