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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27화 (1,084/2,000)
  • 1327화. 혈연과 흑린

    *

    복령산 정상 위에는 3층 높이의 거대한 누각이 홀로 세워져 있었다. 누각 대문에 웅장한 필체로 ‘자기당(紫氣堂)’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누각 앞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영왕 대인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여기서 안내를 마치겠습니다.”

    백각 노인이 헛기침을 하고 예를 올렸다.

    “그렇다면 밖에서 기다리게.”

    막간리는 의식으로 누각을 훑고 서슴없이 대문으로 향했다. 자기당은 금제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서 괴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평범한 누각이었다.

    그들은 대문을 지나 널따란 대청으로 들어갔다. 대청 네 벽에는 푸른 이파리가 가득한 꽃나무 화분들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주먹만 한 꽃송이들이 가득 맺힌 꽃나무들이었다.

    하얀 장포를 입은 노인이 화분들 중 하나 앞에 서서 대전의 문과 등을 지고 있었다.

    “영왕 수사십니까?”

    막간리가 진지하게 물었다.

    “멀리서 오셨는데 앉아서 말씀 나누시지요.”

    백포 노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앉겠습니다.”

    막간리가 그런 노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립도 흐릿하게 변해 의자에 앉은 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백포 노인의 뒷모습을 살폈다.

    “노부는 줄곧 홀로 지내는 터라 맑은 차 한 잔 밖에는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대청의 쪽문에서 하얀 털을 지닌 작은 원숭이 몇 마리가 펄쩍펄쩍 뛰어나왔다. 팔뚝 절반밖에 안 되는 원숭이들은 눈처럼 온몸이 하얗고 두 눈이 새빨갛게 빛났다.

    원숭이들이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고 능숙하게 한립과 막간리에게 맑은 차를 올렸다.

    한립이 영차를 한 모금 맛본 반면 막간리는 찻잔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가 찾아온 이유는 짐작하시겠지요?”

    “하하, 막 수사의 명성을 흠모한 지는 오래지만 직접 뵌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수사의 뜻을 헤아리겠습니까?”

    백포 노인이 웃음을 흘리며 드디어 몸을 돌렸다. 혈색 좋은 노인의 두 눈은 번갯불처럼 번득였고 하얀 장포 자락에는 자홍색 단풍잎이 수놓아져 있었다.

    “저희가 어찌 찾아온 것인지 모르시겠다면 혈연, 흑린 수사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막간리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들을 초대한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거래를 하려고 하는데 막 형도 관심이 있으신 가 봅니다.”

    백포 노인이 태연히 답했다.

    “허허,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시니 잘 되었습니다. 저희도 영왕 수사와 거래할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니까요.”

    막간리는 고민 없이 거래 의사를 밝혔다.

    “허허, 그럼 막 수사를 실망시켜 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오직 친분이 있는 수사들과만 왕래를 해서 낯선 이와 거래할 마음이 없습니다. 돌아가시지요, 막 형.”

    백포 노인은 느긋한 어투로 단번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휙!

    그 말을 들은 막간리가 돌연 손에서 은빛을 뿜었다.

    백포 노인은 무표정하게 그의 앞에서 멈춘 은색 옥간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소매에 수놓아진 자홍색 단풍잎 문양이 새겨진 옥간이었다.

    노인이 난색을 표하며 그것을 받아 살피고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석심 노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습니다. 수사가 한 짓입니까 아니면 명충모에게 당한 것입니까?”

    “명충모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엇비슷합니다.”

    막간리가 차분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신물을 얻으셨으니 이번 거래에 두 분도 참여하게 해드리지요. 허나 원하는 바를 이룰지는 각자의 실력에 달려있습니다.”

    은빛을 반짝여 옥간을 거둔 백포 노인이 담담히 말했다.

    “물론이지요. 저희도 기회를 얻고 싶어 찾아온 것입니다.”

    막간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하, 제가 막 수사를 얕보는 것은 아니지만 수사의 실력으로 거래를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다만 옆에 계신 분은 2, 3할의 가능성이 보이는군요! 이분이 새로 대승기에 올랐다는 한립 수사인가 봅니다. 과연 평범한 대승기 노조에 비할 바가 아니십니다.”

    백포 노인이 은근히 막간리를 비웃고는 시선을 한립에게로 돌렸다.

    “영왕 대인께서도 제 이름을 들어보셨다니 영광입니다. 허나 하시는 말씀과는 달리 저와 막 형을 너무 무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립은 빙긋 웃으며 가벼운 어투로 답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희를 무시하지 않고서야 겨우 화신으로 눈속임을 할 리 없지 않겠습니까.”

    움찔한 백포 노인을 한립은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화신?”

    막간리가 깜짝 놀라 다시 의식으로 노인을 샅샅이 훑었지만 강대한 기운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백포 노인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다 웃음 지었다.

    “동심화신(同心化身)을 다 알아보시고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그래도 노부가 수사들을 경시한다고 하신 말씀은 억울합니다. 막 형과 한 수사께서도 오시기 전에 노부가 폐관 수련에 들어간 것은 들으셨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소문은 사실입니다. 본 왕은 쉽게 손님을 맞이할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화신의 모습으로 두 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혈연 수사와 흑린 수사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백포 노인이 솔직히 인정했다. 막간리가 막 뭐라고 말하려는데 대문 밖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영 형, 화신으로 우리 형제를 맞이하려 했다니 실망입니다. 너무 성의가 없는 것 아닙니까? 본체가 생사관에 들어간 것도 아닐 텐데 말이에요. 그러지 마시고 출관해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십시다.”

