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6화.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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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산길을 따라 날아가 산 중턱에 이른 한립은 자홍색 거대 패루(牌樓)를 발견했다.
패루 양쪽으로 백의를 입은 중년 사내가 한 명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머리카락이 전혀 없는 대머리였지만 용모는 아주 청수하고 우아했고 다른 한명은 우둘투둘한 피부에 추남으로 얼굴에 붉은 화염이 수염처럼 어른거렸다.
한립은 의식으로 기이한 외모의 백의 중년인들을 훑어 그들이 합체기 수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각각 합체 중기와 합체 후기의 수사들이었다.
‘저들이 성산의 일을 맡고 있다는 성령들인가?’
그가 주저 없이 패루를 지나치는데도 두 명의 영족 합체기 수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내심 웃음을 지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돌연 패루가 보라색 빛을 발산하며 웅웅 울어댔다.
“누구냐?”
“감히 누가 몰래 이곳에 숨어든 것이야!”
조각상처럼 꿈쩍 않던 영족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잇달아 행동에 들어갔다.
등 뒤로 아름다운 기운을 발산한 대머리 사내는 팔이 넷 달린 불상 허상을 불러냈다. 불상은 일곱 빛깔의 영패를 쥐고 지면을 향해 빛을 뿜었다.
쿠쿵!
일곱 빛깔 빛기둥이 땅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또 다른 자도 머리 위에 새빨간 화염이 치솟아 그물로 변해 빛기둥과 같은 곳을 노렸다.
지하 깊은 곳에 이른 빛기둥이 투명한 무언가를 비춰 강제로 본모습을 들춰냈다. 바로 인족 대승기 수사 막간리였다.
그의 얼굴에서 놀란 표정이 가시기도 전에 적홍색 거물이 날아들어 강렬한 화염을 뿜었다. 이에 막간리는 소매 속에서 하얀 기운을 흘려보냈다. 화염이 하얀 기운에 속절없이 흡수되어갔다.
쉭-
그 순간 화염 속에서 부적이 튀어나와 새빨간 실들로 흩어졌다. 아무 조짐도 없이 막간리 지척에 나타난 실들은 불사슬로 변해 그를 구속하려 했다.
놀란 막간리가 기합을 넣어 보호막을 부풀렸다. 막대한 영력으로 불 사슬을 끊어버릴 심산이었지만 사슬의 화염이 동시에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파앗!
그가 잠시 불 사슬과 씨름하는 동안 대머리 영족의 법상이 일곱 빛깔 영패에서 다시금 빛을 방출했다.
쿠릉!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일그러진 영패의 표면에서 일곱 빛깔 주술문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주술문자는 휘리릭 돌아 아름다운 칼날이 되었다. 칼날을 따라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놀랍게도 코와 입과 같은 기관이 생겨났다.
대승기 수행을 지닌 막간리도 의식으로 칼날을 훑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런!’
칼날이 진동하자 놀란 막간리가 다양한 모양의 방어용 보물 여러 개를 내뿜어 겹겹이 방어막을 만들었다.
불 사슬의 구속 하에서 가장 빠르게 불러낼 수 있는 보물을 사용한 것이었다. 가장 강한 수단을 펼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서걱!
이때 검빛이 번득이고 막간리의 머리 위에서 여러 보호막이 두부 썰리듯 잘려나갔다.
장애물을 제거한 검빛이 그대로 막간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둔술에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불 사슬 때문에 떨어지는 검빛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빛이 서늘해진 그가 정수리 위로 본체와 똑같이 생긴 소인을 불러냈다. 소인은 자그마한 두 손으로 은색 단검을 쥐고 있었다.
막간리는 급한 마음에 원영을 방출해 위력적인 검빛을 막을 준비를 했다.
퍽!
그런데 이때 푸른 연기처럼 누군가 끼어들어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강력한 검빛이 가루가 되었고 막간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패루를 통과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다시 돌아와 위기에 처한 막간리를 대신해 검빛을 막은 것이다.
“한 수사,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막간리 머리 위에서 소인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치지지직!
안정을 되찾은 인족 대승기 수사는 수결을 맺고 입에서 하얀 기운을 뿜어 불 사슬을 녹여나갔다.
