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30화 (1,087/2,000)
  • 1330화. 구원관(九元觀)

    *

    까만 얼굴 도사가 소매를 펄럭이고 대문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이곳 구조가 아주 익숙한 듯 거대한 대청과 기다란 회랑들을 지나 고즈넉한 뜰 앞에 이르렀다.

    녹음이 가득한 뜰 안에는 각종 수목과 큼지막한 꽃들이 가득 피어나 있었고 입구에 은색 천으로 얼굴을 가린 궁장 여인 두 명이 서있었다.

    하얀 피부와 나긋나긋한 자태를 지닌 여인들은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경지를 헤아릴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선자들을 뵙습니다. 궁주님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까만 얼굴 도사는 두 궁장 여인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노비는 이런 예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이 대인께서는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여인 중 한 명이 몸을 틀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허허, 선자께서 농도 잘하십니다. 그럼 저는 궁주 대인을 뵙고 나오겠습니다.”

    까만 도사는 웃는 얼굴로 다시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뜰 안으로 들어갔다. 꽃내음이 물씬 풍기며 녹음이 가득 시야를 채웠다. 그리고 보라색 장포를 입은 부인이 꽃나무 아래 서서 여유롭게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까만 얼굴 도사가 얼른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이 사질,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궁주라 부를 것인가? 편하게 사숙이라 부르게.”

    부인은 고개도 들지 않고 미소 지었다.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곳이 구원관(九元觀)도 아닌데 괜히 남의 입에 오르내릴까 두렵습니다. 누가 감찰사 대인께 함부로 말을 전하기라도 한다면 궁주님과 제게 모두 피해가 갈 것입니다.”

    까만 얼굴 도사가 진지하게 답했다.

    “담이 작아도 너무 작은 것 아닌가? 하긴 감찰사자들 앞에서 우리 같은 선궁의 주인들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뭘 하든 제약을 받아야 하고, 오히려 구원관에 있을 때가 자유롭고 좋았던 것 같군. 그러지 말고 내 자네의 사조께 사질을 궁주로 추천하면 어떻겠는가?”

    부인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는데 청수한 얼굴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컥! 궁주님, 사조 어르신께서 그런 일을 허락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금한선궁이 관할하는 지역이 선역 전체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지만 구원관의 체면이 달린 일입니다. 어찌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일궁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까만 얼굴 도사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말은 그렇지만, 자네의 사부와 사백들 중 누구 하나 나보다 실력이 못한 이가 있던가? 어째서 다들 구원관의 체면인 금한선궁의 궁주 자리를 맡겠다는 이가 없는 것이야! 내가 자네 사조의 문하에 들어간 지도 한참 지났고 선궁에서 머문 지도 벌써 십여 만년째이니 그만둘 때도 되었지.”

    청수한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허허, 궁주님께서는 사조 어르신의 문하에 들기 전에 이미 어느 소령계(小靈界)의 주인이지 않으셨습니까. 궁주님께서는 선궁 정도는 거뜬히 관리하시지만 제 사부님이나 다른 사백님들은 게으름 피우시는데 익숙해져서 금한선궁을 흥성하게 하지 못하실 겁니다.”

    “듣기 좋은 말은 다하는 구나. 자네의 사부와 사백들은 십만 년에 한번 출관할까 말까 하거나 아니면 목석처럼 감정이 메말라서 큰일이야. 특히 자네의 사부는 구원관에 있을 때는 나도 멀리 피해 다녔다네.”

    자의(紫衣) 부인이 뭔가 불쾌한 일을 떠올렸는지 이를 갈았고, 까만 얼굴 수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사숙은 물론이고 자신도 평소 사부를 대할 때 덜덜 떨며 말 한 마디 함부로 하지 못했다.

    “되었네. 그런데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가? 방금 관천경(觀天鏡)으로 보고 있자니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소란이라도 피울 태세던데?”

    “궁주님께 아룁니다. 이번에 제가 찾아뵌 것은 지난번에 사조 어르신께서 직접 내린 분부 때문입니다.”

    까만 얼굴 수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뭐라? 잠깐 기다리게. 내 영역(靈域)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네.”

    나른해 보이던 자의 부인은 도사의 말에 표정이 달라져 손끝으로 허공을 그었다. 하얀 흔적이 나타나 그 안에서 파동이 일었다.

