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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33화 (1,090/2,000)
  • 1333화. 강대한 의식

    *

    족히 한식경을 날아갔을 때 멀리 산봉우리 사이의 평원에 푸른 석성(石城)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바위를 깎아 만들어진 성은 높지는 않았지만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아 성보다는 요새에 가까웠다.

    더욱 이상한 일은 높다란 성벽 위에 푸른 바위로 만든 요수 조각상 외에는 아무것도 서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의식을 사용하지 않고 영목신통을 일으켜 성 내부를 염탐하려 했다.

    그의 두 눈에 남색빛이 일렁이고 시선이 성벽 너머로 향한 순간, 돌연 눈앞에 하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하얀 연꽃으로 변해 시야를 가렸다.

    “대화백련금(大化白蓮禁)! 이럴 수가…….”

    한립은 서둘러 시선을 거뒀지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승기 수사의 의식까지 차단할 수 있는 영계 유명 종족의 독문 금제의 출현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의식의 바다 속에서 한 줄기 의식이 꿈틀했다.

    콰르릉!

    고요하던 석성 안에서 굉음이 들리고 산처럼 커다란 혈홍색 거미 허상이 떠올랐다.

    거미법상은 음산한 눈빛으로 눈을 굴려가며 산맥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의식도 한립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에 거미 법상이 노기를 띠었고 곧 탁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 수사 분이 천주성(天蛛城)을 찾아주셨습니까! 제 후배의 몸에 의식 한 줄기를 남겨 놓은 까닭은 모르겠지만, 기왕 오신 손님이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아리치며 여러 번 반복되었다. 수라주에 귀속된 짐승들이 몸을 벌벌 떨고 바닥에 엎드렸을 뿐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은신술의 고명함을 믿고 이러시는 것 같은데 그럼 적의를 갖고 찾아왔다 여겨도 되겠지요? 어디 언제든 성 안으로 들어와 보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며 격렬한 파동이 일고 거미 법상이 흩어졌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한립은 피식 웃으며 방대한 의식을 거세게 일으켰다. 더 이상 기운을 숨기지 않고 의식의 힘을 드러낸 것이다.

    석성 위에 거대한 하얀 연꽃 허상이 나타나 한립의 강대한 의식과 충돌했다.

    쿠쿠쿵!

    둔탁한 폭음이 울리고 하얀 연꽃이 당장이라도 찢겨나갈 듯 구겨졌다.

    한립은 7할의 의식의 힘을 드러내 평범한 대승기 수사 서너 명을 모아 놓은 것과 비슷한 위력을 냈다.

    대화백련금이 영계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해도 그의 의식의 힘을 막기는 무리였다. 이런 상태로 한립의 의식이 석성에 닿으면 합체급 이하의 생령들은 혼백이 폭발해 죽을 수도 있었다.

    “무엄하다!”

    탁한 여인의 노호성이 터지고 또 다른 의식이 치솟아 한립의 의식과 맞붙었다.

    콰르르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처럼 굉음이 울리고 극심한 공간파동이 퍼져나가 허공이 깨질 것 같았다.

    탁한 목소리의 여인도 평범한 대승기 수사에 비해 의식이 강했지만 연신술로 증폭된 한립의 의식의 힘에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나서지 않고 뭘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여인이 버럭 화를 내자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다.

    낯선 사내의 코웃음 소리와 함께 석성 구석에서 강력한 의식의 힘이 솟아올라 여인의 의식과 한립의 의식에 대항했다.

    ‘이 자도 평범한 대승기 수사는 아니라 이건가.’

    새로 등장한 의식에 한립은 이채를 띠었지만 둘이 전력을 다해도 겨우 그의 의식과 동수를 이룰 뿐이란 걸 깨닫고 냉소했다.

    한립은 빠르게 한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의식의 힘을 9할까지 끌어올렸다.

    콰르릉!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석성의 여인과 낯선 대승기 사내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의식의 힘을 합쳐 싸우는데도 점점 밀리고 있었다.

    ‘어떻게 의식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탁한 목소리의 여인과 대승기 사내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립이 눈을 반짝였다. 마지막 1할을 더해 석성의 두 인물에게 중상을 입힐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 중이었다.