영족 중년인들은 불 사슬이 사라지는 것을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불 사슬에 금이 가자 막간리는 두 팔로 사슬을 끊어냈다.
강력한 위력을 지녀 방심한 틈에 구속되기는 했지만 잠깐만 시간이 주어졌으면 손쉽게 막아냈을 것이다.
한립의 주먹에 산산조각 난 칼날은 대머리 영족 사내가 서둘러 술법을 펼쳐 다시 복구시켰지만 힘의 원천인 영패가 어두워져 있었다.
대머리 사내는 한립과 막간리가 놀랍게도 둘 다 대승기 수사인 것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게다가 붉은 화염으로 사슬을 만들어낸 영족인은 불 사슬이 끊어진 순간 입에서 피를 토하고 기운이 한층 허약해졌다.
“영인과 영적이 선배님들께 인사를 올립니다. 조금 전에 뭣도 모르고 무례를 범한 점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대머리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예를 취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패루 앞으로 이동해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고, 막간리 역시 그 옆에 나타났다.
“방금 전 공격은 너희의 실력이 아니라 보물의 위력일 터. 영왕 그 노괴물이 하사한 것이더냐?”
대승기 신분에 합체기 후배들에게 부상을 당할 뻔했으니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울화가 치미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영왕 대인의 명을 받들어 규정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대머리 사내가 안색이 변해 서둘러 해명했다.
“영왕의 명이라! 그 늙은이가 어째서 이렇게 귀한 보물들을 너희에게 맡긴 것인지 말해 보거라. 이것들은 우리와 같은 동급 수사들을 겨냥한 보물이지 않느냐.”
막간리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서늘하게 물었다. 대머리 사내는 머뭇거리다 동료와 시선을 마주치고 막 입을 열려했다.
바로 그때 산봉우리 정상에서 파공음과 함께 여섯 개의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대머리 사내와 추한 중년인의 얼굴이 밝아지고 한립과 막간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섯 빛줄기를 훑었다.
둔광이 가시자 비슷한 복장의 여섯 수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합체급 수사로 귀한 보물로 몸을 보호한 탓인지 은은하게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영족인들은 한립과 막간리의 심후한 수행을 감지하고 표정이 달라졌지만 크게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때마침 다들 잘 왔습니다. 안 그래도 알리려고 했는데 두 분 선배님께서 성산을 찾아오셨습니다. 귀한 손님이신 줄 모르고 저희가 무례를 범해 사죄를 드리던 중이었고요.”
대머리 거한은 한결 마음이 놓였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송구스런 얼굴을 유지했다. 그 말에 한립은 작게 미소를 지었고 막간리는 표정이 굳었다.
이렇게 나오면 저들을 혼내주기가 어려웠다. 영왕이 알면 난데없이 찾아온 그들이 멋모르고 실수한 후배를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눈치를 줄 것이 아닌가!
여섯 영족인들은 한립과 막간리에서 예를 올렸고, 그중 하얀 뿔을 지닌 노인이 웃는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께서 성산을 찾아주시다니 본족의 영광입니다. 영왕 대인께서는 며칠 전부터 자기당(紫氣堂)에서 머물며 두 분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며칠 전부터?”
뭔 소린가 싶어 막간리가 움찔했고 한립도 눈썹을 끌어올렸다.
“예, 영왕 대인과 두 분은 미리 약조가 되어있으셨으니……. 이런, 설마 두 분은 지교도(地蛟島)의 혈연, 흑린 대인이 아니십니까!”
백각(白角) 노인이 한립과 막간리의 미미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놀라 물었다. 이에 다른 영족 합체기 수사들도 서로 눈치를 살폈다.
“허허, 혈연과 흑린이라는 이름을 들어보기는 하였네. 웅패대륙(雄覇大陸)의 해역에 머무는 이종족 대승기 수사로 신통이 대단하다지? 노부는 인족의 막간리라 하고 이쪽은 동족의 한립 수사일세. 자네들이 우리에 대해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
막간리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묘한 어투로 소개를 했다. 그는 서늘한 표정을 거두고 평소의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인족의 막 선배님과 한 선배님이셨군요. 제가 큰 오해를 하였으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갑자기 성산에 찾아오셨는지요?”
백각 노인이 속으로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히 물었다.
