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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23화 (1,080/2,000)
  • 1323화. 화석

    *

    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 가한 10분의 1의 힘은 합체기 수사가 최선을 다한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겨우 모래 구슬하나를 옮기지 못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만큼 열살금강사가 괴이하다는 소리였다.

    몇몇 경전에서 이 진귀한 재료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는데 열살금강사의 진정한 무서움은 또 다른 두 가지 기능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뜻밖의 발견이군! 내 손에 들어왔으니 12할의 신통을 발휘하는 것이지. 읍령 성조라 해도 절반의 위력밖에는 내지 못했을 것이야.”

    한립은 입가에 미소가 걸리며 호리병박을 끌어와 주문을 읊었다.

    푸쉭!

    모래 구슬이 흩어져 모래 안개로 스며든 다음 거대한 노란 구렁이로 변해 호리병박으로 날아들었다.

    쿵!

    노란 호리병박이 구렁이를 흡수하고 떨어져 나갔던 뚜껑이 어느새 나타나 단단히 구멍을 막았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호리병박을 넣어둔 한립은 밀실에서 조용히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한 시진 후, 그가 눈을 뜨더니 새까만 고리를 불러냈다.

    눈부신 금빛 속에서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나타나 허공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느다랗게 보라색 문양이 새겨진 새까만 알이었다.

    커다란 알을 불러들인 한립이 그것을 쥐고 입술을 달싹였다. 일종의 비술로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껍질을 벗고 나오기 직전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힘을 보태주마.”

    한립은 숨을 들이마시며 알을 쥔 손가락에 금빛을 일으켜 방대한 진원의 힘을 불어넣었다. 커다란 알 표면에 보라색 문양이 밝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잠시 후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졌고 커졌다 작아졌다 하던 알은 점차 흐릿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한립의 손에서는 정순한 진원의 힘이 봇물 터진 것처럼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장장 한 시진이나 지나자 검은 알은 드디어 갈라지기 시작했고 금빛 속에서 흐릿하게 손가락만한 자금색 소인이 나타났다.

    팔, 다리도 멀쩡하고 두 눈이 옥처럼 빛났는데 머리카락과 입, 코가 없이 얼굴만 금빛으로 반짝였다.

    “이게 그 서금충왕?”

    자금색 소인을 본 한립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런데 자금색 소인의 시선이 한립에게 향했다. 거의 동시에 한립은 목 양쪽이 서늘해졌고 팔뚝 크기의 금빛이 아무 징조도 없이 나타나 그의 목을 베었다.

    한립은 흐릿하게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두 금빛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교차해 소실되었다.

    파동이 일고 밀실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손끝으로 목을 쓸었다. 과연 매끄럽던 목 양쪽에 가늘게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런…….’

    그의 육체의 강도를 생각하면 기함할 일이었다.

    한립은 화들짝 놀라 자금색 소인을 힐끗 보고 갑자기 혀끝을 깨물어 피를 뱉었다. 핏물이 머리통만한 주술문자로 변해 깜빡거렸다.

    파앗!

    자금색 소인의 미간에 한립의 것과 똑같이 생긴 주술문자가 떠올라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이 낮게 기합을 넣자 자금색 소인이 극통을 느끼는 것처럼 몸을 떨며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바로 몸을 편 소인은 한립을 향해 열손가락을 그었다. 요란한 빛을 머금은 검기 10개가 한립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검기가 직접 닿기도 전에 음산한 한기가 먼저 느껴졌다. 그의 보호막도 한기를 차단하지 못했다. 대승기 수행을 지닌 한립이 한기에 몸을 떨었고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느려졌다.

    검기에 난도질당하기 직전인데도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에 자금색 소인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휘청거렸고 열 개의 눈부신 검기도 그 영향을 받아 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 틈에 한립이 뇌전으로 변해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곧바로 미간에서 의식의 실들을 뿜어 머리통만한 핏빛 주술문자에 주입했다. 이에 깜빡거리던 주술문자가 확고하게 응결되었고 자금색 소인이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자금색 소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한립은 순식간에 불러내 검은 요목을 없애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충왕으로 진화하면 이전에 심어 놓은 금제가 통하지 않을 줄 알았지. 세 마리가 남았을 때 따로 조치를 취해둔 것이 다행이구나! 안 그랬으면 제압하느라 골치를 썩을 뻔 했어. 비술을 이용해 다시 제련하는 수밖에 없겠어.”

