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2화. 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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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강력한 요물 몇 마리를 참살한 한립은 희귀한 재료 몇 가지를 챙긴 것 외에는 수확이 없었다.
이름 모를 독초 두 뿌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에게는 쓸모가 없었고 그것도 문하의 제자들에게 주려고 챙긴 것이었다.
* * *
셋째 날, 한립은 검은 돌이 가득한 골짜기에 이르러 드디어 수라주의 흔적을 발견했다.
골짜기의 어느 동굴에서 곰을 닮은 괴물 몇 마리가 숨이 끊겨 있는 것을 찾아냈는데 피와 살이 말라붙고 전신의 털이 새하얗게 변한 것을 제외하면 어떤 상처도 없었다.
그는 잠시 괴물들의 사체를 살펴보고는 불덩이를 날려 동굴을 정리했다.
시체는 연기로 변해 사라졌는데 그들의 누워있는 지면은 반짝반짝 거리고 있었다.
한립은 손을 뻗어 가느다란 수정 실 몇 가닥을 푸른 기운으로 감싸 불러들였다.
‘이건!’
한립이 손가락으로 수정 실을 건드리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수정 실이 홀연히 빛을 머금고 남색 빛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팔뚝으로 퍼져나가더니 남색 빛이 닿는 곳마다 팔뚝의 피와 살이 말라붙고 다 죽어가는 노인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안색이 급변한 한립은 손가락을 털어내고 팔뚝에서 금빛을 일으켜 남색 빛을 밀어냈다.
파앗!
동시에 푸른 수정 빛이 흘러 말라비틀어져 가던 팔을 탱탱하고 광택이 흐르게 돌려놓았다.
“과연 광음(光陰)의 힘이야. 진정한 시간법칙은 아니지만 보기 드문 신통이니 수라주의 활동 범위 내로 진입한 것이 확실하구나.”
그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푸른빛이 반짝이고 수정실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그냥 바깥에 나돌아 다니게 둘 물건은 아니었다.
한립은 동굴을 나와 골짜기 중심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시진이 지나 골짜기로 돌아온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골짜기에 떠서 의식의 힘을 지하 깊은 곳으로 퍼트렸다.
이전에도 땅 속까지 염두에 두고 살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르게 수색 영역이 깊었다.
이에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가 몸을 날려 어딘가로 날아가더니 골짜기에서 머지않은 곳의 호수로 뛰어들었다.
콰르릉 콰쾅!
얼마 후, 천둥소리가 들리고 호수 속에서 금색 뇌전이 솟아올랐다.
출렁이는 호수 속에서 괴상한 물고기들이 새까맣게 타 배를 뒤집고 떠올랐다.
소란이 가시고 호수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때 한립은 지하 수천 장 아래에서 어느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푸른 돌멩이로 어설프게 만들어 놓은 통로가 지하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가 의식으로 수색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의심스러운 공간이었다.
푸른 돌멩이들은 평범한 돌덩이가 아닌지 그의 강대한 의식으로도 내부를 살필 수 없었다.
한립은 통로 속의 움푹 파인 푸른 돌에서 또 다른 수정실을 찾아내고 이동 속도를 높였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평범한 수사였다면 닿자마자 바싹 말라붙어 시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뜨거운 열기였다.
몸에서 희미하게 푸른 기운을 반짝이던 한립은 열기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전방에 붉은 빛이 반짝이고 사람의 말소리와 낮은 포효소리 같은 것이 웅웅 울렸다.
“…….”
한립은 신속하게 기운을 일으켜 몸을 흐릿하게 변신시키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붉은 불길을 지나 그가 소리 없이 나타난 곳에는 용암 호수가 들끓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용암에서 수시로 불기둥이 치솟아 그가 지나온 통로를 휩쓸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용암 호수 정 가운데에 새빨간 수정돌들이 떠있다는 것이었다.
영계에서도 잘 찾아보기도 어려운 극품의 불 속성 영석들이었다.
영석이 함유한 불 속성 영기는 영계의 극품영석보다도 훨씬 정순했다.
그러나 한립의 주위를 끈 것은 용암 호수 옆의 요물들과 여인이었다.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요물들은 팔이 네 개였고, 사내는 팔뚝에 금색 고리를 여인은 머리에 은색 띠를 차고 있었다.
