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4화. 현무진혈(玄武眞血)
*
문을 나선 청년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난감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갑시다. 명을 받았으니 흩어져 가장 빠른 시일 내로 완수해야지요. 그 자의 동료들이라면 만만치 않은 강자일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만 형!”
은갑 청년이 상대방을 향해 포권을 했다.
“무영 형이 저를 염려해 주시는 것은 감사히 생각합니다만, 상만화신(上万化身)을 발동하면 대승기 수사를 만나도 달아날 자신이 있습니다. 무영 형이야 말로 은신술과 상극 신통을 지닌 적을 만날 때를 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왜소한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충고했다.
곧 은갑 청년은 광풍으로 변해 하늘로 떠오르고, 왜소한 청년은 펑! 하고 노란 빛으로 흩어졌다. 노란 빛 알갱이 속에 손톱 크기의 벌들이 가득했다.
휘잉!
윙윙윙윙!
광풍과 벌떼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 * *
전당 안.
녹의 부인과 혁 노인은 또 다른 일을 상의 중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노부는 공어족들을 전부 성 안으로 옮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쥐고 있어야 걱정을 덜겠어요.”
“그렇게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겁니다. 첫째로, 그들은 건화(乾火)의 땅에서만 장기적으로 생존이 가능하고. 둘째로 우리가 강제로 납치하려 들면 혈맥의 힘을 폭발해 전체족인이 자결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이제 와서 절대 우리에게 협조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노부가 최근 수련한 신통이 있습니다. 선자께서 약간의 인원 손실을 감수하실 수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혁 노인이 이마의 주름이 깊어진 채 말했다.
“그 손실이라 함은…….”
“물론 공어족 일부를 일컫는 것입니다.”
“안 될 말입니다! 안 그래도 소수인 그들을 어렵사리 지금의 규모로 불려 놓았습니다. 이 이상 종족의 수가 줄어들면 어느 세월에 그 일을 완수한단 말입니까? 아직 그들이 외부인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는데 괜히 스스로 비밀을 폭로하는 꼴이 될 지도 모르고요.”
미부인은 완강히 거부했다.
“큼, 그건 또 그렇습니다. 노부도 우연히 이 계면으로 흘러들어 공어족과 귀 족의 존재를 몰랐으면 상고비밀을 써먹을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나 수사께서 위험 감수를 원치 않으시니 그냥 인원을 더 파견해 건화지 감시를 강화하는 것으로 하지요.”
“저도 그리 할 작정이었습니다.”
혁 노인과 녹의 미부인이 의견 일치를 보고 구체적인 사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한립은 풍뢰시를 이용해 산맥을 벗어나 있었다.
콰릉!
뇌전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의식으로 산맥 방향을 훑어 추격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자신의 방대한 의식을 상대했고 정확한 수행도 모르는 상태로 쉽게 뒤쫓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렇듯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는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수를 둔 것은, 수라주 소굴의 정확한 위치와 대략적인 세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강자가 주위를 맴돈다는 것을 알면 수라족 족모와 대승기 수사들이 함부로 소굴을 떠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무턱대고 추격을 감행한다면 그는 거침없이 뒤로 돌아가 석성을 노렸을 것이다.
그는 산맥을 떠나며 쥐도 새도 모르게 손을 써 그들이 소굴을 떠나면 바로 알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저들이 쫓지 않으니 그 방법으로 상대편 정황을 감시하면 그만이었다.
수라주 일족의 세력은 그의 예상을 초월했다. 그 혼자 뛰어들기에는 득보다 실이 컸기에 막간리와 다른 수사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 * *
이틀 후, 호수 위.
한립은 고공에 떠서 정체 모를 거대 거북 괴수와 머리 둘 달린 검은 구렁이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등딱지에 푸른 이끼가 가득한 거북과 새까맣고 딱딱한 비늘을 지닌 쌍두(雙頭) 구렁이의 대결이었다.
두 괴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수 표면에 황금색 수초(水草)가 나풀거렸다.
절반은 물에 잠기고 위쪽만 수면 위로 노출된 풀에 주홍색 과실 3개가 달려 있어 달짝지근한 향을 풀풀 풍겼다.
그 황금 수초를 중심으로 잘려나간 괴수들의 시체가 족히 3, 40구는 되었다.
호수는 피로 물들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 중에서 지금 싸우고 있는 거북과 쌍두 구렁이가 가장 강한 두 마리임이 분명했다.
한립은 황금색 물풀에는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두 괴수만 흥미진진하게 살폈다.