    의식 대결은 원영으로 생사를 건 직접 전투를 하는 것 다음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때 석성에서 파동이 일고 또 다른 대승기 의식 몇 개가 기세등등하게 솟아올랐다.

    ‘이런.’

    이번에는 한립의 안색도 확 달라졌다.

    한립은 곧바로 방대한 의식을 신속히 철수시켰다. 석성 안 여인과 사내는 이것을 기회라 여겨 의식을 이용해 그 뒤를 쫓았다.

    세 개의 강력한 의식이 한립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시간차를 두고 그 보다 약한 의식 세 줄기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서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고공에 격렬한 파동을 만들어 탁한 여인과 사내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움츠려 들었다.

    그 사이 한립은 의식을 바로 몸속으로 회수하지 않고 수결을 맺었다. 응결한 의식들이 열댓 개의 수정 칼날이 되어 사내의 의식을 베었다.

    참혹한 비명과 폭음이 석성을 울렸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사내의 의식은 10분의 1정도가 소실되었다. 한립은 의식을 실체화하는 의식정화(意識晶化)를 통해 사내에게 중상을 입힌 것이다.

    탁한 목소리의 여인이 날카롭게 기합을 넣고 의식을 응결해 수정 거대 손으로 수정 칼날을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수정칼날은 빛 알갱이로 흩어져 밀물처럼 한립의 체내로 흡수된 후였다.

    콰릉!

    한립의 등 뒤로 뇌전을 품은 청백색 날개가 자라나 펄럭였고 청백색 빛의 실이 쏘아져나가 하늘 저편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쿠쿠쿠.

    석성에 거대 거미 허상이 떠올랐다. 그 위에는 큰 체구의 녹의 미부인이 서서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 파동이 일고 음산한 얼굴의 흑포 노인이 등장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같은 방향을 노려보았다.

    “나 선자, 쫓지 않으실 겁니까? 당장 쫓지 않으면 놓치고 말겁니다.”

    노인이 달갑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됐습니다! 상대의 의식의 힘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듯 실력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상대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추격해야 쓰겠습니까? 매복이 있을 지도 모르고요.”

    “일리가 있는 말씀이기는 한데, 진작 봉인된 이 불완전한 계면에 어찌 저런 자가 나타난 것일까요? 설마 노부처럼 우연히 공간균열에 빨려 들어온 것은 아닐 테고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계면이 봉인되어도 드나들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요. 엄청난 우연을 만나거나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녹의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소수라계에 우연히 들어왔을 수도, 작심을 하고 찾아왔을 수도 있단 말이군요! 전자라면 상관없지만 후자라면 무슨 사달을 일으킬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인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요. 일단은 돌아가 상의하시지요.”

    “좋습니다. 벽주 그 아이가 어쩌다 의식을 묻혀 왔는지 들어보고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겁니다.”

    녹의 미부인의 말에 흑포 노인이 찬성했고 그들은 거미 허상과 같이 사라졌다.

    * * *

    석성 중심의 거대 전당 안.

    녹의 부인과 흑포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들 가까이에 중년 남녀 세 명이 서있었다.

    그들은 사내 둘과 여인 하나로 모두 평범한 대승기 수사에 가까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또한 그들 뒤로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8명의 연허급 수사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한립이 용암호수에서 보았던 묘령의 여인도 있었다.

    “족모 대인, 침입자는 저희 일족을 노리고 온 것입니까?”

    백면 사내가 예를 올리며 물어왔다.

    “우리 일족을 노리고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벽주, 그 자가 네게 의식 표식을 심어둘 때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했느냐? 잘 생각 보아라. 언제 당한 것 같으냐.”

    녹의 부인은 무표정하게 손을 젓고 묘령 여인에게 물었다.

    “족모 대인께 아룁니다. 혁 대인께서 나서주시지 않으셨으면 질손은 아직도 의식 표식에 대해 까맣게 몰랐을 것입니다. 언제 당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묘령 여인이 안색이 어두워져 무리에서 걸어 나와 변명했다.

