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1화. 시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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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거원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인이 등장해 빠른 속도로 석성으로 떨어져 내렸다.
둔광이 번득이고 석성 보호막 인근에 도착한 소인은 달아나기 직전이었다.
‘헉!’
이때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노인의 원영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추락할 뻔했다.
소인의 둔광이 흩어지고 비틀거리는 사이 허공에 노란 빛들이 나타나 수정 가루로 변해 모래 돌풍으로 원영을 가두었다.
빠드득! 빠각!
모래 돌풍에 갇힌 소인에게서 뼈와 살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압력에 그대로 몸이 터져 버릴 듯했다.
주변의 무시무시한 압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머지않은 곳에 금털 거원이 떠있었고 그 머리 위로 두 척 가량의 소인이 보였다. 소인은 손바닥을 펴고 작은 호리병박을 빙글빙글 회전시키고 있었다.
호리병박 속에서 노란 안개가 한 줄기씩 빠져나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은 진작 혁 노인이 달아날 것을 알고 대성한 원영을 몸 밖으로 꺼내 새로 얻은 보물인 ‘열살금강사’를 배치해 두었었다.
노인의 원영은 아직도 현묘한 신통이 남아 있었지만 한립의 허를 찌르는 공격에 모래 돌풍에 갇혀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때 아래쪽 핏빛 치마 소녀가 나섰다.
퍼퍼펑!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돌연 그녀 주변의 늑대 머리 괴물들이 터져 핏빛 안개로 변해 노인의 원영을 감쌌다.
혁 노인은 몸에서 느껴지던 끔직한 압력이 사라지자 작은 수정 공작으로 변해 오색 화염을 흩날렸다.
이를 지켜보던 한립의 원영은 노란 호리병박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앗!
강렬한 노란빛이 번지고 수많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랐다.
쿠릉!
노인의 원영을 가두고 있던 모래 돌풍이 몇 배로 두꺼워지고 그 안에서 주먹 크기의 수정 알갱이들이 뭉쳐져 괴이한 금제 파동을 내뿜었다.
동시에 돌풍 옆으로 커다란 금색 신형이 이동해왔다.
한립의 범성금신이었다.
금신은 나타나자마자 여섯 개의 팔에 든 도(刀), 검(劍), 지팡이(杖), 고리(環), 절굿공이(杵), 손잡이가 달린 기다란 사각 봉 형태의 무기를 돌풍 중심을 향해 휘둘렀다.
쿠콰쾅!
돌풍을 뚫고 들어간 병장기들은 금빛 폭발을 일으켰고 혼잡한 파동은 사방팔방으로 전해졌다.
거원 머리 위의 원영은 금빛을 뚫어져라 주시하다 소매 속의 작은 손으로 수결을 맺으려다 멈췄다.
팟!
핏빛 치마 소녀 옆에서 파동이 일어나더니 날개 반쪽이 잘려나간 초소형 공작이 날아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앵화 수사, 어서 날 구해주게! 오직 자네의 물령회삭신통만이 노부의 원영을 되돌릴 수 있을 게야! 원영만 회복되면 내 엄청난 대가를 약조하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작새가 소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몸의 일부가 사라지고 기운이 극도로 약해져 있어 언제라도 흩어져 소멸할 것만 같았다.
소녀의 도움으로 원신 본체가 위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열살금강사의 괴이한 힘과 범성금신의 병장기 공격에 중상을 입고 말았다.
소녀가 당장 시간의 힘으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대승기 밑으로 수행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그러죠.”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노인의 원영을 보고 한 손으로 허공을 쳤다.
펑!
섬섬옥수가 향한 방향은 뜻밖에도 원영의 머리 쪽이었다.
“감히!”
노인의 원영이 흐릿하게 변해 그대로 사라지려 했다. 그때 소녀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똑같이 손을 흐릿하게 변해 허공으로 녹아드는 소인을 잡아챘다.
휘릭!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핏빛 실들이 소인을 단단히 묶었다.
“시공법칙! 이건 진정한 시공법칙일 텐데, 설마 벌써 두 가지 법칙의 힘을 하나로 융합했단 말이냐!”
“하하, 시공법칙은 벌써 백 년 전에 깨우쳤습니다. 그저 수행이 부족해 더 높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요. 이제 사백님의 원영을 얻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핏빛 치마 소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혈홍색 깃발을 불러냈다.