거북이가 쌍두 구렁이에 물려 몸에서 짙은 남색 주술문자를 뱉어내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상고진령 현무수(玄武獸)의 혈맥을 타고난 짐승이었어! 내 경칩결이 또 한층 발전할 수 있겠는걸.”
그의 소매에서 푸른빛이 날아가 두 괴수 위로 떨어졌다.
푸른빛은 쌍두 구렁이를 휘리릭 돌아 산산조각 내버렸고, 거북이는 기겁해 호수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기려 들었다.
쉭!
그때 푸른빛이 방향을 틀어 거북을 따라 호수 속으로 파고들었다.
푸화확!
한립의 손짓에 호수가 출렁이고 푸른 밧줄에 묶인 거대 거북이가 떠올랐다.
펑!
푸른 밧줄은 실처럼 가느다랗게 변해 거북을 계속 조였고 거북괴수는 무수히 많은 살점으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그때 하얀 발우가 소리 없이 나타나 커다랗게 변해 거북의 살점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았다.
쉭!
한립이 손을 까딱하자 하얀 발우가 빠른 속도로 돌아오며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발우를 쥐고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떠올랐다.
방대한 체구치고는 현무진혈의 양은 그리 농염하지 않았지만 추출을 잘 해내면 경칩결을 수련하는데 쓸 수 있을 것이다.
거북 살점이 담긴 발우를 저물탁 안에 넣어둔 한립이 황금색 수초를 끌어왔다.
황금색 수초는 괴수들을 불러들이는데 퍽 신통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인근의 강대한 괴수들을 이렇게 많이 끌어들여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여도 이런 물건은 적당한 인물을 만나면 높은 값에 팔 수 있다.
은색 화염을 방출해 호수의 괴수 시체들을 재로 만든 한립은 바로 그곳을 떠나려 했다.
웅!
바로 그 순간 그의 품에서 무언가 진동했다. 이에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달걀 크기의 하얀 구슬을 쥐었다.
파앗!
구슬에서 하얀 기운이 흘러나와 쌀알 크기로 뭉쳐 반짝였다. 신중하게 그것을 살핀 한립은 당장 푸른 둔광을 일으켰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향이었다.
그 시각, 눈을 찌를 듯한 하얀 빛이 믿기 어려운 속도로 황원(荒原)의 고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쿠르릉!
그 뒤로 거대한 청록색 안개의 바다가 비슷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하얀 빛과 녹색 운해(雲海)는 그렇게 만 리를 쫓고 쫓겼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운해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거대 청록색 전갈과 남색 두꺼비 허상을 만들었다.
전갈은 꼬리를 휘둘러 청록색 빛기둥을 발산했고 두꺼비는 입을 벌려 주변을 신비한 힘으로 구속했다.
신비한 힘에 의해 공기가 무거워지고 하얀빛의 속도가 느려지자 청록색 빛기둥이 사납게 따라붙었다.
“이놈!”
하얀빛 안에서 노호성이 터지고 오색 주술문자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와 구속을 풀었다.
콰르릉!
동시에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적홍색 뇌전이 하얀빛을 빠져나가 청록색 빛기둥과 충돌했다. 그리고 둔중한 폭음을 남기고 빛기둥과 함께 흩어졌다.
하얀빛 속 인물은 중얼중얼 주술을 외며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하얀 깃발과 붉은 망치를 쥔 막간리였다.
인족 대승기 수사인 막간리는 몸 절반이 정체 모를 녹색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고 나머지는 괴이한 남색 얼음에 끼어있었다.
긴장된 기색으로 운해를 살피던 노인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뒤쪽의 전갈과 두꺼비 허상이 허물어지고 녹색 운해도 끈질기게 추적을 계속했다.
이렇게 둘 사이의 간격이 좁혀질 때마다 막간리는 번번이 두 보물로 간신히 운해의 공격을 막고 거리를 벌렸다.
추격전은 꼬박 하루 동안 이어졌다. 대승기 수사인 막간리도 잇달아 각종 술법과 신통을 펼치느라 법력의 절반을 소모했다.
얼마 전 법기의 반응으로 한립이 인근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진원을 상하더라도 강력한 한 방을 써야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막간리가 다시금 두 괴수 허상과 싸우고 있을 때 전방의 하늘 끝에서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왔다!’
그 모습에 노인은 더는 순간이동으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하얀 깃발을 던졌다. 깃발에서 하얀 기파가 흘러나와 두꺼운 빛의 장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붉은 망치로 뒤쪽의 허상을 공격했다. 한립이 온 것을 알고 그 동안 쫓기느라 고생한것에 대해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콰르릉!