요물들의 새빨간 손은 텅 비어있거나 아니면 붉은 색 짧은 창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어(怪魚)들 맞은편에 스물한두 살로 보이는 여인이 서있었다.
청록색 옷을 입은 여인의 볼과 새하얀 팔뚝 위로 금빛이 반짝였다.
뜻밖에도 금색의 화살촉 같은 법기가 박혀 있었다.
장년층으로 보이는 괴어들이 여인을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으르렁 거렸지만 겁에 질려있는 것은 오히려 괴어들이었다.
“알아서 족인 두 명을 내놓거라. 너희들이 우리 일족에서 약간이나마 쓸모가 있지 않았다면 벌써 건화지(乾火池)에서 쫓아내고 몰살시켰을 것이야.”
여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꾸, 꿈 깨라, 우, 우리는…… 절대…… 조, 족인을 내놓지…… 않는다.”
건장한 체격의 남성 괴어가 두려운 와중에도 떠듬떠듬 사람의 말을 했다.
고공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립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비록 낯설기는 했지만 영계의 경전에 기록된 상고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배를 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여인의 얼굴이 굳자 우두머리 남성 괴어가 낮게 포효했다. 다른 남녀 괴어들도 몸에서 붉은 빛을 일으켜 뒤쪽의 용암 호수 위로 물러나며 손을 움직이거나 팔을 휘둘렀다.
아래쪽의 용암에서 붉은 기운이 떠올라 분분히 괴어들을 감쌌다.
파앗!
남녀 괴어들은 몸집이 몇 배로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화신기 정도의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우두머리 사내 괴어는 연허 초기의 기운을 풍겼다.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겨우 욕화술(浴火術)말고 너희가 뭘 더 할 수 있더냐! 키킥, 이참에 호되게 주의를 줘야겠어.”
여인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허리를 틀고 사라졌다.
남녀 괴어들 사이로 이동한 그녀의 몸에서 수정실들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뻗어나갔다.
쉬쉬쉬쉬쉭!
괴어들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들의 붉은색 보호막은 수정실을 전혀 막지 못했고 여인은 요염하게 웃음 짓고는 손을 뻗어 여성 괴어 두 마리를 가리켰다.
푸푹!
괴어들의 가슴에서 펄떡이는 심장이 뽑혀 나오자 여인의 입에서 수정실 두 가닥이 튀어나가 심장을 휘감고 돌아 들어갔다.
“음, 신선해! 계속 먹어도 이 맛은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야. 너희 공어족(空魚族)이 번식률이 낮은 것이 안타깝구나. 오늘은 두 명만 죽이겠다만 나머지도 벌은 받아야겠지!”
여인은 입가에 묻은 핏물을 핥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남색빛이 흘러나와 표면에 갈고리가 가득한 기다란 채찍으로 변했다.
여인의 눈빛이 흉흉해지고 기다란 채찍에서 허상들이 튀어나가 괴어들을 갈겼다.
촤악! 촤악!
무슨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괴어들의 보호막을 가볍게 뚫고 피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용암 호수 위로 신음소리가 퍼졌다.
처음에는 노기등등하게 여인을 노려보던 우두머리 사내 괴어도 채찍질이 지속되자 머리를 감싸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괴어들의 몸은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손목을 털어 채찍을 회수한 여인이 키득거렸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그러니까 제물로 일부를 바치더라도 너희 종족이 번성하고 싶다면 족인들을 많이 생산하란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 족모(族母) 대인께서 너희에게 상을 내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다음번에도 공어족의 수가 이것밖에 안 되면 채찍질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여인은 능숙하게 협박하며 입에서 하얀 거품을 뿜었다.
죽은 여성 괴어 시체가 거품에 휩싸여 몇 배로 줄어들더니 그녀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인은 공어족들의 원한에 사무친 눈빛을 받으며 하얀 빛줄기로 변해 석벽 속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의기소침해진 괴어들은 잠시 의논하다 용암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용암 호수 동굴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파동이 일고 한립이 나타났다.
“상고시대 때나 존재했고 여러 계면에서 멸종된 공어족이라니. 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아주 강력한 신통을 지녀 멸족의 화를 당했다던데, 구체적으로 그게 어떤 신통이었는지는 아는 자가 거의 없다 했던가…….”