“견혼번(牽魂幡), 노부에게 화혼대법(化魂大法)을 펼치겠단 것이냐! 나 수사, 어서 앵화 수사를 말려주십시오! 내가 없으면 앞으로 어찌 공어족 정핵을 연화시켜 공간의 힘을 얻으려고 그러십니까. 게다가 노부가 없으면 이 위기상황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혈홍색 깃발을 본 노인의 원영이 공포로 물들어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는 미부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수라주 족모도 상황을 파악하고 깜짝 놀라 세 화신을 물려 하나로 융합해 미부인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여러 보물로 잠시 몸을 보호하고 조급히 핏빛 치마 소녀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앵화야, 뭘 하려는 것이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전력을 포기해! 어서 혁 수사를 놔주고 시공의 힘으로 육체를 회복하게 도와주거라. 무슨 일이든 눈앞의 강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급하지는 않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공간의 힘을 제련해내는 방법은 벌써 혁 백부의 직전 제자를 통해 알아냈고, 적들도 물러나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소녀는 미부인의 분노한 표정도 개의치 않고 핏빛 실에 구속된 노인의 원영을 향해 빙긋 웃음 지었다.
이에 핏빛 실에서 괴이한 금제의 힘이 퍼지자 노인의 원영은 악독한 표정을 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석성 밖의 한립은 ‘시공의 힘’이란 말을 듣고 마음에 파문이 일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원영을 불러들여 범성금신과 함께 석성 금제에 맹공을 펼치려 했다.
바로 그때 소녀가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다. 동시에 표정이 달라진 거원이 수결을 맺고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왔고 범성금신은 그의 몸으로 뛰어들어 하나가 되었다.
석성 위 소녀가 한립을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짓더니 혈홍색 깃발을 투척했다.
펑!
소녀의 주술소리에 주변의 늑대 머리 괴물들이 분분히 핏빛 안개로 흩어져 깃발 속으로 흡수되었다.
핏빛 깃발이 커다랗게 변해 펄럭이는 천에 어렴풋이 흉악한 악귀 얼굴이 떠올랐다.
굽은 뿔이 자라난 악귀 얼굴은 좌우가 판이하게 달랐다. 한쪽은 추악하게 생긴 사내의 얼굴이었고, 다른 한쪽은 더없이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었다.
키키키키킥!
악귀 얼굴이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입에서 핏빛 기운을 방출했다.
노인의 원영은 깃발에 어린 악귀 얼굴을 보고 혼비백산해 소녀를 향해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곧 핏빛 안개에 휩싸여 정신을 잃고는 악귀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소녀가 두 손으로 여러 가지 수결을 맺어가며 핏빛 깃발을 가리켰다.
악귀 얼굴이 핏빛 기운 속에서 종적을 감추고 깃발은 줄어들어 소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성공했습니다! 모친 대인, 더는 싸우실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서 찬찬히 저 수사들과 상의하시지요.”
소녀는 법결을 거두고 만족스럽게 한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미부인을 향해 말했다.
“네가 이렇게 할 줄이야! 됐다. 네가 저 외지인들을 어찌 설득하는지 보자꾸나.”
수라주 족모는 소녀가 노인의 원영을 핏빛 깃발에 가두는 것을 보고 안색이 수시로 달라졌지만 노기를 거두고 석성 쪽으로 내려갔다.
혈연과 흑린이 그녀를 놓치지 않고 보물과 신통으로 공격을 하려는데 한립의 전음이 들려왔다.
“두 분은 그만하시지요. 앵화 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싸워도 늦지 않을 겁니다.”
“한 형, 그게 무슨 뜻입니까?”
혈연이 동작을 멈추고 신중히 물었다. 그가 보인 엄청난 실력에 이전처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쪽에서 우리에게 정핵을 내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필요한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게 정말입니까? 괜히 시간을 끌려는 수작은 아니겠지요?”
“거짓말이라면 다시 공격을 재개하면 그만입니다. 이 정도 시간을 끈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고요.”
“알겠습니다. 수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 선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흑린과 전음으로 상의한 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쉽게 수긍한 것은 수라주 족모와 싸울 때 완벽히 승기를 잡기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둔광을 일으켜 한립 쪽으로 이동해 왔다.
다만 막간리는 너무 멀리 가있어 따로 소식을 보내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렸기 때문이다.
석성에서 열댓 개의 둔광이 날아올라 석성 위에 섰다. 수라주 합체기 존재들이었다.
