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9화. 수라주 전투 (4)
*
신기하게도 은색 초승달은 법칙의 힘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고 혁 노인을 감싸고 있는 오색 보호막을 사정없이 갈랐다.
쿠르르르릉!
거대 초승달이 부르르 떨며 폭발을 일으켰고 은색 빛 알갱이들로 흩어졌다. 이때 또 다른 법칙의 힘이 보호막이 갖고 있는 시간법칙을 찢어냈다.
두 법칙의 힘이 교전하는 동안 은색 광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일대를 밝혔다. 격렬한 파동에 돌풍이 일고 거대한 풍룡처럼 회오리바람이 일어 난동을 부렸다.
이 공격으로 거원의 몸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기운은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험악한 눈빛으로 암녹색 거검을 단단히 쥐고 또 휘둘렀다!
휘이잉!
이번에 목검을 빠져나온 것은 은색 초승달이 아니라 녹색의 검기였다. 검기는 회전을 시작해 칼날 고리로 변한 다음 강렬한 법칙의 힘을 발산했다.
“베어라.”
거원의 미간에 새까만 요목이 나타나자 한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표면에 은빛 주술문자가 반짝이고 칼날 고리가 사라져 광채를 가운데 두고 소리 없이 떠올랐다.
칼날 고리는 은색 광채를 품고 하얀빛을 분출했다.
서걱!
광채가 상하로 갈라져 두 동강이 났다.
은색 광채뿐만 아니라 허공도 녹색 실선을 그리며 잘려나가 어두컴컴해졌다.
빛이 가시자 은색 광채 내부의 상황이 보였는데 녹색 선을 기준으로 윗부분은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러나 실체화된 오색 보호막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문제는 녹색 선 아래쪽에 시커먼 공간균열이 생겨나 그 안에서 발산된 공간의 힘 때문에 광풍이 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천기 현상에 다른 쪽에서 싸우던 이들도 의식으로 이곳을 살피느라 동작이 느려졌다. 그 모습에 수라주는 화들짝 놀랐고 막간리 등은 희색을 드러냈다.
공작새 얼굴을 한 괴인은 죽지 않았으나 하반신이 사라지고 오색 보호막 속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방패를 조종하고 있었다.
수정 벽처럼 단단한 방패가 오색 주술문자를 미친 듯이 뿜어내 아래쪽의 시커먼 공간의 힘에 대항했다.
“현천의 보물……. 온전한 현천의 보물이 아니라면 노부의 시간 신통이 깨졌을 리가 없었을 텐데!”
혁 노인은 거원 수중의 암녹색 목검을 노려보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천의 보물은 한 계면을 통틀어도 몇 안 되는 보물이었기에 대승기 수사들은 현천잔보 한두 개나 모조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 대다수였다.
혁 노인은 대승기 수사들 중에서도 그 실력이 발군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아 현천의 보물은 지니지 못했다.
현천참령검의 공격을 연달아 두 번이나 버텨냈다는 것만 봐도 상대가 비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지요. 수사 역시 그 수정 검들이 아니었으면 시간의 법칙을 발동하지 못했을 게 아닙니까.”
거원이 두 번째 공격을 마치고 크기가 줄어들어 한 걸음 내딛었다.
펑!
공간이 진동하고 거원의 신형이 백여 장을 뛰어넘어 혁 노인 위에 나타났다. 천지원기가 출렁이는 곳에서도 거원은 주저 없이 암녹색 장검을 휘둘러 세 번째 공격을 가했다.
은빛 검기가 빠져나와 밝은 달처럼 떨어져 내렸고 음산한 법칙의 힘이 몰아쳤다. 그 모습에 혁 노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어찌 현천의 보물을 세 번이나!’
현천의 보물은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진원의 힘을 소모했고 육체가 감당해야할 부담도 막중했다.
몸이 약한 대승기 수사라면 전력으로 한 번을 사용하고도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날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공격이었지만 혁 노인도 손 놓고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호히 입술을 깨물고 방패를 향해 정혈 몇 모금을 뿜어 흡수시켰다.
“나 수사, 어서 앵화 수사를 불러내지 않고 뭐하는 겁니까!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단 말입니다!”
그는 수라주 족모를 향해 소리쳤다. 이때 미부인은 수백 개의 푸른 바늘로 상대편의 혈연, 흑린과 비등비등하게 싸우며 대치국면에 있었다.
안 그래도 의식으로 노인 쪽을 주시하던 수라주 족모가 화가 난 노인의 목소리에 눈빛이 흔들리다 소매 속에서 붉은 옥패를 꺼내 부서트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선 막간리가 영총 두 마리와 여덟 가지 보물을 가지고 성년 수라주들을 상대하며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오래 버티지 못할 듯했다.
