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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31화 (1,088/2,000)

1331화. 박쥐 떼

*

영계, 복령산의 어느 금지 구역.

백포 노인, 한립, 혈연 등 대승기 수사들이 거대한 진법 앞에 서있었다.

드넓은 진법은 금색과 은색 문양으로 채워져 있었고 모서리마다 다양한 색의 극품 수정돌이 100개 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멀리서 민머리 사내를 포함한 8명의 영족 합체기 수사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한립은 조용히 거대 진법을 살폈고 백포 노인은 진법 원반처럼 생긴 법기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셈하는 중이었다.

“때가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표정이 달라진 백포 노인의 말에 막간리가 즉시 앞으로 걸어갔고 한립도 미소를 머금고 따라갔다. 그들을 본 백포 노인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돌아오는 공간 좌표는 알아서 설정하시면 됩니다. 때가 되어 수라심을 깨트리면 자동으로 영계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요. 주의할 점은 절대 수라심의 기운을 전부 소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수라심을 깨트려도 영원히 소수라계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막간리가 웃으며 답했고 한립도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혈연이 웃으며 진법에 오르려다 고개를 돌렸다.

“영 수사, 광음사를 갖고 돌아오는 일은 우리 형제에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물건을 갖고 돌아왔는데 수사께서 마음이 변하실 일은 없겠지요?”

“혈 형,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광음사가 꼭 필요한 제가 약조를 어길 리 있겠습니까?”

백포 노인은 화내는 기색 없이 담담히 답했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혈연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흑린, 한립과 막간리 옆에 나타났다.

이에 백포 노인이 지체 없이 진법 원반에서 하얀빛을 뿜어 진법으로 흡수시켰다.

후우우웅!

광활한 진법이 진동하고 금색과 은색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에 수정돌에서도 주술문자가 마구 솟구쳤다.

쿠콰쾅!

한립, 막간리, 혈연, 흑린의 모습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백포 노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진법의 발동을 지켜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수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희는 잘 듣거라. 지금부터 돌아가며 진법을 지키다 이변이 발생하면 바로 내게 소식을 전해야 한다.”

“예, 영왕 대인!”

여덟 명의 합체급 영족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백포 노인이 소매를 펄럭여 하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가자 여덟 성령 중 여섯 명이 잇달아 떠나고 대머리 사내와 또 다른 합체급 영족인만이 남았다.

두 사람은 방대한 의식을 펼쳐 진법을 겹겹이 둘러싸고 감시했다. 진법에 조그마한 이상이라도 생기면 그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 *

한립이 묵직한 머리를 흔들었다.

아주 오래 전에나 느꼈던 장거리 전송 후의 후유증이었다.

이번 전송은 계면 간 이동이어서 그 역시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자 사발 굵기의 하얀 나무들과 이파리가 바싹 말라 누렇게 변한 이름 모를 잡초와 관목들이 보였다.

무척 황량한 풍경이었다.

막간리과 혈연, 흑린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이럴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저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고공에 초록색 태양이 3개나 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크고 나머지 두 개는 작았다.

큰 태양이 하늘 중간에 떠있고 작은 태양 두 개가 동쪽과 서쪽에 떠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을 놀라게 한 것은 녹색 태양 주위를 감도는 혈홍색 광채였다.

붉은 빛이 녹색 태양을 감돌아 아주 아름다웠지만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동안 혈홍색 광채를 살피는데 돌연 벌꿀 냄새 같은 달콤한 향이 났다.

쉭!

한립이 얼굴을 굳히고 소매를 털어 기다란 푸른빛을 수풀 속으로 날려 보냈다.

다음 순간 푸른빛이 사라진 방향에서 포효소리가 들리고 지면이 쿵! 하고 울리며 잠잠해졌다.

한립은 그 자리에서 서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응시했다.

잠시 후 푸른빛이 밀림 속에서 튀어나와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날아오른 그는 순식간에 이동해 쓰러진 하얀 나무들 사이에서 방대한 체구를 지닌 물체를 발견했다.

