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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29화 (1,086/2,000)

1329화. 금한선궁(金翰仙宮)

*

“막 형께서 가신다면 저도 함께 가보지요.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영왕 형께서 수고스럽지만 소수라계에서 돌아오는 좌표는 제가 스스로 정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립이 턱을 긁적이며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 왕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까?”

노인이 눈을 번득이며 불쾌한 내색을 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스스로의 행로를 남에게 맡기는 게 익숙지 않아서요. 영왕 수사가 허락해 주신다면 전송진에 대해 알만큼 아니, 법기를 이용해 전송 좌표를 바꾸는 것은 할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백하게 답했다.

“한 수사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도 진법에 조예가 깊은데 돌아오는 좌표는 스스로 정하지요. 영 형이 이런 사소한 요구를 거절하신다면 솔직히 그 의도가 의심스러울 듯싶습니다.”

혈연이 한립의 제안을 반기며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들 원하신다면 돌아오는 좌표는 알아서 정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미리 당부드리지만 영족 영역 바깥으로는 정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귀환이 늦어지면 노부가 수사들에게 변고가 생긴 것이라 오해해 삼청뢰소부를 처분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삼청뢰소부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새어나가면 더 많은 수사들이 찾아들 테니 오래 갖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으하하하, 괜한 걱정을 하십니다. 우리 형제의 혈맥의 힘이면 수라주를 찾을 확률이 7, 8할은 될 겁니다. 십여 일 후에 서로 원하는 것을 취합시다.”

백포 노인이 버티지 않고 동의하자 혈연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와 한 수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옆에서 막간리가 탄식하듯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네 분이 동의를 하셨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묵으시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소수라계로 진입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백포 노인은 원래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가 짝! 짝!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쪽문이 열리고 궁장 차림의 여인들이 걸어 나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에 혈연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린과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들을 따라 쪽문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막간리가 백포 노인에게 포권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한립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바로 걸음을 떼지 않고 불쑥 백포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오랫동안 궁금하던 것이 있는데,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시지요.”

백포 노인은 의외라고 여겼지만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영족이 영계에 존립한 이래 역대 영왕들이 전부 동일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이라면 영 형의 수명은 도대체 몇 살이란 말입니까?”

한립은 웃는 얼굴로 막간리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하하하! 그 소문은 본 왕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본 족이 영계에 자리를 잡은 지 어언 백만 년이 넘었습니다. 영족인들의 천겁 간격이 다른 종족에 비해 길다고 해도 어찌 그리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몇몇 영왕들이 상당히 오랜 기간 생존하다 보니 그런 황당한 소문이 퍼진 듯싶습니다.”

“저도 영계가 진선계도 아닌데 어떻게 수명이 백만 년 이상인 존재가 나올 수 있는지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막간리 수사와 함께 영족 여인의 안내를 받아 쪽문으로 나갔다. 그들이 모습이 사라지자 백포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선계? 저 녀석이 뭔가를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허나 본 왕에게 직접 이런 질문을 던진 자가 한둘인 줄 아느냐.”

백포 노인은 곧바로 하얀 기운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복령산 심처 어두컴컴한 공간에 하얀빛이 반짝이고 백포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공간을 둘러보며 소매 속에서 열댓 개의 빛덩이를 날려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노인과 머지않은 곳에 남색 빛이 반짝이는 얼음으로 된 산봉우리가 보였고 커다란 금색 주술문자가 산봉우리 대부분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반투명한 얼음 아래쪽에 금포를 걸친 준수한 청년이 정신을 잃고 사슬에 묶여 있었다. 청년의 미간에 빙산에 붙어 있는 문자와 똑같이 생긴 금색 문양이 돋보였다.

백포 노인은 거침없이 앞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빙벽에 가져다 댔다.

파앗!

손바닥을 타고 하얀빛이 흘러들어 빙벽의 금색 주술문자를 밝혔다. 그러자 얼음 봉우리 속에서 하얀 기운들이 실처럼 응결해 팔뚝 크기의 소인을 만들어냈다. 눈을 감은 소인은 백포 노인과 얼굴과 복색이 똑같았다.

백포 노인이 손끝으로 자신의 미간을 가리켰고 우윳빛 수정실이 흘러나와 빙벽을 뚫고 소인의 미간 속으로 사라졌다.

소인은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눈을 떠 황금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고생했다. 음양사를 구할 수 있으면 이 녀석을 연화하는 시간을 절반은 단축할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 되면 나도 한시름을 놓을 수 있을 테고. 정말 만 년 이상 이것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면 도중에 무슨 사단이 생길지 알 수 없지 않느냐.”

소인은 노인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만 되면 다행이기는 하지만 삼청뢰소부가 아까운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자질이 뛰어난 후배들에게 주면 그들이 천겁을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될 텐데요.”

백포 노인이 탄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더냐. 선계에서 하계에 없는 부적과 단약들을 챙겨온다고 챙겨왔지만 오랜 세월 동안 본 족이 큰 고비를 넘기느라 거의 다 쓰고 이제 대승기 수사들이 혹할만한 물건은 삼청뢰소부 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저나 석심 노조가 갑자기 죽고 인족 대승기 수사들이 나타난 것은 의외로구나! 그중에 한립은 천추와 함께 마계로 갔던 녀석이 아니더냐.”

