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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28화 (1,085/2,000)

1328화. 소수라계(小修羅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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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수사, 그래서 우리가 뭘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만 빙빙 돌리시고 말씀을 해주세요.”

막간리가 눈을 번득이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알겠습니다. 본 왕은 살아남기 위해 전설 속의 광음사(光陰絲)를 필요로 합니다. 광음사 한 가닥 당 노부가 지닌 삼청뢰소부 한 장을 교환할 생각인데 어떠십니까?”

백포 노인은 마침내 원하는 물건을 밝혔다.

“광음사요? 지금 농담을 하자는 겁니까! 아니, 전설로만 전해지는 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찾아내서 거래를 한단 말입니까?”

다들 영왕의 말에 멍하니 있는데 흑린이 분통을 터트렸다.

광음사는 이름 그대로 시간법칙을 함유한 광음의 강에서 탄생하는 기이한 물질이었다. 영계와 같은 하계에서는 당연히 구할 수 없었고 진선계에서나 무상의 법칙을 지닌 몇몇 강에서 구할 수 있었다.

“영왕 형, 거래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막간리도 난색을 표했다. 한립은 경전에서 잃은 광음사와 광음의 강에 관한 내용을 되새기며 턱을 쓸어내렸다.

광음사는 전설 속의 수많은 보물 중에서도 천지조화를 거스를 수 있는 기이한 물건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효과가 바로 수명연장이었다.

듣기로 광음사 한 가닥에 함유된 시간의 법칙으로 범인(凡人)이나 저계 수사의 수명을 천 년 이상 늘릴 수 있다고 했다. 전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 실제 효과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광음의 강이 영계에 존재한 적은 없었고 당연히 광음사도 영계에 나타날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영왕이 광음사를 언급한다는 것은…….’

한립이 추론을 하고 있는데 백포 노인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본 왕이 어찌 감히 수사들을 모아 놓고 농을 하겠습니까! 극품(極品)의 광음사는 확실히 광음의 강에서만 탄생하지만 노부는 물건의 품질과는 상관없이 광음사이기만 하면 됩니다. 가장 저계의 광음사라도 구해오는 분이 있다면 기꺼이 삼청뢰소부를 내드릴 거란 말입니다. 천연의 광음사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면 후천적으로 제련된 광음사를 얻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영왕의 말에 흑린과 막간리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혈연만이 바로 뭔가를 떠올리고 놀란 눈빛을 했다.

“혈연 수사께서는 떠오르는 바가 있으신 가 봅니다.”

영왕이 핏빛의 이족 수사를 바라보았다.

“혈 형?”

흑린도 놀라 혈연을 쳐다보았고 한립과 막간리는 말없이 시선을 마주쳤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영왕 수사는 아주 오래전 출현했던 소수라계(小修羅界)와 그 계면 특유의 수라주(修羅蛛)를 말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그거 외에는 도저히 후천적 광음사를 구할 곳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소수라계!”

“수라주!”

막간리와 흑린이 동시에 소리를 높였다.

‘소수라계와 수라주?’

오직 한립만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소수라계와 수라주는 정말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맞습니다. 수라주는 시공을 조종하는 힘을 타고나 몇 마리만 죽일 수 있다면 그 정핵으로 광음사 한 줄기는 제련해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광음의 강을 찾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방법이지요.”

영왕이 유유히 말했다.

“말은 참 쉽게 하십니다. 소수라계의 괴이함과 수라주의 무서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으로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붕괴된 지 20만 년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소수라계에 간단 말입니까?”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던 혈연이 의문을 제기했다.

“노부가 이런 제안을 드리면서 그것조차 고려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을 보시지오.”

백포 노인은 손바닥을 뒤집어 핏빛을 불러냈다. 한립이 자세히 살피니 핏빛 속에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혈홍색 돌멩이가 들어있었다.

“수라심(修羅心)! 이건 수라심이 아닙니까. 어디서 이것을 구하신 겁니까!”

막간리가 돌멩이를 알아보고 표정이 급변했다. 혈연과 흑린도 아는 물건인지 불가사의하다는 얼굴이었다.

‘…….’

그러나 여전히 한립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소수라계고 수라심이고 다 처음 듣는 말인데 놀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곧바로 그의 귓가에 막간리의 전음이 울렸다.

“20만 년 전, 풍원대륙 남부에서 소수라계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다른 계면과 달리 면적은 그리 크지 않고 내부의 물질들은 상고시대 때 붕괴되어 사라졌다는 흉악한 계면, 수라계(修羅界)와 극도로 비슷해 소수라계라고 불리게 되었지요.

그곳의 대표적인 종이 수라주입니다. 많은 이들이 소수라계가 수라계가 붕괴하며 떨어져 나간 부분일 거라 추측했고요. 소수라계는 위험천만한 계면이었지만 그만큼 영계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진귀한 재료들이 많아 강력한 종족들 사이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일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오히려 계면 입구가 망가져 초대형 세력들도 후회하게 되었지만요.”

“그랬군요. 그럼 수라심은 또 무엇입니까?”

한립도 전음으로 물었다.

“수라심은 소수라계의 강력한 생물의 심장으로 제련한 물건으로 소수라계 특유의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원래는 보물과 단약을 제련하는 데만 쓰였는데, 입구가 붕괴되고 난 후 수라심과 상고시대 때 버려진 계면 간 전송진을 이용하면 입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소수라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대신 이 방법으로 계면에 진입한 자는 수라심을 모종의 방어용 보물로 제련해 항시 곁에 두어야만 계면이 배척하는 힘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물이 품은 힘을 전부 소모하면 당연히 배척의 힘 때문에 자동으로 소수라계 밖으로 전송이 되고요.