곤충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괴물은 조각조각 나있었다. 매미의 날개와 더듬이 그리고 짐승의 털가죽과 날카로운 발톱들이 널려 있었다. 거대 벌과 물소가 합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방대한 괴물의 몸에서는 그가 멀리서 맡았던 달콤한 향기가 진득하게 풍겼다. 주위의 풀과 나무들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말라붙어 누렇게 변했고 사이사이로 사마귀를 닮은 괴충들이 숨이 끊긴채 가득 쌓여 있었다.

“독성이 강해 평범한 수사는 백리 내에만 있어도 화를 피할 수 없겠어.”

한립은 괴물의 시체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수라계 특유의 희귀종이 틀림없었다.

화륵!

그가 손가락에서 은색 불구슬을 튕기자 불길이 괴물을 감싸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었다.

그제야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차분히 하얀 수정 구슬을 꺼냈고 미간을 좁혔다.

구슬에 아무런 표식이 없다는 것은 막간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감응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서둘러 모일 것 없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십여 일의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고 푸른 둔광으로 변해 날아갔다.

* * *

한립은 적당한 고도를 유지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어딘가를 급히 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기 위해 소수라계에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식으로 3, 4천 리 정도를 살폈다.

더 넓게도 가능했지만 세세하게 전역을 살피고 또 지하 수백 장까지 뒤지려면 영역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수라주와 같은 거미류의 강력한 요충은 지하 깊은 곳에 숨어 살 수도 있었다. 그나마 한립이니 가능한 일이었지 막간리나 혈연 등은 주변 수백 리를 살피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그가 비록 수라주를 혈맥 감응으로 찾을 수는 없지만 이 방법을 통해 목표를 찾아낼 심산이었다.

막간리도 자신감을 보였던 것으로 보아 특수한 방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 *

파앗!

공간의 또 다른 방향, 막간리가 손바닥에서 하얀 빛을 거두었다. 하늘을 뒤덮었던 검 허상이 옥검(玉劍)으로 되돌아갔다.

전방 돌무지 속에 호랑이 머리에 전갈의 몸을 한 괴수들이 둘로 갈라져 피 웅덩이 속에 누워있었다.

괴수 시체를 훑은 막간리는 옥검을 넣어두고 입에서 보라색 깃발을 뿜었다.

“일어나라.”

작은 깃발이 웅 하고 빛을 발하자 사람 만하게 불어났다.

금색 깃대에 보라색 천이 휘날리는 거대 깃발에는 다양한 주술문자가 깨알 같이 새겨져 있었고 머리가 둘 달린 은색 거미 허상이 맴돌았다.

막간리는 주문을 외며 열손가락을 튕겨 법결들을 깃발로 흡수시켰다.

깃발의 흐릿한 은색 거미 형상이 또렷해질수록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수라주를 감응할 만한 혈맥을 타고 나지 못한 대신 예전에 우연히 얻은 반사번(盤絲幡)이 있었다.

깃발은 은강주(銀罡蛛)라는 거미 요수의 정혼을 기령(器靈)으로 삼고 있어 일정 범위 내의 거미류를 찾아낼 수 있었다.

혈연과 흑린의 천부적인 혈맥 감응 능력에는 못 미쳐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수라주가 전설대로 그렇게 강력하다면 찾는다 한들 쉽게 처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이에 막간리는 고민하며 손을 풍차처럼 돌려 법결 던지는 속도를 높였다.

키학!

돌연 깃발의 은색 거미 허상이 날카롭게 울부짖고 빛 입자로 흩어졌다.

“여긴 없는 것 같고, 또 다른 곳을 찾아야겠구나.”

동작을 멈춘 막간리가 실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 * *

“운이 따라주나 봅니다. 도착하자마자 혈맥 반응이 오고 말입니다!”

지하 깊은 곳, 흑린이 노란 둔광으로 변해 땅 속을 이동하며 흥분해 소리쳤다. 그리고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냉랭한 얼굴의 혈연이 있었다.