“새로 대승기에 오른 인족 수사입니다. 마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마계로 갔던 이들은 전부 죽고 홀로 살아 돌아왔지요. 게다가 영계로 돌아온 후에 천겁을 이겨내고 바로 대승기 수사가 되었습니다. 대승경전에서 야차족 대승기 수사에게 중상을 입힌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대승기 수사보다 실력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보아하니 이 인족 녀석이 세령지에 들어가 정령련을 취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실력을 지닐 수 없지. 어차피 잘 되었다. 강할수록 소수라계에서 광음사를 구해올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막간리가 요족의 오소와 같이 왔다면 결코 거래에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인의 말에 백포 노인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래,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니 계속 잘 살펴보거라. 난 금선의 진혼을 연화시키는데 전력을 다해야 하니 바깥일은 네게 맡길 수밖에 없겠구나. 그들이 소수라계에서 돌아오기 전에는 나를 불러내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안심하시고 연화에만 힘쓰십시오. 어차피 한 몸인데 하루빨리 선혼단을 제련하시면 제게도 무궁무진한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백포 노인이 미소를 머금고 수결을 맺어 빙벽을 가리켰다.

펑!

고개를 끄덕이던 소인은 빛 알갱이로 흩어졌다.

* * *

진선계.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 네모난 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노란 의복을 입은 농부들이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생긴 인형 괴뢰들이었다.

밭에는 두꺼운 줄기를 지닌 거대한 벼가 자라고 있었고, 그곳에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순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또한 허공에는 다양한 색의 구름이 떠있었고 그 위에 장포를 입은 인물들이 손에 각종 물건을 들고 앉아 있었다.

어린 도사의 복장을 한 이들이 혼자 혹은 두세 명이 모여 방대한 밭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종종 손에 쥔 물건을 발동해 구름에서 맑은 빛줄기를 떨구었다.

더 높은 고공에는 안개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끝을 볼 수가 없어 대륙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안개의 바다 속을 영조(靈鳥)와 영수들이 다양한 복색의 인물들을 태우고 드나들고 있었다.

크아아앙!

별안간 용울음 소리가 울렸다.

하늘 끝에서 남색 얼음 교룡이 번득이며 나타나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논 위에 도착했다.

산만한 빙교(氷蛟)가 영계에 나타났다면 평범한 존재들은 기겁을 했을 텐데 논을 일구는 ‘농부’들이나 구름 위에서 감독하는 도사들은 보는 둥 마는 둥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린 소년 도사들만이 고공의 빙교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대인이신 것 같은데요? 며칠 전에 선궁(仙宮)을 떠나셨는데 금방 돌아오셨네요.”

“서두르시는 걸 보면 급한 일이 생긴 것 아닐까? 가셨던 일이 잘 안 풀리셨나 봐.”

한 명이 하는 말에 다른 도사 아이가 말했다.

“그럴 지도요. 하지만 이 대인의 실력이면 우리 금한선궁(金翰仙宮)에서 100위 안에는 드실 텐데 선역에서 못하실 일이 있을까요? 우리 같은 제자들은 이 대인께 조금만 지도를 받을 수 있어도 엄청난 행운일 텐데요.”

“꿈 깨! 우리처럼 선궁에서도 가장 저계 수사들은 말이 좋아 제자지 잡부나 마찬가지라고. 그래도 난 영체를 7성 정도 응결해서 다음번 선발에는 뽑힐지도 몰라. 그때가 되면 이런 잡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겠지.”

두 번째 도사가 입을 비죽이다 손에 쥔 옥패를 살폈다.

“사형, 벌써요? 이제 저는 겨우 5성인데 좀 더 노력해야겠어요. 몇 년 내로 품계 제자가 되지 못하면 속세에 떨어져 하계에 남아 있어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첫 번째 도사가 겁먹은 얼굴을 했다.

“헤헤, 하계의 속세도 나쁘지 않아. 장생(長生)을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건 없는 게 없다더라고.”

“그래도 싫어요. 사형과 함께 꼭 품계 제자가 될 거예요.”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해야겠어, 사제. 5년 내로 진체(眞體)를 응결해 내지 못하면 선궁의 형률집사(刑律執事)들이 봐주지 않을 거야.”

“사형의 충고대로 열심히 할게요!”

아이들이 속닥거리는 동안 고공의 남색 빙교는 안개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만 장을 올라가 안개 속을 벗어난 남색 빙교는 또 다른 세상에 나타났다. 안개 위에는 놀랍게도 수백 개의 산봉우리들이 밀집해 있었다.

높이는 달라도 전부 기이한 화초가 가득하고 아름답게 세공된 누각과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산봉우리들은 아치형 다리처럼 무지개로 연결되어 있었고 궁장을 한 남녀들이 그 위를 표표히 지나다녔다.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색 빙교가 길게 울부짖으며 몸을 틀어 산맥 중심으로 날아갔다. 열댓 개의 산봉우리들이 둘러싼 중간에 거대한 궁전이 떠있었다.

황금색과 푸른색이 휘황찬란하게 번득거리는 궁전에는 머리통만한 주술문자들이 맴돌았고 거대한 대문 밖에는 금갑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 위로 은색 현판에 ‘금한선궁(金翰仙宮)’이란 네 글자가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남색 빙교는 바로 궁전 대문으로 향했고 빛 속에서 키 크고 마른 까만 얼굴의 도사로 변했다. 팔괘가 그려진 도복을 입고 한 손에 불진(拂塵)을 든 그의 몸에서는 속세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대인께서 선궁 대전에 무슨 일이십니까?”

금갑 무사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자가 인사를 하며 물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궁주님을 뵈어야겠네!”

“오늘은 공무를 논하는 날이 아니라서 궁주님께서는 수련 중이실 겁니다.”

병사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데 위엄 있는 목소리가 까만 얼굴 도사와 그의 귀에 울렸다.

“막을 것 없다. 안으로 들여보내거라.”

“예, 궁주님! 이 대인, 안으로 드시지요.”

병사가 흠칫 놀라 얼른 포권을 취하고 길을 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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