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6화. 수라주 전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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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화를 말씀하신다면 절대 안 될 말입니다. 수련의 중요한 고비에 있는데다 우리 일이 성공할지 실패할 지가 그 아이에게 달려 있어요.”
혁 노인의 말에 수라주 족모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혁 노인이 그녀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앵화 선자의 수련이 중요한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만일 외지의 대승기 수사들에게 패해 성이 화를 입는다면 그녀가 무사히 수련을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수련을 중단하고 나서야겠지요. 그럴 바에야 미리 경고라도 해두자는 것입니다. 외지 대승기 수사들을 잘 막아내면 당연히 앵화 선자도 출관할 필요가 없을 테고요.”
“폐관수련에 들어가기 전, 이번 수련은 무척 중요하니 무슨 일이 발생해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제가 고민해본 뒤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그냥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도 심경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저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 며칠 동안은 반드시 귀 족의 금제를 전부 발동하고 금공금제의 영역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
혁 노인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영화 선자가 수라주 족모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았기에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쿠쿠쿵!
한 시진이 흐르고 산맥의 수라주 석성에서 다양한 빛깔의 기운이 솟아 겹겹이 금제를 이루었다. 그리고 흙 속에서 석성이 통째로 뽑혀나아 서서히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얼마 후 석성이 있던 자리에는 거무튀튀한 구덩이밖에 남지 않았다. 구덩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목에 갑자기 푸른빛이 흐르고 녹색 피부를 지닌 청포 청년이 등장했다.
한립과 비슷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
그는 석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청년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푸른빛으로 변해 흙 속으로 스며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 * *
같은 시각, 초원 위를 지나는 하얀 선박 위에서 한립과 막간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혈연과 흑린은 선미(船尾)에 나란히 서서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표정이 달라진 한립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한 수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막간리가 한립의 변화를 느끼고 역시 눈을 떴다.
“아닙니다. 그저 이동 방향을 살짝 조정해야할 듯싶군요.”
“오, 그곳에 뭔가를 남겨 두신 모양입니다.”
“화신을 남겨 두었는데 소굴이 통째로 이동하고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리 멀리 가지 못했으니 전속력으로 날아가면 하루면 따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수사께서 생각이 있으시다니 노부는 안심입니다.”
“막 형과 다른 수사 분들의 도움이 있으니 수라주를 확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광음사를 얻어 막 형과 오 형의 도겁을 도울 수 있어야 할 텐데요.”
“허허, 그러기를 바라야지요. 그리 쉬운 싸움은 아닐 겁니다. 수라주들이 우리의 상대가 못 돼도 상대가 마음먹고 달아나면 정해진 시일 내로 잡기 어려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정말 그렇게 되면 골치가 아프겠군요! 이렇게 하시지요, 제게 합체기 괴뢰들이 있습니다. 수라주 족모 같은 강적을 상대하긴 무리지만 아직 대승기에 이르지 못한 성년 수라주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합체기 괴뢰요? 강력한 꼭두각시들의 보조를 받으면 노부도 성년 수라주 한두 마리 정도는 포획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원정으로 원하던 수확을 얻게 되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막간리가 밝은 얼굴로 답했다.
“수사와 저는 같은 동족에 인연도 깊은데 괴뢰 몇 마리 내드리는 것이 뭐가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한립은 빙긋 웃으며 검은 고리를 꺼내 막간리에게 넘겨주었다. 마계에서 얻은 합체급 마정괴뢰 몇 마리가 들어있는 저물탁이었다.
마정괴뢰 중 절반은 영계의 묵령성주에 남겨 두었고 나머지는 지니고 있었다. 막간리는 저물탁을 의식으로 살피고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죽음을 두려워 않는 합체급 꼭두각시가 동급의 성년 수라주들을 막아주면 여유롭게 강력한 신통을 발휘하며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 막간리는 저물탁 속의 마정괴뢰를 어떻게 조종하면 되는지 숙지했고 한립은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 * *
하루 뒤, 원래 석성이 있던 산맥 가장자리에 한립 일행의 선박이 나타났다.