“나도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미리 좋아할 것 없네. 수라주가 아닌 다른 거미류에 반응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일세. 듣자니 소수라계에 서식하는 거미류 괴수들이 한두 종이 아니라더군.”

혈연도 노란 빛에 휩싸여 있었다.

“그건 찾아보면 알게 되겠죠. 그래도 아무 실마리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흑린이 개의치 않고 말하자 피식 웃은 혈연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면 위로 솟구쳐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도착했다.

* * *

일다경 후, 혈연과 흑린은 나란히 허공에 떠서 바닥의 검은 핏물을 내려다보았다. 가시 달린 청록색 거미 네 마리가 그 속에 엎어져 있었다.

“형님 말씀대로 수라주가 아니었습니다! 괜히 좋아하며 달려왔네요.”

흑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소수라계가 그리 넓지 않다고 해도 도착하자마자 수라주를 마주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네. 그래도 쓸 만한 재료를 얻게 생겼으니 헛고생은 아닐세.”

혈연이 한 손으로 허공을 쥐어 흙속에서 노란 돌멩이 두 개를 끌어왔다.

“예,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이동하시죠.”

“물론!”

흑린과 혈연은 노란 둔광을 일으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 * *

한립 앞에 뜻밖에도 혈홍색 박쥐들이 가득 떠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박쥐들은 날개를 쫙 펼친 길이가 보통 사람의 7~8배는 되었다.

그리고 핏빛 박쥐 떼 중앙에는 다른 박쥐들보다 확연히 커다란 거대 박쥐가 있었다. 금색 문양이 새겨진 거대 박쥐의 이마에 혈홍색 요목이 박혀 있었다.

사람처럼 세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거대 박쥐는 퍽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립은 뒷짐을 지고 박쥐 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의식을 퍼트려 수라주를 수색하는데 전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 박쥐의 표정이 흉악해졌다. 어느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거대 박쥐가 입을 벌려 소리 없는 파동을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주변의 핏빛 박쥐들이 그것을 감지하고 파동을 일으키며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소매 속에서 가볍게 허공을 때렸다.

쿠릉!

천지원기가 맹렬히 진동하고 오색 기운들이 모여 오색 거대 손을 만들어 냈다.

엄청난 압력에 뒤덮인 핏빛 박쥐들은 거대 손이 떨어지기도 전에 퍽퍽! 터져 핏물로 변했고 거대한 음파의 파동도 사라졌다.

거대 박쥐만이 분노에 차 포효했고 금색 문양에서 빛을 뿜어 보호막을 펼쳤다.

하지만 거대한 압력에 금색 보호막이 흔들렸고 그 안의 거대 박쥐도 쓰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방어능력은 타고났구나.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영수로 거둬 주었을 텐데.”

한립이 아깝다는 듯 중얼거리며 거대 손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에 오색 거대 손이 더욱 불어나 쿵 하고 거대 박쥐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눈부신 빛과 함께 엄청난 진동이 일어났다.

금색 보호막은 부서졌고 거대 박쥐는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으깨졌다.

한립이 피식 웃으며 소매를 펄럭이자 거대 손이 흩어지고 거대 박쥐가 있던 자리에 금빛이 반짝였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끌어와 양손으로 비볐다.

금속이 맞닿은 듯 마찰음이 들리고 요수 가죽이 드러났는데 표면에 금색 문양이 반짝였다.

“이걸로 방어 법기를 만들면 쓸 만하겠어.”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가죽을 거둬들이고 무언가를 감응했는지 눈에서 남색빛을 반짝였다.

멀리서 잿빛의 정체 모를 괴조(怪鳥)가 미친 듯이 이쪽으로 날아드는 중이었다.

네 개의 날개를 지니고 머리에 뿔이 자란 거대 매였다. 그는 박쥐 떼가 남긴 핏덩이들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날아드는 괴조는 별 것 아니었지만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괴물들을 전부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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