“노부와 한 수사는 그저 영왕 수사를 만나러 온 것일세! 기왕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다니 잘되었군. 허허, 못 만나고 돌아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지지 않았는가.”
막간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한립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어렸다. 그들이 아주 때를 잘 맞춰 온 것이다.
영왕이 폐관을 핑계 삼아 고의로 시간을 끌면 답답했을 텐데 다른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해놓고 그들만 만나기를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걱정이 되는 부분은 영왕이 느닷없이 이종족 대승기 수사를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그,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영왕 대인께서는 혈연 선배님과 흑린 선배님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라서요. 아무래도 제가 얼른 올라가 보고하는 것이…….”
“그게 무슨 소린가? 혈연과 흑린은 영왕을 만날 수 있고, 우리 둘은 안 된다 이 말인가! 우리 인족이 그렇게 우습단 말인가!”
우물쭈물 거리는 백각 노인을 보고 막간리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한 걸음 나서자 땅이 꺼질 듯 무서운 영기의 압력이 발생했다.
여덟 명의 합체기 영족들은 전부 보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지척에서 쏟아지는 대승기 수사의 기운에 겁먹은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선배님 화를 푸십시오. 저는 절대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백각 노인이 진땀을 흘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막간리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영기의 압력을 높였다.
쿠쿵!
이번에는 여덟 합체기 영족들이 버티지 못하고 동시에 빛을 발산했다. 그러자 여덟 개의 각기 다른 보물이 날아올라 영기의 압력을 막아냈다.
부적 세 장, 영패 두 개 그리고 하얀 솥과 은색 여의(如意)였다.
막간리가 코웃음을 치며 성큼 다가가 더욱 밀어붙이려 했다. 영족의 후배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러나 복령산 정산에서 괴이한 바람이 날아들어 막간리를 감쌌고 뜨뜻한 기운을 느낀 막간리의 영기의 압력이 그냥 흩어져 버렸다.
바람 속에서 온화한 노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막 형, 그만 화를 거두시지요. 녀석들이 생각 없이 범한 무례는 본 왕이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두 분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주셨는데 당연히 기쁘게 맞이해야지 거절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영멸, 내 의식으로 살피니 혈연, 흑린 수사도 산자락에 도착하셨다. 너희 중 넷은 내려가 보고 나머지는 막 형을 공손히 자기당으로 모셔 오거라.”
“존명!”
여덟 성령들이 정상을 향해 절을 하고 보물을 거둔 다음, 일부가 산 아래로 내려갔다. 남은 백각 노인 등 네 명의 영족인들은 한립과 막간리에게 다시 예를 올렸다.
“영왕 수사가 저리 말씀하시니 체면을 봐드려야지 어쩌겠습니까. 한 수사, 일단 올라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십시다.”
막간리가 떠나는 대머리 사내 등을 따라 성큼성큼 정상으로 움직였고 한립도 미소를 지으며 동행했다.
네 명의 합체기 영족들이 그 뒤를 따랐는데 백각 노인이 슬쩍슬쩍 한립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영족에서 강자에 속하는 성령인 그가 한립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다른 종족의 소식이라 뒤늦게 알게 되기도 하고 대략적인 것들뿐이었지만 새로 인족의 대승기 수사가 되었다는 자가 야차족 대승기 수사에게 중상을 입힌 일은 거짓이 아닐 터였다.
그래서 이 영족 노인은 한립이 두려우면서도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막 대승기에 이르자마자 동급의 대승기 노괴물을 격퇴시킬 수 있는 실력자는 몇 사람 없었다.
그러나 한립은 지면에서 살짝 떠올라 슬슬 날아가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복령산 아래쪽의 수많은 진법은 정상에 가까운 위쪽에 비하면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금제 대부분이 작동을 멈추고 있지 않았다면 대승기 수사인 그들도 이렇게 편하게 정상에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식경을 갔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막간리의 표정이 괴상해 질 무렵 한립도 속으로 신기해하고 있었다. 산봉우리는 겉 표면의 금제 외에도 또 다른 현묘한 보물을 품고 있어 그들의 의식을 속였다.
백각 노인 등은 익숙한 일인지 평온한 얼굴이었고 길게 느껴지던 것도 끝이 나고 하얀 안개를 지나 결국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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