    까만 피부에 비슷하게 생긴 사내들이 걸어 들어왔다. 몸의 절반 정도가 딱딱한 비늘로 뒤덮인 이종족이었다.

    한 명은 살기(煞氣)가 붉은 기운을 이루어 몸을 감싸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몸에서 음산한 한기를 발산해 작은 소용돌이들이 주변 천지원기를 흡수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보아도 괴상한 형제였다.

    “혈연, 흑린 수사께서 오셨습니다.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해 실례하였군요. 제가 생사관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로 폐관 중이라 두 분이 양해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흥, 그렇게 나오면 거래는…….”

    한 사내가 불퉁거리려는데 다른 사내가 말을 끊었다.

    “되었네, 흑 아우. 우리가 영 수사와 교분을 쌓고자 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본체든 화신이든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될 일이야. 아, 그런데 영 형 이분들은 또 누구십니까? 이번 거래에 다른 수사들이 끼어들 거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요.”

    사내는 냉랭히 한립과 막간리를 쳐다보았다. 대승기 수행을 지닌 막간리도 그 시선을 받고 한기가 들어 미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상대는 대승기 수사에게도 위협이 될 만한 비술을 익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한립의 경우에는 동공을 수축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사내들은 이런 한립의 모습에 놀라며 시선을 교환했다.

    “혈연 수사가 뭔가 오해를 하셨군요. 원래 노부가 처음 거래를 제안한 수사는 석심 수사였습니다. 그런데 석심 수사가 유명을 달리하고 막 수사와 한 수사가 그 신물을 들고 찾아와 거래를 원하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노부의 수중에 있는 물건이 한 장이 아니라서 상관은 없습니다만 여러분들 중 거래에 성공해 원하는 것을 취할 분이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요.”

    백포 노인이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설명했다.

    “영 노괴, 우리 형제는 삼청뢰소부가 꼭 필요해서 거래 소식을 듣자마자 섬의 보물 창고를 전부 털어 이곳까지 달려왔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만 하세요. 우리가 지닌 물건이라면 인색하게 굴지 않고 거래하겠습니다.”

    혈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큼, 저와 한 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 형이 무엇을 원하든 최선을 다해 들어드리고 삼청뢰소부를 교환해갈 작정입니다.”

    막간리가 헛기침을 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서두르지 마시고 일단 본 왕이 직접 제련한 차나 한잔 드시지요.”

    “그것도 좋겠습니다. 영족에서 제련되는 영차가 일품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백포 노인의 말에 이종족 대승기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족 대승기 수사들이 의자에 앉자 새하얀 원숭이들이 펄쩍펄쩍 뛰어나와 그들에게도 차를 올리고 물러났다.

    한립과 막간리는 조급하게 굴지 않고 말없이 기다렸다. 혈연과 흑린이 차를 두 모금 정도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백포 노인이 유유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록 네 분 다 삼청뢰소부 때문에 오신 것은 알지만 본격적으로 거래하기 전에 확실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노부에게는 그것 말고도 각 계면에서 모은 아주 진귀한 재료와 보물들이 있습니다. 모두 목록을 보시고 거래를 원하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일단 본 왕과 거래 맹약을 맺으면 바꿀 기회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고요.”

    “됐습니다. 우리 형제가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오직 삼청뢰소부 때문입니다. 다른 보물이 아무리 귀해도 다음번 천겁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혈연이 몸을 감싼 핏빛을 출렁이며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비슷하게 생긴 흑린도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수사는 어떠십니까?”

    막간리가 길게 숨을 내뱉고 한립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영왕께서 어떤 물건들을 지니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한립은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한 형께서 궁금하시다면 목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노인은 시간 끌지 않고 비취색 옥간을 던져주었다. 한립은 그것을 받아 이마에 대고 의식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다른 수사들은 전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옥간을 영왕에게 돌려주었다.

    “본 왕의 물건들이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백포 노인이 비취색 옥간을 거두고 무표정하게 물었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더군요. 심지어 다른 계면의 재료라 영계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단지, 안타깝게도 제게 그다지 필요치 않은 물건들이거나 삼청뢰소부와 비교하면 효용성이 떨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거 아쉽습니다. 본 왕도 삼청뢰소부를 중시하는 터라 다른 보물로 거래를 대신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요.”

    하는 말과 달리 백포 노인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영 형이 원하시는 거래 내용을 말씀해 주시지요. 수사가 원하는 물건이 흔한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흑린이 조급하게 나섰다.

    “삼청뢰소부의 가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겁니다. 노부가 그걸로 거래를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당연히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원할 테고요. 그저 장담하건대 그것을 수사들이 지니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서신에 원하는 물건은 적어놓지 않으시고 어렴풋이 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암시해놓은 것은 보았습니다. 우리 같이 해역에 거주하는 대승기 수사의 가산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 아니십니까?

    이런 외진 곳에 사는 종족들은 잘 모르겠지만 해역은 자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풍부합니다. 상고시대 때 건설된 해저 동부만 해도 우리 형제가 8개나 찾아냈단 말입니다. 그중에는 삼청뢰소부에 맞먹는 가치를 지닌 보물도 있습니다.”

    “저 역시 기연을 얻어 삼청뢰소부와 교환할 만한 보물을 몇 가지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왔을 리 없고요.”

    혈연의 말에 막간리도 자신 있게 말했다.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삼청뢰소부에 뒤지지 않을 보물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천겁이 임박해 살아남기 위해 삼청뢰소부가 꼭 필요한 것 아니십니까! 제가 요청할 일도 앞으로 본 왕의 생사가 걸린 일입니다. 그 조건이 아니면 삼청뢰소부는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백포 노인은 군더더기 없이 본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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