    하얀 흑적 안에서 빛이 퍼져나가 주변 풍경을 완전히 바꾸었다. 우아한 전당 안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아리따운 궁장 시녀 두 명이 전당 양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까만 얼굴 수사가 멍한 얼굴의 시녀들을 살피고 놀라워했다.

    “영역을 3성 화령경(化靈境)까지 익히셔서 역령(域靈)을 만들어 내실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사숙님의 영령들은 아직 수행과 지능이 낮지만 공들여 키우면 장래에 필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도 얼마 전에야 영역을 조물경(造物境)에서 화령경으로 끌어올렸네. 그래서 관으로 돌아가 영역을 안정화 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 아니겠나. 자네 사조께서 출관하셔서 지도해주신다면 가장 좋겠지만 말이야. 사질, 앉게. 하하, 내 영역 안은 감찰사자의 감찰선기로도 쉽게 감시할 수 없으니 편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세.”

    “그럼 앉겠습니다.”

    자의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가리켰고 까만 얼굴 도사도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수백 년 전부터 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결과가 있는가?”

    “수백 년간 각종 방법을 다 써보다가 마지막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벗의 보물을 빌려 간신히 그 자의 행방을 찾아냈습니다.”

    “그 자의 행적만 알아낼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없네. 당시 그 자는 ‘그걸’들고 구원관에서 달아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었나. 본명 혼패를 우리가 지니고 있는데도 어떤 역천의 보물이나 비술로 기운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생사조차 알 수 없었어.

    자네의 사조께서도 관례를 깨고 친히 추격하려 하였으나 또 다른 능력자들이 가로막아 그냥 돌아오셔야 했지. 수백 년 전에 자네가 본명 혼패가 반응을 보인 것을 보고해 사조가 전적으로 이 일을 사질에게 맡기셨고 말이야. 그 배신자가 죽는 건 상관없지만 훔쳐간 물건에 구원관의 흥망이 달려있지 않은가!”

    자의 부인은 분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놀란 까만 얼굴 도사가 연신 그렇다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숙님. 그 배신자의 진혼패가 갈라지기는 했어도 아주 죽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이겠지요. 유일하게 걱정인 것은 뜻밖에도 그 자가 선계가 아니라 하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계에? 어느 소령계를 말하는 것이지?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위치만 정확하면 선령석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강선대(降仙臺)를 이용해 가면 될 것을. 설마……. 그가 달아난 하계가 실락계면(失落界面)들 중 하나는 아니겠지?”

    자의 부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사숙님의 추측대로입니다. 그 배신자가 달아난 곳은 소남주계군(小南州界群) 중 한 소령계로 구체적으로 어느 소령계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며칠 후에야 정확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요. 소남주계군의 수백 개 소령계들은 당시 큰 변고가 있은 후 선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마 어느 소령계인지 알게 되어도 강선대로는 이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까만 얼굴 도사가 조금 울상을 했다.

    “난감하구나. 소남주계군의 좌표가 이동하고 선계 사람이 내려갈 수 없는 것은 물론 그 안의 인물들도 선계로 비승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 실락계면에서 진선계로 비승한 하계인들은 하나 같이 엄청난 자질을 타고난 자들이었지.”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역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수선군께서도 실락계면에서 비승하신 분이 아닙니까. 겨우 백만 년 만에 어마어마한 명성을 쌓으시고 본 선역의 광법제존 문하로 들어가셨지요.”

    “되었네. 실락계면에서 비승한 이들이 어떻든 간에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배신자를 잡아들이는 것이야. 아무래도 사부님을 찾아가 방법이 있는지 여쭈어야겠네. 배신자의 현재 상태면 한두 명만 하계로 내려가도 잡아올 수 있을 것이야. 그 자는 어쩌다 실락계면으로 달아난 것이지.”

    침음하던 자의 부인이 눈을 빛냈다.

    “어찌 알겠습니까. 미리 실락계면 좌표를 준비해 두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겨 우연히 그곳으로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요. 분명한 것은 보물을 훔쳐 달아난 그 자에게 배후가 있었을 거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담이 제아무리 커도 본 관을 배신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검은 얼굴 도사가 생각 끝에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누군지 고민할 것도 없지 않은가. 직접 나서서 자네 사조를 막은 인물들 중 한 명일 테지.”