석성 안에서 금제를 조종하던 수라주 족인들이 나선 것에 혈연과 흑린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상대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은 진심인 것 같았다.
수라주 족모도 소녀 곁에 나타나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혁 수사를 제압했고 외지인도 알아서 처리하겠다니 막지는 않겠다. 허나 진작 시공의 힘을 융합한 일에 대해서는 내게 설명해야 할 것이야.”
“이 일을 마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앵화가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그리 자신이 있다니 맡겨보마.”
수라주 족모가 잠시 머뭇거리다 복잡한 표정으로 결정을 내렸다. 다른 수라주 족인들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
소녀는 핏빛 둔광을 일으켜 홀로 석성 금제 밖으로 나서 한립 등 세 명의 대승기 수사와 마주섰다.
혈연과 흑린은 이채를 띠고 시선을 마주쳤고, 한립이 잠시 눈을 빛내다 먼저 입을 열었다.
“합체기 수행으로 담도 크십니다.”
“제가 홀로 나섰을 때는 세 분이 협공해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감히 세 분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다 말씀드릴 수는 없어도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능력은 된다고 봅니다.”
“뭐라?”
흑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오만한 말이지만 우리가 협공해도 그녀를 죽일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융합한 최상급의 법칙의 힘을 다루니까요.”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설명했다.
“시공법칙이요?”
“수라주는 기껏해야 시간의 힘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것 아니었습니까? 어찌 시공의 힘을 장악했단 말입니까!”
혈연과 흑인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
“두 분도 시공의 힘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다니 제가 싸움을 멈추고 협상을 하려한 의도를 이해하시겠군요.”
한립의 말에 혈연이 흑린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저 여인이 뜻밖에도 시공법칙의 힘을 깨달았다면 확실히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도록 하지요. 허나 이번 여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면 우리 형제는 그냥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수사도 제 일행의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조건을 제시할 기회는 드리겠지만 우리 쪽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제안이라면 수사는 몰라도 다른 족인들은 달아나지 못할 겁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를 응시했다.
“흥, 계속 싸웠다면 분명 이겼을 거라 자신하는 말투입니다. 어디 그게 그리 쉬울까요?”
“그런가요? 그럼 계속 싸워보시던가요.”
성벽 위의 미부인이 인상을 찡그리고 끼어들자 흑린도 눈을 부라렸다.
“괜한 말로 서로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듣자니 여러분은 본족의 정핵을 얻기 위해 이곳 계면에 들어온 것이라던데,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정핵만 손에 넣으면 얌전히 이곳을 떠나시겠군요.”
소녀가 손을 들어 둘 사이의 말다툼을 막으며 한립을 향해 말했다.
“맞습니다. 오직 성년이 된 귀족의 정핵이 있어야 합니다. 수사께서 전음으로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거라 하셨습니다.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한립의 말에 미부인과 그 자리에 있던 수라주 족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정핵을 잃으면 죽지는 않아도 원기를 크게 상했다.
“저와 제 족인들이 자신의 정핵을 내놓는 것은 당연히 불가합니다. 허나 일족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보존해놓은 다른 성년 족인들의 정핵은 내드릴 수 있지요.”
“뭐라는 것이냐! 안 된다, 그건 따로 귀히 쓸 데가 있거늘.”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기도 전에 수라주 족모가 반대했다. 이에 소녀가 미간을 좁히며 전음을 보냈다.
“전 이미 시공의 힘을 깨달았습니다. 때가 되면 법칙의 힘을 모친 대인께 전수해드릴 방법이 있고요. 이제 그 정핵들은 꼭 필요하진 않습니다. 거기다 제가 그냥 정핵을 넘겨준다고 한 것도 아니고요.”
“네 말은…….”
“공어족의 그 성물(聖物)을 잊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인원이 부족해 어쩌지 못하고 잊지 않았습니까. 그걸 손에 넣으면 정핵들 보다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두 법칙 중 공간의 힘이야말로 우리 일족이 깨우쳐야 할 법칙의 힘이란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것만 얻으면 공간의 힘을 한층 더 깊이 깨우칠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
미부인도 마음이 혹하는 듯했다.
“원래는 시공법칙을 익히다 고비에 막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늙은이의 원영을 연화해 혼백을 보하고 괴물까지 손에 넣는다면 십중팔구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소녀는 주저 없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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