    한립은 소매 속에서 백여 개의 깃발을 불러내 밀실에 커다란 진법을 펼쳤다. 그 중간에는 정신을 잃은 자금색 소인이 있었다.

    그는 주문을 외며 법결들을 그 속에 던져 넣었다.

    스스스스슷!

    진법에서 무수히 많은 오색실이 뿜어져 나와 중앙의 자금색 소인을 구속했다. 한립은 정혈을 몇 모금 뱉어 핏빛 주술문자를 자금색 소인의 몸에 흡수시켰다.

    진법이 크게 진동하고, 밝은 빛이 터져 나와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얼마 후, 한립이 밀실에서 나왔고 안색이 썩 밝아보였다. 서금충왕 제련이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한 달이 흐르자 기령자와 백과아가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만황세계로 떠났고, 그로부터 십여 일 후에는 한립도 은월과 주과아를 데리고 묵령성주를 타고 성도를 떠나 요족 영역으로 날아갔다.

    묵령성주는 요족 영역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요족들과 마주쳤지만 요족들은 수행의 고하를 막론하고 감히 그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묵령성주의 방대한 크기와 엄청난 기운의 마정괴뢰들을 보면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립의 선박이 어느 해역이 이르렀을 때, 심해 속에서 수련하던 합체기 요족 수사의 심기를 건드렸다.

    만여 년 전에 이곳에 동부를 건설하고 주변 요족 무리를 쫓아낸 요족 수사는 인근 해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기고 있었다. 불같은 성질을 지녔으나 실력은 동급 요족 수사들 중에서도 꽤 좋은 편이고 강력한 보물들을 지니고 있었다.

    웅! 웅!

    그런 요족 수사가 하필 중요한 단약을 제련하고 있는데 밀실 밖에서 경고음이 들려왔다.

    순간 정신이 흐트러진 그는 옥 부채에서 뿜어내던 푸fms 화염의 화력을 높였고 그 때문에 눈앞의 솥에서 펑, 하는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에 합체기 요수(妖修)는 악을 쓰며 하얀 빛줄기로 변해 동부를 나섰다. 공들여 겨우 모은 진귀한 재료를 날렸으니 속이 엄청 쓰렸고 화풀이 할 대상이 필요했다.

    “내력이 있는 자면 손해를 보상하는 선에서 보내주겠지만, 아니면 뼈를 갈아 단약을 망친 죄를 물을 것이야!”

    물에 사는 요족답게 능숙한 수둔술로 물 밖으로 튀어나온 그는 푸른 물 구렁이를 밟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누가 감히 나 화석 노조의 일을 방해했느냐! 얌전히 나서지 않으면 내 가만두지……. 엇! 당신들은…….”

    물고기 비늘 갑옷으로 상반신을 가린 요수가 불현듯 멍해졌다.

    고공에서 서서히 지나가는 검은 선박과 그 위에 빼곡하게 선 꼭두각시 병사들을 보고 심장이 철렁한 것이다. 꼭두각시들 중 몇 마리는 그보다 기운이 강했다.

    요수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이런, 제가 사람을 잘못보고 소란을 피울 뻔 했습니다. 저는 물러날 테니 편히 가셨으면 좋겠군요.”

    요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푸른 물 구렁이를 밝아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으려 했다.

    “잠시 만요! 누구신가 했더니 화석 노조셨군요. 안 그래도 이곳 지리에 밝은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듣기 좋은 은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검은 선박에서 파동이 일고 수족(水族) 요수를 뛰어넘는 수행을 지닌 괴뢰 네 마리가 맨 손으로 뛰어내렸다.

    화석 노조가 안색이 급변해 물 구렁이를 박차고 아래로 뛰어들면서 입에서 방어용 보물들을 여러 개 분출했으나 마정괴뢰들이 두 팔을 뻗어 요수를 덮쳤다.