    “전혀 모르겠단 말이냐? 찬찬히 기억을 떠올려 보거라. 분명 이상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예에…….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인은 조금 겁을 먹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왜 그러느냐. 생각나는 것이 있느냐?”

    갑자기 고개를 처든 여인을 보고 녹의 미부인이 눈을 빛냈다.

    “예! 생각해 보니, 공어족의 건화지(乾火池)에서 돌아올 때 미세하게 몸이 이상했습니다. 너무 순간적이었고 의식으로 여러 차례 살펴도 이상이 없기에 잊고 있었습니다.”

    “뭐라? 공어족, 건화지!”

    녹의 부인과 흑포 노인이 동시에 표정이 달라졌다. 그걸 본 다른 이들도 놀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후, 세 중년 남녀 중 눈코입이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입을 열었다.

    “족모 대인, 그 자가 공어족이 머무는 지역에서 벽주를 노린 것이 그리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저희 일족에게 공어족은 쓸 만한 혈식(血食) 대상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지요.”

    “흥, 너희가 무엇을 알겠느냐. 공어족들이 그냥 좋은 먹잇감이었다면 지금까지 진귀한 건화지를 그들의 거처로 내주었을까! 공어족보다 더 맛좋고 양 많은 종족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녹의 미부인의 말에 오밀조밀하게 생긴 여인이 허리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나 선자, 공어족까지 연관되어 있다면 대책이 시급합니다!”

    “혁 수사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벽주, 너는 건화지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 보거라.”

    “예! 제가 건화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오시(午時)로…….”

    묘령 여인은 흑포 노인과 녹의 미부인의 심각한 반응에 머리를 쥐어짜 기억나는 것을 모조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녹의 미부인과 흑포 노인은 이야기를 다 듣고 신중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너희는 물러가 있거라. 난 혁 수사와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다.”

    “존명!”

    녹의 부인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대청을 빠져나갔다.

    “혁 수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니까? 그 자가 정말 그걸 노리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솔직히 소수라계가 진귀한 자원이 많다고 해도 그런 강자를 불러들일 연유는 없지 않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선자와 제가 오랜 세월 참선을 하다 우연히 깨닫게 된 일인데 어찌 다른 이도 똑같은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저 우리 일족을 노리고 왔을 수도 있겠지요! 우리 수라주가 다른 계면에서는 극도로 희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목표가 수라주 일족이라면 절대 홀로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두셋 정도 동료가 더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흑포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냉소했다.

    “혁 수사의 말씀 잘 새겨듣겠습니다. 이 정도 정보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조사를 해보도록 하지요. 여봐라, 무영과 만봉을 불러들여라!”

    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법 원반을 꺼내 그것에 대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가에 광풍과 노란빛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용모가 확연히 달랐다. 한 명은 은색 갑옷을 걸친 백발의 청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왜소한 체구에 황포를 입고 원숭이와 닮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합체 중기의 영기의 압력을 뿜어냈고 녹의 부인과 노인을 향해 예를 올렸다.

    “두 분 선배님을 뵙습니다. 저희를 부르신 것은 분부가 있으셔서겠지요?”

    은갑 청년이 공손히 물었다.

    “예를 거두게. 성 밖에서 일어난 일은 대충 알고 있겠지.”

    “예, 침입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듯 했습니다.”

    무표정한 미부인의 말에 은갑 청년이 신중히 답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어 조사를 해봐야 할 듯싶네.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것이고.”

    “그건……. 대승기 수행을 지닌 상대를 저희가 쫓았다가 들켜 두 분의 대사를 그르칠까 우려가 되옵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조사를 하라는 것이지 상대와 싸우라는 것도 아니다. 너희의 독문 은신술이면 그 자 외에 소수라계에 낯선 자들이 몇이나 더 들어와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녹의 미부인이 살짝 얼굴을 굳히고 성가시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불안해하던 원숭이 닮은 황포 청년이 대신 답하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은갑 청년도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명을 받들었다.

    ”며칠 내로 외부인이 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이야.”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은갑 청년과 왜소한 청년은 이구동성으로 답하며 고개를 숙이고 대청을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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