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2화. 호음석(昊陰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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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풍원대륙 모처의 물길 위에서 얼굴에 금은색 문양이 새겨진 백포 청년이 화염 사자를 닮은 고대 짐승 떼와 대치하고 있었다.
청년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면 한립과 닮아 보였다.
그리고 청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은색 장포 여인이 냉랭한 얼굴로 청년과 사자 떼의 싸움을 관망하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기운을 거두자마자 먼저 뛰어들어 나를 건드리다니 제 발로 죽을 곳을 찾아온 것 아닌가! 오랫동안 혈식(血食)을 못했으니 너희로 입맛이나 돋운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화신기 정도의 수행을 지닌 불 사자들을 훑고 백포 청년이 혼잣말을 했다. 그가 수결을 맺자 등 뒤에서 투명한 날개가 펼쳐졌다.
상대편 불 사자들은 지능이 그리 높지 않은지 청년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분분히 덤벼들었다.
불 사자들은 뛰어들면서 입에서 불구슬을 미친 듯이 뿜어내기 시작했다.
흉흉한 기세의 공격이 쏟아지는데도 백포 청년은 냉소하며 여섯 날개를 털어 흐릿하게 사라졌다.
퍼퍼펑!
불구슬들이 허공에서 터져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머지않은 곳에 서있던 은포 여인에게 열기가 날아들 정도였다.
은포 여인이 얼굴을 굳히자 뒤에서 하얀빛이 나타나 커다란 하얀 봉황 허상을 만들어냈다. 허상은 날개를 펄럭여 하얀 한기로 그녀를 착실히 보호했다.
하얀 한기가 불길과 만나 치지직 거리는 소리를 내자 여섯 개의 날개 달린 그림자가 귀신처럼 불 사자 떼 중간에 나타났다.
푸푸푸푹!
하얀 그림자들은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무시하고 손을 고대 짐승의 몸 안으로 쑤셔 넣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한기가 팔을 타고 내려가 불길을 멸하고 불 사자를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가두었다.
그 모습에 나머지 불 사자들이 다시 덤벼들었지만 하얀 그림자들이 날개를 털고 사라진 후였다.
얼음덩어리가 된 불 사자들은 낑낑거리다 그대로 부서져 사라졌다.
또 다른 불 사자들 곁에 날개 달린 그림자 여섯 개가 나타나 몸통을 꿰뚫고 사라졌다.
이렇게 날개 달린 하얀 그림자들이 몇 번 나타났다 사라지자 불 사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불 사자들은 낮게 울부짖으며 방향을 틀어 달아나려 했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여섯 그림자가 돌연 한 곳으로 뭉쳐져 백포 청년으로 돌아간 다음 달아나는 불 사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청년의 어깨에서 모호하게 빛이 뭉쳐져 열댓 개의 팔들이 생겨났고 손바닥들은 정확히 불 사자들을 가리켰다.
하얀빛이 번뜩였다.
푸푸푸푹!
열댓 개의 빛기둥들이 쏘아져나갔다.
빛기둥들은 달아나던 불 사자들을 꿰뚫어 순식간에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백포 청년은 서늘한 얼굴로 날개를 털고 얼음덩어리로 이동해 손을 뻗었다.
가벼운 손짓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얼음덩어리 속의 불 사자가 몸을 부르르 떨고 산산조각이나 핏빛 안개로 흩어졌다.
오직 붉은 빛의 혼백만이 핏빛을 빠져나와 좌충우돌하며 얼음 속을 맴돌았다.
백포 청년이 느긋하게 입에서 하얀 기운을 뿜어 얼음 속으로 집어넣었다.
하얀 기운은 핏빛 안개와 불 사자의 혼백을 집어내 청년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빠르게 이동하며 불 사자들의 혈육과 정혼을 흡수하던 청년이 만족스런 얼굴로 은포 여인을 돌아보았다.
“빙봉 수사, 먹을 만한데 원한다면 몇 마리 맛보겠나?”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던 여인은 오랜 세월 인족을 떠나있던 빙봉이었다. 그녀의 기운은 이전보다 몇 배로 강해져 합체기 경지가 머지 않아보였다.
“전 살면서 혈식 따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육익 수사나 마음껏 드십시오.”
빙봉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거 아쉽게 되었군! 양기를 품고 있는 고대 짐승들이라 우리처럼 얼음 속성 진원을 지닌 수사가 흡수하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적잖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백포 청년은 웃음을 흘리며 나머지 불 사자들을 모조리 흡수하고 순간이동 해 빙봉 옆에 나타났다.
“빙봉 수사, 그럼 출발하지.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여족(餘族)이 뇌명대륙의 강대 종족과 관계가 깊다니 분명 대륙 간 초대형 전송진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네.”
백포 청년이 빙봉이 놀랄만한 말을 했다.
“뇌명대륙으로 갈 작정입니까?”
“말해 무엇 하겠나. 얼마 전에 이종족을 통해 옛 주인이 대승기에 이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인족으로 갔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이야 뇌명대륙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지. 지금 내 실력에 옛 주인을 제압할 수나 있을까?”
백포 청년이 냉소했다.
“한 형이 수사를 박하게 대우한 적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가 영약으로 수사의 수련을 돕지 않았으면 영성을 깨닫고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도 없었겠지요!”