    요족 수사의 방어 법보는 무형의 괴력에 힘없이 쪼개졌고 화석 노조는 물론 푸른 구렁이도 공기가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화석 노조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네 괴뢰들에 포위당해 선박으로 끌려올라갔다. 그 중 한 마리는 다른 손에 푸른 구렁이를 틀어쥐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선박의 대청 안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한립과 마주했다. 주과아와 은월이 그의 옆에 서있었다.

    털썩!

    괴뢰들은 화석 노조와 푸른 구렁이를 바닥에 던져두고 대청을 나섰다. 화석 노조는 자유를 되찾았지만 괴뢰들이 무슨 짓을 해둔 것인지 법력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거기다 은월은 그보다 기운이 강했고, 한립은 정체모를 위압감을 풍겼다. 수족 요수는 잔뜩 열이 올랐지만 반항하는 대신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저는 화석이라 합니다. 저를 여기로 붙들어 오신 것은 하실 말씀이 있어서 입니까?”

    한립이 합체기 요수를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을 때 옆에 선 은월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말도 들어보지 않고 달아나려 하시더니 지금은 참 얌전하시네요.”

    “하하, 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낯선 강자를 만나면 얼른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요.”

    화석 노조가 멋쩍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한립을 힐끔거렸다.

    “글쎄요. 처음 그 기세로 보아서는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려던 것 같던데요?”

    은월이 갑자기 정색하며 차갑게 말했다.

    “저,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수사 분들을 지나가는 후배로 착각해서 벌인 일입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 화석 노조가 서둘러 변명했다.

    “네가 무슨 착각을 했든 먼저 싸움을 걸었으니 반드시 나를 도와 한 가지 일을 해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벌을 받든가.”

    줄곧 가만히 있던 한립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화석 노조는 속이 답답해졌지만 감히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간신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드려야지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뭔가를 찾아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 상고시대에 남겨진 부서진 제단인데 스스로 이동할 수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구나. 아는 바가 있느냐?”

    한립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용건을 밝혔다.

    “아, 사남사방단(司南四方壇)을 찾으러 오신 것이군요! 잘 알고 있지만 찾아내려면 운이 따라줘야 합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제단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 몇 곳을 안내해드리는 것뿐이고요.”

    화석 노조가 긴장을 풀고 빠르게 답했다.

    “좋다. 안내해 보거라.”

    한립이 곧바로 명을 내렸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과아가 눈을 빛냈다.

    검은 선박은 해역 위에서 잠시 머물다 쿠릉! 하고 출발해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 * *

    두 달 후,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난 밀림 위에 방대한 묵령성주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갑판에는 한립이 은월과 주과아를 데리고 나와 있었고 합체기 요수인 화석 노조도 공손히 그들 뒤에 서있었다.

    화석 노조는 한립이 인족에 새로 등장한 대승기 노조라는 사실을 안 뒤로는 허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히 한립 일행을 안내해 상고제단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로 향했다. 허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허탕이었다.

    “여기가 네가 말한 곳이더냐?”

    한립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예, 선배님! 밀운흉림(密雲凶林)은 화신기 이하의 수사들에게는 금지 지역으로 통할 만큼 요족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곳입니다. 연허기는 되어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수행이 낮은 이들이 들어가면 십중팔구 죽어나갑니다. 자연환경이 극악하고 지능이 발달하지 못한 강력한 요수들과 특수한 독충들이 들끓는 곳이지만 선배님 같은 분에게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지요.”

    화석 노조가 공손히 설명했다.

    “사남사방단이 이곳에 나타난 적이 있다고?”

    “몇몇 수사들이 멀리서 상고 제단이 저 아래 습지에 나타난 것을 본적이 있다고 합니다. 제단이 낡고 망가져서 표면의 상고 문자와 진법을 연구하는 것 외에는 별 쓸모가 없다고 여겨 대부분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하, 그렇다면 내려가 보자꾸나. 왠지 제단이 이곳에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한립이 웃음을 머금었고 주과아와 은월이 그의 말에 희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선박에서 표표히 떨어져 내려 밀림 속의 드넓은 습지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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