혼잣말을 하던 한립은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살폈다.
“수라주가 사람의 형상을 한 게 틀림없어. 겨우 연허 후기로 보였는데, 수라주는 성년이 된 후에야 사람의 형상을 취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쨌든 일단 저 여인을 따라가 수라주 소굴을 알아내고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겠지. 공어족도 그냥 둘 수는 없고……. 나오거라!”
한립이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금색 빛구슬이 떠올라 코와 입이 없는 팔뚝 절반 크기의 자금색 소인으로 변했다. 서늘한 두 눈은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돌아와 처리할 것이니 공어(空魚)들을 잘 감시하고 있거라.”
한립의 명에 자금색 소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금빛으로 변해 용암 속으로 뛰어들었다. 소인은 진화를 마친 서금충왕이었다.
한립은 다시 흐릿하게 변해 미행을 시작했다. 그의 실력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여인의 몸에 흔적을 남겨 놓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고 목표를 놓칠 일은 더더욱 없었다.
일다경 후, 한립은 완전히 투명해진 몸으로 십여 리의 거리를 두고 여인을 쫓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습지로 가서 막 연허기에 이른 흑돼지 괴물을 죽이더니 외진 협곡에서 정체모를 금색 과실 열댓 개를 따서 어딘가로 날아갔다.
한립은 줄곧 기척도 없이 그녀를 뒤쫓았다.
눈앞의 여인이 정말 수라주라고 해도 그녀의 정핵에서는 광음사를 추출할 수 없었다. 그의 목표가 처음부터 성년 수라주가 아니었다면 지하 용암 동굴에서 진작 처리했을 것이다.
한참 후, 여인은 높게 솟은 산맥이 나타나자 눈에 띄게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자 산맥 깊은 곳에서 여덟 마리의 거대 괴조가 날아들어 고분고분하게 여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와 동시에 강대한 의식이 산맥에서 흘러나와 신속히 주변을 훑으며 한립을 스쳐지나갔다.
‘대승기 수사!’
흠칫 놀란 한립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강대한 의식은 거의 만 리를 샅샅이 훑고서야 돌아갔다.
‘이건 평범한 성년 수라주가 방출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니야. 일반적인 대승기 수사를 넘어서는 강자가 있다면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까지 의식을 퍼트리면서 전혀 기운이 약화되지 않다니 의식을 증폭시키는 보물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인가?’
한립은 신중하게 생각했다. 진령급의 존재가 있을 지도 모르는데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침음하던 그가 결정을 내렸다.
보라색 주술문자가 떠올라 펑 하고 터지자 보라색 기운이 그를 감쌌다.
보라색 기운이 걷히고 허공은 텅 비어 있었다. 또 한 번 태일화청부를 사용한 것이다.
허상화 된 그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산맥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전속력을 낼 수는 없어도 표표히 날아가다 보니 금방 산맥으로 진입했다.
다행히 여인의 몸에 의식 한 줄기가 남아 있어 천리 내에서는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따라가던 한립이 무의식중에 미간을 좁혔다.
수라주의 소굴이 근처라면 산맥에 다른 강력한 괴수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은밀히 의식을 퍼트려본 결과 화신 연허급 괴수들 수십 마리와 합체급 괴조도 두 마리나 있었다.
소의 몸통에 새빨간 새 머리를 지닌 괴조는 날개가 은색 강철로 이루어져 있었고 머리에는 끔찍한 혹이 불룩 솟아 있었다.
괴조들은 그와 멀리 떨어진 거목 가지에 앉아 있었는데 한 마리는 주변을 살피고 다른 한 마리는 반쯤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밖에도 반인반수의 몸을 지닌 괴수들이 여러 무리를 이루어 순찰을 돌았다. 이런 소수라계의 괴수들은 수라주에게 굴복해 부하가 된 것이 확실했다.
한립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영왕은 수라주가 다른 괴수들을 부릴 거란 이야기는 한 바가 없었다. 그가 수라주의 지능을 얕잡아 보았던지 아니면 소수라계의 수라주들이 변이를 일으켜 지능이 높아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연허급 수라주가 벌써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을 보면 후자일 확률이 높겠지.’
한립은 판단을 내리고 경계심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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