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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35화 (1,092/2,000)
  • 1335화. 소식

    *

    “흉물이 꽤 결단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달아나 버릴 줄은 몰랐군요.”

    한립은 이채를 띠었지만 흉수의 뒤를 쫓지는 않았다. 차읍자가 유명하기는 해도 그에게는 사실 필요치 않은데 힘들게 추살할 필요는 없었다.

    “지능이 있으니 수사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을 알고 바로 달아났나 봅니다.”

    괴수가 사라지고 막간리가 마음이 놓이는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막 형께서는 어쩌다 저 교활한 흉물에게 쫓기게 된 것입니까?”

    “하아, 운이 안 좋았습니다. 수라주의 행방을 찾다 우연히 거미류 괴수의 소굴에 들어갔는데 그 아래쪽에 차읍자가 숨어 있지 뭡니까. 그때부터 흉수에게 쫓겨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한립의 질문에 막간리가 멋쩍게 답했다. 대승기에 이르고 누군가에게 정신없이 쫓겨본 게 언제인 지 까마득했다.

    “이곳에 차읍자까지 있는 것을 보면 상고 수라계의 일부였을 거란 추측이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요! 저도 괴물을 마주치자마자 경전에 적힌 수라계를 떠올렸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수라주의 그림자도 찾아내지 못했으니 큰일입니다.”

    “하하! 막 형, 수라주의 위치는 제가 이미 찾아두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가볍게 웃음 짓는 한립을 보고 막간리가 크게 기뻐했다.

    “이런 일로 어찌 농을 하겠습니까.”

    “수사의 실력에 수라주를 찾았으면 벌써 광음사를 얻은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아, 그러면…….”

    “저 혼자서는 상대할 규모가 아니더군요.”

    “수라주 소굴에 성년이 된 수라주들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성년 수라주가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진령 급에 상당하는 수라주가 존재하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뭐라고요?”

    “그뿐이 아닙니다. 대승기 기운을 품은 자도 있었고, 성년 수라주도 셋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력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왔지요. 이런 상황에서 수라주를 상대하려면 반드시 함께 온 다른 수사들과 힘을 합쳐야 할 것입니다. 수라주들은 다른 강력한 괴수들도 굴복시켜 화신, 연허급은 물론 어쩌면 합체기 수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립은 진지하게 수라주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게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만으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려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겠어요.”

    막간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광음사를 얻으려면 협공이 필수입니다. 막 형, 오는 길에 혈연과 흑린 수사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흠, 만나지는 못했고 오는 길에 어떤 밀림에서 그들이 남긴 흔적은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는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말이군요. 어서 찾아봐야겠습니다.”

    “좋습니다. 따로따로 움직이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반나절 후, 이름 모를 산 정상에 한립과 막간리가 푸른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종족 대승기 수사들인 혈연과 흑린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한립은 수라주에 대해 알아낸 바를 상세히 알려주었고 힘을 모으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 수사 말대로라면 우리가 전부 몰려가도 승기를 잡기는 어려울 겁니다. 우리 형제가 수라주 족모나 또 다른 이종족 대승기 수사를 막아주면 나머지 수라주 전체를 한 수사와 막 수사께서 막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턱을 괸 혈연이 신중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막간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막 형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수라족 족모와 또 다른 진령에 버금가는 대승기 수사는 몰라도 나머지 성년 수라주 셋은 붙들어 둘 방법이 있습니다.”

    막간리가 고심 끝에 결연히 답했다.

    “그들을 데리고 그냥 시간만 끄신다고요? 그렇다면 한 수사가 나머지 두 강자 중 한 명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소립니까?”

    흑린이 힐끗 한립을 쳐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미덥지 않다는 눈초리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수라족 족모와 사내 중 누구를 맡고자하십니까?”

    한립이 당연하다는 듯 묻자 혈연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흑린과 시선을 교환했다.

    “뭐, 그러시다면야 저희 형제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한 형의 말을 들어보니 수라주 족모가 가장 강력한 듯하니 저희가 그녀를 맡지요. 그런데 우리가 수라주 정핵을 노리고 온 것은 아실 테고 이 물건은 어떻게 나눌 작정이십니까?”

    “간단합니다. 누구든 수라주를 죽이는 자가 그 정핵을 갖는 것으로 하지요.”

    한립의 대답에 막간리는 미세하게 표정이 변했고 혈연과 흑린은 흡족하게 웃었다.

    “한 수사는 결정이 빨라서 좋습니다. 그러다 손해를 볼까 걱정도 되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맡은 상대를 빨리 처리하면 먼저 성 안의 성년 수라주를 찾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때가 되면 양보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두 분이 족모를 처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응당 끼어들어 도움을 드릴 테고요.”

    “하하, 한 형께서 정말 우리 형제보다 상대를 빨리 처리하신다면 물론 그러셔도 됩니다. 절대 원망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해보시지요.”

    혈연이 자신 있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전에 사소하게 처리할 문제가 있습니다.”

    흑린이 고개를 끄덕이다 느닷없이 몸을 일으켰다.

    쾅!

    흑린이 허공 어딘가를 내려치고 무형의 괴력이 거대한 그물로 변했다. 희미한 노란색 신형이 그물 속에서 나타나 다급히 몸을 틀어 달아나려 했다.

    “이제와 달아나려 하다니 우릴 뭘로 보는 것이냐!”

    눈빛이 사나워진 흑린이 손바닥을 굽히자 노란 소인 위로 파동이 일고 새까만 손바닥이 나타났다.

    필사적으로 피하던 노란 소인은 결국 검은 손바닥에 잡혀 끌려왔다. 이제야 노란 신형의 모습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는 황포를 걸친 왜소한 청년이었다.