선박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산맥 중심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 아래쪽의 은밀하게 숨겨진 동굴 안에서 그림자처럼 보이는 자가 고개를 들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선박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벼운 바람과 함께 은색 의복을 걸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각한 얼굴로 한립을 살피다 탄식하고는 곧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 * *
한편, 선박은 호수와 여러 숲을 지나 끝없이 펼쳐진 황토 고원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뱃머리에 자리 잡은 한립이 눈을 떴다.
“곧 도착합니다. 다들 준비하시지요.”
한립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막간리와 선미에 있던 혈연, 흑린 형제도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누른 흙먼지뿐이었고 석성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한 수사, 수라주 소굴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간을 찡그린 혈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여 리만 더 가면 보일 것이니 조급해 마시지요.”
“만여 리요?”
흑린이 얼른 손끝을 미간에 대고 방대한 의식을 방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종족 수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렇군요! 과연 앞쪽에 사막이 있고 모래와 자갈 속에 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세!”
혈연이 아우의 말을 듣고 입에서 검은 빛을 분출했다.
주먹 크기의 검은 향로에 가느다란 초가 하나 꽂혀 있었다. 딱 손가락 한 마디 밖에 안 되는 짧은 초는 피처럼 붉었다.
향로가 휘리릭 돌아 광풍을 타고 사람만 하게 커졌고 혈연의 입에서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와 향초에 불을 붙였다.
진한 피비린내가 퍼져나갔다.
혈연의 주술 소리와 함께 향로에서 귀곡성이 일었고 푸른빛이 그 주위를 어른 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8개의 핏빛 빛덩이가 나타났는데 각자 가부좌를 한 원영을 품고 있었다.
뽀얀 피부에 핏빛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진 원영들은 괴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에 옆에 선 흑린이 웃음을 흘리고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펑!
가죽 주머니 속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고공에서 거대한 먹구름을 만들었다.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 쉭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흑린의 두 소매에서 열댓 개의 새까만 기운이 빠져나와 허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막간리는 영수환 두 개를 꺼내 각각 새하얀 호랑이와 적홍색 불새를 불러냈다.
합체기에 상당하는 기운을 지닌 영총들이었다. 노인은 수결을 맺고 각양각색의 보물들을 꺼내 주위를 맴돌게 했다.
한립은 팔짱을 끼고 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선박은 적황색 사막 중심에 이르렀고 배가 멈춰 섰다. 혈연이 아래쪽 모래 언덕을 훑고 냉소했다.
“깨져라!”
그의 주위에 떠있던 원영들이 웃음기를 거두고 아래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콰르릉!
핏빛 빛기둥 8개가 선박을 떠나 아래로 쇄도했다.
빛기둥이 전부 모래 속으로 파고들자 모래와 자갈로 뒤덮인 대지에 균열이 일었다. 그 옆에서 흑린이 자금색 기다란 곤봉을 불러내 휘둘렀다.
쿠콰콰쾅!
거대 곤봉 허상이 강림해 지면을 강타했다. 땅이 극심하게 흔들리고 터져나가 사막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흑린은 광소를 터트리고 자금색 곤봉을 더 휘두르려는데 움푹 파인 사막에서 각양각색의 빛기둥들이 튀어나왔다.
쿠쿠쿠.
이어서 모래 바닥 깊은 곳에서 보호막으로 겹겹이 쌓인 석성이 떠올랐다.
석성 앞쪽의 높다란 석탑에 수라족 족모와 흑포 노인 등이 수백 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어두운 얼굴로 한립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 수라주가 귀하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입니까!”
수라족 족모가 분노가 치밀어 석성을 선박과 같은 고도에 멈추고 소리쳤다. 그들은 침입자들과 맞붙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상대의 흉흉한 기세로 보아 말로 해결할 문제는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병력을 생각하면 시간을 끌어야 했다.