* * *
같은 시각 석성 지하.
“……어째서?”
금제로 층층이 둘러싸인 밀실 안에서 양손에 수정 방망이 같은 물건을 쥔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밀실 밖 입구에는 열댓 개의 혈홍색 구슬들이 떠서 맑게 진동하고 있었다.
구슬 표면에 빛이 반짝이고 하얀 균열들을 만들어내자,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때문에 당장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듯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 * *
수정 방패가 수정 검 다섯 자루로 변해 교차하며 떨어져 내리는 은빛 달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오색 보호막은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혁 노인의 등에서 오색 날개가 자라났고 절반만 남은 괴인은 석성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눈빛이 서늘해진 거원이 암녹색 목검을 흔들자 은빛 달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떨치며 오색 수정검들이 발산하는 법칙의 힘을 깼다.
수정 검들 중 네 개가 애달피 울며 빛알갱이로 흩어지고, 하나만 어둑하게 변해 고공에서 추락했다.
마지막 남은 수정 검은 모래 바닥으로 숨어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콰릉!
달아나던 혁 노인 앞에 뇌전이 번득이고 삼두육비 거원이 앞을 막아섰다.
거원은 열반성체의 변신을 풀고 평범한 범성금신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거원이 커다란 주먹 여섯 개를 내질렀다.
그러자 허공에 금빛덩이 여섯 개가 모여 금색 소용돌이를 이루고는 바삐 날아든 노인을 가뒀다.
당황한 혁 노인은 이를 악 물고 등 뒤의 날개 한쪽으로 자신의 팔을 베어냈다.
소리 없이 흘러내린 한 팔이 펑 하고 스스로 터져 핏빛 인영으로 변하더니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했다.
쿠르릉!
폭음과 함께 금색 소용돌이 속에서 핏빛 인영이 잘게 부스러졌다. 그 덕에 소용돌이가 잠시 주춤한 사이 노인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에 거원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고 몸을 돌려 여러 겹의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석성의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핏빛이 응결해 상반신만 남은 혁 노인이 나타났다. 이제 공작의 머리가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반짝인 거원이 커다란 입을 달싹여 혼잣말을 했다.
“화겁대법(化劫大法)?”
방금 전 노인이 펼친 비술은 그가 이전에 수련한 적 있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화겁대법과 흡사했다. 똑같은 비술은 아니겠지만 그가 익힌 것과 뿌리는 같을 것이다.
성벽 위의 혁 노인은 원기를 크게 상했는지 거원을 노려보면서 서둘러 품에서 여러 약병을 꺼내 단약을 복용하고 잘려나간 몸 곳곳에 부적을 붙였다.
파아앗!
노인의 주술 소리가 울려 퍼지자 허리를 시작으로 두 다리에 핏빛 안개가 뭉쳐져 피와 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회복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듯했다.
이에 거원은 세 개의 손을 뒤집어 푸른색과 검은색 울긋불긋한 산봉우리를 꺼내 투척했다. 나머지 세 개의 손으로는 푸른 장검을 들고 석성을 베었다.
우웅!
쉬쉬쉬쉭!
세 개의 산봉우리가 떨어지고 무수히 많은 푸른 검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쿠쿠쿠쿠쿵!
성벽 밖 층층이 쌓인 보호막이 맹공에 마구 흔들렸다.
보호 금제는 비처럼 쏟아지는 공격에 하나씩 깨져나가다 결국 한 겹 밖에 남지 않았다.
성벽에 선 혁 노인이 눈앞이 깜깜해 지려는데 석성 안에서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친 대인, 혁 사백님! 제가 폐관에 들어간 지 몇 해나 되었다고 이리 당하시고 계십니까.”
석성에서 십여 개의 핏빛 그림자가 떠올라 안개 덩어리로 변했다. 안개의 파도가 보호막 밖에서 밀려드는 검기와 세 개의 극산의 힘을 대부분 막아냈다.
그 덕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석성의 금제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한립은 갑작스런 사태에 대노해 엄청난 굵기의 금색 뇌전을 분출했다.
콰르릉!
뇌전이 닿는 곳마다 코를 찌르는 탄내를 풍기며 핏빛 안개가 제거되었다.
“벽사신뢰!”
남은 핏빛 속에서 누군가 놀라 중얼거렸지만 곧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핏빛이 뭉쳐져 핏빛 치마를 입은 소녀와 늑대 머리에 곰의 몸을 지닌 괴물들로 변했다.
열대여섯 정로도 보이는 소녀는 손에 비취색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나긋나긋한 자태와 촉촉한 눈빛이 무척 매혹적이었다.