    당황한 얼굴의 소인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수결을 맺은 채 기합을 넣었다. 노란 기운을 터트린 소인의 몸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저 놈이!”

    대승기 수사인 흑린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빛이 날아갔으나 소인의 몸이 귀청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터진 후였다.

    황포 청년이 한 발 앞서 자폭한 것이다. 그 여파로 눈부신 빛과 파동에 검은 거대 손도 흔들렸다.

    “본 좌 앞에서 자폭하다니 담도 크구나!”

    흑린이 난색을 표하며 씩씩 거리다 거대 손을 흩어버렸다.

    “은신술이 뛰어난 잡니다. 자폭한 육체는 진짜가 아닌 듯하고요.”

    한립이 청년이 폭파한 지점을 훑고는 피식 웃었다.

    “본체가 아니란 말입니까?”

    막간리와 흑린은 그저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혈연이 가장 먼저 반응을 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분명 합체기 존재의 기운을 품고 있었으니 평범한 꼭두각시나 일반적인 화신은 아니겠으나 자폭의 여파가 너무 약하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더 있습니다! 폭발할 때 원영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혈연이 수긍하는 동안 흑린은 발을 굴러 검은 구름으로 변해 도처를 수색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흑린의 표정이 어두웠다.

    “감히 우릴 염탐하다니. 이번에는 운이 좋아 빠져나갔지만 내 손에 걸리면…….”

    “허허, 되었네. 우릴 엿보았어도 방음금제 때문에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을 게야.”

    아직도 씩씩 거리는 흑린을 향해 혈연이 손을 저었다.

    “수라주 족모가 보낸 자는 아니겠지요?”

    막간리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렇다 한들 또 어쩌겠습니까. 결국에는 실력으로 해결해야 할 텐데요.”

    “흑린 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허나 누군가 염탐하는 것을 알았으니 여기서 있을 게 아니라 밤을 새워서라도 빨리 수라주 소굴이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대비할 틈이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한립의 말에 혈연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을 했다.

    “가는 길에 비행법기에서 좌선만 해도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수라주 쪽에 시간을 덜 줄수록 우리에게 유리할 테고요.”

    “좋습니다. 원래는 반나절 동안 강력한 비술을 하나 준비하려 했는데, 한 형의 말을 들으니 먼저 움직여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더 중요할 듯합니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혈 형. 그럼 바로 출발하실까요?”

    한립이 가볍게 미소 짓고는 소매를 펄럭여 하얀 선박을 띄웠다.

    막간리와 혈연, 흑연 형제는 사양하지 않고 선박에 올랐고 한립이 수결을 맺자 하얀 선박은 빛줄기가 되어 쏘아져 나갔다…….

    일다경 후, 한립 일행이 있던 산에서 멀리 떨어진 어둑한 밀림 속.

    노란빛이 반짝이고 황포 청년이 거목에서 걸어 나와 선박이 사라진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몸을 숨겨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외지인들이 저렇게 강한데다 네 명이나 되다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대화 내용을 듣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냉소했다.

    “에이, 저들이 수라주 일족을 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식만 전하고 떠돌다 돌아가면 화를 피할 수 있을 텐데.”

    그는 결정을 내리고 입에서 우윳빛 목패를 꺼내 손끝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파앗.

    목패에서 은빛이 반짝이고 쌀알 크기의 은색 주술문자들이 스며들어 사라졌다.

    * * *

    동일한 시각, 수라주 소굴이 위치한 석성.

    웅웅!

    수라주 족모와 혁 노인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들 앞에 놓인 검은 제단이 진동하며 은색 빛을 내뿜었다. 수라주 족모가 얼른 법결을 던져 넣자 제단 위에 기운들이 뭉쳐져 은색 문자를 만들었다.

    “대승기 수사가 네 명!”

    “침입자에게 대승기 조력자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혁 노인과 족모가 안색이 변해 한 마디씩 했다.

    “아직 그들의 목적을 모르지만 대책을 세우기는 해야 합니다. 그렇지, 수하들은 전부 불러들이셨습니까?”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전부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지음습지(地陰濕地)에 담가 놓은 음시(陰尸) 아홉 마리도 금제를 풀어 두었고요. 이틀 내로 음시들이 성에 도착할 겁니다.”

    “잘 하셨습니다! 노부도 외진 곳에서 놓아기르던 영총(靈寵)들에게 돌아오라 전갈을 보냈습니다. 역시 성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이것만으로는 외지인들에게 이길 수 있다 확신할 수 없으니 차읍자에게 약간의 보수를 주고 잠시 성에 머물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노부와 차읍자가 약간의 교분이 있습니다.”

    “뭐라고요, 차읍자? 그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우리 수라주 일족을 호시탐탐 노리는 흉물인데 호랑이를 막으려 늑대를 불러드리는 격이 될 겁니다.”

    수라주 족모가 대뜸 얼굴을 찡그렸다.

    “노부도 차읍자의 악기가 귀 족의 기운과 상극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봤자 겨우 흉수에 불과합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차읍자가 무슨 짓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혁 노인의 이마의 주름이 깊어졌다.

    “차읍자를 불러들이려면 대가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렇겠죠, 노부의 생각에는…….”

    미부인이 조금 흔들리자 혁 노인이 생각해 놓은 바를 전음으로 말했다.

    “아니, 그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하하, 줄곧 부화시키지 못한 죽은 알에 불과합니다. 남겨 놔도 큰 쓸모가 없다면 이럴 때 쓰는 것도 좋겠지요.”

    “고민을 좀 해봐야합니다.”

    “알겠습니다. 나 수사께서 고민해보시겠다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시지요. 아, 혈지(血池) 그분에게도 연락을 취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힘을 빌려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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