“흐흐, 잘못이랄 것은 없고,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본래 수사의 일족에게 용건이 있어서입니다! 수사께서 수라주 정핵을 그냥 내주시겠다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일도 없을 겁니다.”
한립이 웃음을 머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이 흑린이 교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일족의 정핵을 노리고 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시간의 힘을 노리고 왔다는 뜻이겠군요.”
수라주 족모가 서늘하게 말했다.
“뭐,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합니다. 어떻습니까? 정핵을 내주시겠습니까?”
혈연이 담담히 물었다.
“헛소리!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소릴 하다니. 일족의 생사를 걸고 싸워보겠습니다. 공격!”
격분한 미부인은 호되게 소리쳤다. 이에 그녀 뒤로 서있던 족인들 중 대부분이 번뜩 사라지고 십여 명만 남았다.
전부 합체기 영기의 압력을 내뿜었고 그 중 네 명의 남녀는 거의 대승기 수사에 버금가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성년 수라주였다.
이에 막간리의 표정이 달라졌고 한립도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에 찾아왔을 때 석성에서 느낀 기운은 성년 수라주의 것이었다.
이때 혈연이 주저 않고 거대 향로를 튕겼다.
콰르릉!
향로의 피비린내가 심해지고 그 위로 떠오른 푸른빛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푸른빛들은 회전하며 주먹 크기의 커다란 벌로 변했다.
윙윙윙윙!
거대 벌들은 표면에 악귀 얼굴 모양의 문양이 떠올라 어른 거렸다.
“가라!”
혈연의 명령에 윙! 하고 수만 마리의 악귀 얼굴 벌들이 날아갔다. 그리고 성큼 선박에서 뛰어내린 혈연은 여덟 빛덩이에 휩싸여 석성과 선박 사이에 떠올랐다.
핏빛 속의 여덟 원영들이 입을 벌려 수라주 족모를 향해 빛기둥을 발사했다.
수라주 족모는 곁의 노인과 몇 마디를 나누려다 거침없이 공격을 해오는 적을 보고 한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앞에 금빛이 퍼져 여덟 개의 핏빛 빛기둥을 전부 막아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황금 방패였다.
한립과 혁 노인을 비롯한 나머지 수사들은 그들의 전투에 끼어들지 않았다. 악귀 얼굴 벌, 귀면봉(鬼面蜂)들이 미부인의 머리 위로 날아들어 푸른 구름처럼 내려앉았다.
수라주 족모는 위쪽으로 소매를 펄럭였고 십여 개의 하얀 빛이 구름을 마구 갈랐다.
퍼퍼퍼퍼펑!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귀면봉들이 연달아 폭발해 푸른빛으로 되돌아갔다. 혈연은 그것을 보고 놀라기는커녕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입에서 핏물이 날아가 거대 향로로 스며들었다.
향로 속 귀곡성이 또렷해지고 표면에 핏빛이 반짝였다. 불가사의하게도 멀리서 푸른빛들이 뭉쳐져 빼곡히 귀면봉들을 만들어냈다.
수라주 족모가 얼굴을 굳히고 다시 하얀빛으로 벌들을 공격하기 전에 귀면봉들은 흐릿하게 변해 사라졌다.
휘우우웅!
다음 순간 허공에서 광풍이 불고 바람의 칼날들이 나타나 미부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람의 칼날을 맞이한 수라주 족모는 긴장한 기색으로 손을 뻗어 황금 방패를 내밀었다.
황금 방패는 모호하게 보호막으로 변해 미부인을 완벽히 둘러쌌다. 이에 바람의 칼날들이 폭풍처럼 밀려들었지만 금빛 보호막은 출렁일 뿐 태산처럼 버텨내 공격을 막아냈다.
수라주 족모가 급히 황금 방패로 보호막을 만들고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아 훅! 하고 불어내는 것이 아닌가!
쿠르르릉!
새까만 머리카락이 미부인의 손을 벗어난 순간 열댓 마리의 거대한 구렁이로 변해 혈연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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