한립처럼 굳센 의지를 지닌 자도 순간적으로 미혹시키는 분위기를 풍겼다. 흠칫 놀란 그는 연신결을 운용해 정신을 맑게 하고 신중하게 소녀를 살폈다.
“합체 후기?”
그녀가 내보인 실력은 대승기 수행에 버금갔는데 합체기 수행밖에 지니고 있지 않아 의문이 들었다. 또한 나머지 십여 마리 낭두웅신(狼頭熊身)의 괴물들도 합체 중기의 수행을 지녀 전부 모여 평범한 대승기 수사에 맞먹는 기운을 풍겼다.
한립은 소녀의 정체를 추측하며 공격을 일시 중단했다. 하늘을 꽉 채운 검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산봉우리들은 고공에서 멈추었다.
“당신도 수라주 일족입니까?”
거원이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의 기운은 수라주와 비슷했지만 또 다른 익숙한 기운이 공존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건화지의 공어족과 흡사했다.
“제가 이 성의 소주(少主)입니다. 여러분들은 외부 계면에서 오신 분들이겠지요. 본 족이 누를 끼치지 않았다면 굳이 서로 피를 볼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보심이 어떨지요?”
촉촉한 눈빛으로 미소를 짓는 소녀는 한립을 동배로 대했다. 대승기 수사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귀 종족의 정핵을 내주지 않는다면 제가 그 제안을 수락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거원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소녀가 표정이 변해 무어라 말하려는데 수라주 족모가 멀리서 외쳤다.
“앵화야, 시간 낭비할 것 없다! 저들은 우리 일족의 법칙신통을 노리고 온 자들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지 협상의 여지는 없다!”
수라주 족모의 말에 소녀가 난색을 표하며 탄식했다.
“어떻게든 좋게 해결을 하려 했으나 안 되겠군요. 그렇다면 제가 무례를 범해도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이건!’
한립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즉시 두 발로 허공을 박차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핏빛 기운을 머금은 거대 발톱이 나타나 그를 할퀴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눈앞이 핏빛으로 번득인다고 느낀 순간 한립은 핏빛 안개에 둘러싸였다. 안개가 꿈틀거리고 또 다른 핏빛 치마 소녀로 변해 미소를 지었다.
석성 보호막 안에 있던 ‘앵화’는 모호하게 낭두웅신의 괴물 중 한 마리로 변해있었다. 이에 한립은 가슴이 철렁해 재빨리 손끝에서 푸른빛을 날렸다.
푸른 빛줄기가 순간이동을 하듯 소녀 앞에 나타나 쾌속으로 휘감았다.
놀랍게도 푸른 빛줄기에 휩싸인 앵화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괴이한 미소를 짓고 한 손을 펼쳤다.
한립이 검결을 재촉하자 푸른 빛줄기가 교룡으로 변해 소녀를 한 입에 삼켰다.
펑!
그러나 소녀의 웃음소리가 울리며 체내에서 핏빛 실들이 뚫고 나와 푸른 교룡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거원은 괴성을 지르며 털이 북슬북슬한 손바닥으로 허공을 내리쳤다.
격렬한 공간 파동과 함께 금빛 뇌전에 치직거리는 거대 손이 나타나 핏빛 실들을 덮쳤다.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금빛 뇌전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불가사의한 신통을 지닌 소녀도 그 엄청난 힘 앞에 굳은 얼굴로 육신이 붕괴되어 매몰되었다. 빛이 가신 자리에는 암담해진 푸른 비검 한 자루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 석성 금제 내부에서 낭수웅신의 괴물이 펑 하고 터져 핏빛 속에서 미소를 머금은 소녀로 변해 다시 나타났다.
거원이 놀라 서둘러 비검을 불러들이고 자세히 살폈다. 청죽봉운검의 표면이 붉게 물들어 푸른빛이 희미해져 있었다.
콰릉!
거원은 눈을 번득이며 손끝에서 금색 뇌전을 일으켜 붉은 흔적을 털어내고 푸른 기운을 다시 왕성하게 만들었다.
“혈령술(血靈術)과 같은 사악한 혈도(血道) 공법이라! 제 본명 비검이 오염 될 만도 했습니다.”
거원이 비검을 체내로 돌려놓으며 소리쳤다.
“혈령술을 다 아십니까? 저도 수사의 본명 비검이 금뢰죽으로 제련된 보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더 강력한 신통으로 수사와 실력을 겨뤄야겠군요.”
핏빛 치마 소녀는 한립이 간단히 비검의 영성을 되돌리는 것을 보고 놀랍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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