    부인이 냉소했고 검은 얼굴 도사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네 사조의 일은 우리가 간섭할 수 없네. 관에서 방법을 찾아 실락계면으로 제자를 파견할 예정인데, 이 사제도 관심이 있는가?”

    자의 부인이 미소 지으며 도사를 바라보았다.

    “농담 마십시오, 사숙님. 제 미천한 수행으로 어찌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평소 바깥일에 관심이 없는 사형제들도 그런 임무를 맡지는 않을 것이고요. 배신자의 수행이 낮지 않고, 관에 있을 당시 중계 제자들 중 손에 꼽히던 자였습니다.

    진혼패를 토대로 하계에서 난감한 처지에 놓였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나 일부러 그런 척 하고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자가 하계에서 정말 제압당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은 아닐 테고요. 그 계면에 하계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자가 있다는 뜻이니 일반 제자들을 내려 보내서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오, 자네 말을 듣자하니 자주 외부 계면으로 나갔던 제자들 중에 선발하는 것이 좋겠구만. 축 사질과 오 사질도 걸출한 인재로 알고 있으니 자네가 염두에 두고 있을 것 같은데?”

    “축 사형은 신중하고 오 사제는 지략이 뛰어나 둘 다 이번 임무에 적합하겠으나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이와 비교하면 부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자의 부인의 질문에 도사가 눈을 빛냈다.

    “자네가 말하는 이가 혹시…….”

    “사숙님께서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셨겠지만, 마 사형이 파벽출관을 하였습니다.”

    “마량 그 녀석이 형벌을 마쳤단 말인가! 어째서 소식을 듣지 못한 거지?”

    자의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걷혔다.

    “저도 며칠 전 우연히 들은 소식입니다. 지금 이 일에 아는 자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마 사형의 수행과 실력으로 보아 사백님들께서 이번 임무를 맡기실 확률이 크다고 봅니다.”

    까만 얼굴 도사가 신중히 답했다.

    “그럴 리 없네! 마량이 실력은 제법이지만 심성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당시에도 겨우 보물 하나를 제련하겠다고 하계로 내려가 한 국가의 생령 전체를 혈제의 제물로 바쳤고 말이야.

    자네 사조께서 그 자의 자질이 뛰어나고 본 관을 위해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점을 참작해 주시지 않았다면 겨우 만 년 간의 면벽 수련으로 넘어갈 일은 아니었네. 그런 자를 다른 이들이 개입할 수 없는 실락계면으로 보낸다면 큰 화근이 될 것이야!”

    “사숙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배신자가 갖고 달아난 보물이 본 관과 사조 어르신께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사백님들께서는 마 사형을 내려 보내기로 결정하실 듯합니다.”

    “그 늙은이들이면 그런 결정을 하고도 남을 게야. 마량이 하계로 내려가면 수행과 법력에 제약을 받더라도 물건을 찾아 돌아올 수는 있을 테니까. 되었네, 이 일은 우리가 왈가왈부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네.

    자네는 겨우 집사 제자이고 나는 이름만 걸어 놓은 궁주에 불과하지 않은가. 어느 제자를 보내든 자네 사조께서 직접 정하시겠지. 자네는 배신자가 달아난 계면의 정보를 알아내면 본 궁에게도 알리는 것을 잊지 말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이야기가 더 있는가? 없다면 난 이만 쉬고 싶군.”

    “오늘은 이 이야기를 드리려 특별히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자의 부인의 말에 까만 얼굴 도사가 일어나 예를 올렸다.

    부인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사라졌는지 고개만 끄덕였고 도사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의 두 발이 대문 밖에 닿는 순간, 공간 파동이 일고 도사는 공간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눈앞이 밝아지고 까만 얼굴의 도사는 뜰로 돌아왔다.

    푸른 수목과 아름다운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궁전과 자의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도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아까 왔던 오솔길을 따라 돌아갔다.

    일다경 후, 금한선궁 대문 밖에서 용울음 소리가 들리고 남색의 빙교가 떠올라 여러 산맥들 사이로 사라졌다.

    같은 시각 신비한 전당 안에 자의 부인이 앉아 중얼거렸다.

    “하하, 실락계면과 마량이라…….”

    그녀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져 결국에는 들리지 않았고 광채가 밀려들어 부인의 모습을 가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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