하늘에 퍼져있던 먹구름이 천지원기의 힘에 의해 요동치고 거대한 붉은 뇌전이 두꺼비 허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붉은 뇌전에 휩싸인 두꺼비 허상이 흐릿하게 변해 펑 하고 터져버렸다.
괴이한 일은 멀쩡하게 있던 전갈 허상까지 날카롭게 쉭쉭 울고는 스스로 안개로 흩어졌다는 점이다.
녹색 운해가 꿈틀꿈틀 중앙으로 모여 들더니 드디어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전갈의 몸에 두꺼비의 머리를 한 시뻘건 눈을 지닌 괴물이었다.
괴물의 등 뒤로 뻗은 거대한 날개에는 희미하게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괴물은 날카로운 눈으로 막간리를 노려보면서 괴상한 소리를 냈고 날개에서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막간리는 불길한 예감에 의식으로 그 소리에 저항하려 했으나 온몸에 힘이 빠져 법력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오랫동안 추격전을 벌이며 웬만한 신통은 다 파악했다고 여긴 것이 실수였다.
전갈 몸에 두꺼비 머리를 한 괴물은 두 날개를 털어 흐릿한 칼날 두 개를 뿜어냈다.
눈으로 보기에는 느려 보였던 칼날은 그의 보호막을 자르고 어느덧 막간리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막간리가 체내의 원영을 이용해 목숨을 건 신통을 쓰려는데 뒤쪽에서 파동이 일었다.
“오, 어디서 나타난 괴물입니까?”
등 뒤로 천둥소리가 들리고 금색 뇌전들이 마구 튀어나와 괴이한 두 칼날을 마구 공격했다.
한립이 막간리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순간이동으로 다가와 벽사신뢰를 날린 것이다.
쿠콰콰콰쾅!
금색 뇌전에 닿은 칼날들은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녹색 기운을 잃고 사라졌다. 다음 순간 괴물의 등 위로 녹색 기운이 일어 두 날개를 새롭게 만들어냈지만 이전보다 훨씬 크기가 작았다.
괴물은 한립을 향해 두려운 눈빛을 보냈다. 이때 한립은 한 손으로 막간리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파앗!
맑은 기운이 어깨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막간리의 나른하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와 의식과 법력의 힘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한 형! 저 괴물은 상고 수라계에서도 흉물로 유명했던 차읍자(車泣子)입니다. 저 놈의 독기에 갇히면 대승기 수사라도 금방 핏물로 녹아버리고 말지요.”
막간리가 고마움을 표하며 얼른 괴수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수사께서 어째서 피하기만 하시나 했더니 그런 상고 흉물이었군요. 허나 경전에는 차읍자가 패도적인 섭혼술을 쓴다는 기록은 없었는데요.”
한립은 두려워하기 보다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상고 흉물에 대한 정보는 상고경전에 남겨진 기록이 전부이니 누락이 되었을지도 모르고요. 그 때문에 아주 크게 당할 뻔 했습니다.”
막간리는 급히 품에서 약병을 꺼내 법력을 회복시키는 단약을 삼키고 쓴웃음을 지었다.
“섭혼술이 괴이하기는 해도 경계를 하고 있으면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듣기로 차읍자는 상고 수라계에서 10대 흉수로 꼽혔다더군요. 억만 생령의 악기가 모여 형성된 종류로 사악한 신통들을 타고 났고요. 이곳에서 저런 흉수를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 수사! 대부분 신통이 저 날개에서 나오는 듯 했지만 여러 차례 맞붙어 보니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흉수가 사악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 수사의 벽사신뢰로 제압하기에 좋긴 하겠습니다.”
“예, 벽사신뢰는 확실히 꺼리는 듯합니다.”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다섯 손가락에서 빛이 반짝이고 금빛 뇌전들에 휩싸인 푸른 장검이 날아가 괴수를 베려 했다.
차읍자는 검기가 품고 있는 금빛 뇌전의 무서운 위력에 낮게 골골! 울며 두 날개를 펼쳤다.
펑!
거대 괴수가 녹색 기운으로 흩어져 신속히 아래쪽으로 몸을 피했고 눈 깜짝 할 사이에 땅 속 깊은 곳으로 내뺐다.
한립은 순간 움찔했지만 곧바로 검결을 북돋았다.
검기가 더욱 빠르고 커져 녹색 기운이 지면을 갈랐다. 이에 땅이 꺼질 듯한 굉음이 울리고 금빛 뇌전들이 땅을 타고 흘러들어 깊은 고랑을 만들었지만 차읍자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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