안타깝게도 수라심을 만들 만한 심장을 지닌 생물을 죽일 수 있는 수사가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에는 그다지 중시를 받지도 못했던 터라 입구가 소실되고 남은 수량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영계를 통틀어도 다섯 개도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영왕이 수라심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막간리의 자세한 설명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혈연은 백포 노인에게 수라심을 건네받아 세밀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혈연은 한참 만에 돌멩이를 돌려주고는 노인을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수라심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영 형께서는 이것을 몇 개나 지니고 계십니까?”

“두 갭니다.”

노인이 두 손가락을 펼쳤다.

“두 개라고요? 소수라계로 진입하려면 각자 한 개씩 수라심을 지녀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영 형은 우리 중에 두 명을 뽑아 소수라계로 보낼 생각이십니까?”

혈연이 얼굴을 굳혔다. 막간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노부는 오랜 세월 연구를 통해 수라심 한 개를 둘로 나누어 두 명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 한 달 정도 머물 수 있던 기간이 열흘 내외로 줄어들지만 수사들의 실력이면 수라주를 찾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닙니까.”

백포 노인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작 열흘이면 수라주 한 마리를 찾아내기도 벅찰 겁니다.”

“혈연 수사와 흑린 수사께서 각각 상고 진령 혈염육수주(血焰六首蛛)와 흑갑천룡주(黑甲天龍蛛)의 혈맥을 타고나신 것을 압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두 분이라면 혈맥 감응으로 수라주를 찾을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알고 있다니! 우리 형제의 뒷조사를 착실히도 하셨나 봅니다.”

혈연과 흑린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허허, 원래 거래하려던 석심 수사는 더욱 수라주와 가까운 혈맥인 천목사주(千目邪蛛)를 타고난 존재였습니다. 그런 인물이 마계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노부도 부득이하게 여러분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고요!

막 형과 한 수사는 혈맥 감응을 할 수 없어 수라주를 찾을 가능성이 낮겠지만 석심 수사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에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말은 다 한 것 같군요. 이제 네 분께서 소수라계에 다녀오실 생각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백포 노인이 무척 평온한 얼굴로 네 수사를 둘러보았다. 다들 신중하게 고민하느라 바로 답하지 않았다.

“예전에 어느 실력자에게서 수라주에 관해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라계에서 탄생하는 이 괴물은 유충(幼蟲)일 때부터 원영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체격이 커지면서 신통도 날로 늘어 성충이 되면 거의 대승기 수사와 비슷한 실력을 지닌다고 하더군요. 그중에서 자질이 뛰어난 수라주는 진령과도 맞먹을 만하고요. 수사가 말씀하시는 정핵으로 광음사를 제련할 수 있는 수라주는 최소한 성충이야 하겠지요?”

“막 형이 수라계 괴물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예, 성년이 된 수라주여야만 정핵에서 광음사를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세 마리는 모아야 광음사 한 가닥을 제련할 수 있고요. 만일 막 형께서 말씀하신 진령급 수라주라면 한 마리로도 충분할 겁니다.”

영왕은 조금 이상하다는 얼굴로 답했고 막간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소수라계는 원래 위험천만한 곳이고, 성년 수라주는 시공을 조종하는 괴이한 능력이 있어 대승기 법력이 없어도 평범한 대승기 수사보다 위험한 괴물입니다. 광음사 한 가닥을 위해 각자 세 마리씩 수라주를 죽여야 한다면 너무한 것 아닙니까? 겨우 부적 한 장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혈연도 안색이 어두워져 냉랭히 말했다.

“그런가요? 본 왕의 생각은 다릅니다. 전 이번 거래에 삼청뢰수부 외에도 수라심을 두 개나 내놓았습니다. 현재 수라심의 가치는 삼청뢰수부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데 말입니다. 거기다 소수라계는 오래전부터 진귀한 재료와 자원이 많은 것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수라주를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보물을 가지고 돌아와도 충분히 이득일 겁니다.”

“그건 다르지요! 수라심은 소수라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인 물건입니다. 영왕 형이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든 당연히 제공해야할 물품인데 그걸 보수에 포함시키는 것은 옳지 않지요. 또한 그마저도 둘이 나눠 써야 해서 각자가 소수라계에서 머무는 시일은 기껏해야 십여 일입니다.

수라주를 찾느라 바쁠 텐데 다른 보물을 구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썩 괜찮은 보물을 찾는다고 쳐도 우리의 목숨값에 비할 수도 없을 테고요. 우리 같은 경지에 이른 존재가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목숨입니다. 우리 형제도 다음 천겁에서 죽지 않기 위해 삼청뢰소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요.”

영왕의 말에 혈연은 가차 없이 반박했다. 막간리 역시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혈연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한립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흑린은 아예 냉소를 머금었다.

“네 분 다 거래가 불공평하다 여기시면 이렇게 하시지요! 누구든 소수라계에서 광음사를 가지고 오면 삼청뢰소부 외에 본 왕이 제시한 목록 중에서 아무것이나 세 가지를 골라갈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제 마지막 제안이니 아직도 불만이시라면 그냥 돌아가면 됩니다. 노부도 거래할 다른 수사들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들의 표정을 본 백포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다 이렇게 말했다.

“보물 세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단 말이지요? 좋습니다. 그럼 소수라계로 건너갈 계면 간 전송진은 영 형이 알아서 잘 준비해 주십시오. 우리 형제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요.”

혈연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제안을 수락했다.

“진작 성산에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수사들이 동의하시면 당장이라도 소수라계로 갈 수 있습니다. 막 형과 한 수사께서는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삼청뢰수부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가겠습니다.”

노인의 질문에 막간리가 입술을 깨물고 결연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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