침묵하던 빙봉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한립을 죽이려는 이유는 그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 지와는 상관없는 일일세. 당초 혈제(血祭)를 이용해 그가 내 원신에 주인과 종복의 인식을 심어놓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비술의 대부분 효력을 제거했지만 그 자가 죽기 전에는 완전히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야. 본 좌가 영성을 깨우치고 사람의 형상을 한 이상 대도를 향해 나아가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나? 어찌 다른 이가 내 약점을 쥐고 있도록 그냥 두겠냐 이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뇌명대륙에서 ‘그걸’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요? 전부 전설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수사가 상관할 바가 아니네.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까 나도 뇌명대륙에 가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네.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뇌명대륙의 소음족(素陰族)은 음기를 지닌 성신(星辰)과 교류해서 소음성기(素陰星氣)를 응결할 수 있다지. 하하, 그것만 역령대법으로 흡수하면 난 바로 진령의 몸을 갖추고 다른 강력한 진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네! 그때가 되면 옛 주인인 한립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
“한 형을 찾아가든 뇌명대륙을 찾아가든 혼자 가면 될 일이지. 어째서 나와 함께 가려는 것입니까?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손을 썼으면 되었을 텐데요.”
빙봉이 난색을 표하며 물었다.
“내가 수사를 왜 죽여야 하지? 우리는 천지의 음기를 타고난 생령으로 수련을 통해 사람의 형상을 갖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마침 수컷과 암컷으로 만났으니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볼 수 있네. 본 좌가 한립을 죽이는 대로 얌전히 내 쌍수반려가 되어야 할 게야.”
백포 청년이 광소를 터트렸다.
“대승기 경지에 이른 노조가 억지로 반려가 되기를 강요하다니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빙봉의 얼굴이 퍽 창백해졌다.
“흥, 내가 대승기 노조이기 때문에 더욱 빙봉 수사와 같이 적당한 반려를 찾기가 어려운 것일세. 거기다 내가 체면을 따지는 이로 보이는가?”
백포 청년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빙봉은 열을 받았지만 상대의 적수가 되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언제고 달아날 기회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백포 청년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소매를 털었다. 그의 머리 위로 여섯 개의 날개가 달린 새하얀 지네 허상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감싸고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 * *
인족 성도에서 한립은 제자들에게 몇 가지 급한 용건을 전달하고 손을 저었다.
“백 사매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물러가거라. 따로 나눌 말이 있다.”
“예, 스승님!”
“저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기령자와 해대소 그리고 주과아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대청에서 나갔다.
“과아, 너는 내가 너만 남겨 놓은 이유를 알겠느냐?”
“감히 짐작해 보건데, 제가 곧 만황세계로 떠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하, 총명하구나. 내가 널 제자로 거둘 때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저를 제자로 거둬주실 때라면……. 빙수지체에 관한 이야기라면 항상 마음 속 깊이 새겨두고 있었습니다.”
백과아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제 너도 수행이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했고 또 만황세계로 떠나기 직전이니 말해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어떤 분부든 내려주십시오, 스승님.”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저 경험을 쌓으며 만황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를 도와 호음석(昊陰石)이란 물건을 찾아주면 된다. 보통 빙하 수만 장 아래에 한기로 둘러싸여 있어 의식으로도 찾을 수 없는 물건이지만 유일하게 한백(寒魄) 신통을 익힌 자만이 멀리서도 그것을 감응할 수 있지. 내 호음석이 대량으로 필요하니 유람을 하면서 사부를 대신해 찾아 보거라. 일정 수량 이상 모아온다면 내 큰 상을 내릴 것이야.”
“스승님께서 대량의 진원을 허비해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찾아볼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백과아가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었다.
“일어나거라. 아직 수행이 높지 않으니 무리할 것은 없고 경험을 쌓으며 돌아다니는 김에 약간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구해오면 된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백과아는 반드시 호음석을 찾아내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는 몇 마디 당부를 하고 백과아를 내보냈고 별안간 대청 안에 홀로 남았다.
한립은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처음에 원합오극산 제련법을 얻었을 때만 해도 이 후천적 현천의 보물을 제련할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한두 개만 손에 넣어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그런데 운이 따라주어 어쩌다 보니 원자극산(元磁極山), 태을청산극산(太乙靑光極山)에 음양대오행극산(陰陽大五行極山)까지 제련을 마치게 되었다.
만일 백과아가 충분한 수량의 호음석을 구해온다면 호음한백극산(昊陰寒魄極山)을 제련해 총 네 개의 극산을 모을 수 있게 되고, 나머지 북극원광극산(北極元光極山)은 인계로 가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신통으로 직접 인계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계면을 뚫을 만한 보물 몇 개를 이용해 의식 화신을 내려 보내는 것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위험한 일이다 보니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실행을 해야 했다.
다섯 극산을 모아 원합오극산을 제련하는데 성공하면 이후 몇 차례의 대천겁은 걱정할 필요도 없고 비승 천겁을 이겨낼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 * *
반나절 후, 성도의 금제로 삼엄하게 둘러싸인 밀실 안에서 한립은 방석에 앉아 누런 빛덩이를 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주먹 크기의 노란 호리병박이 떠있었다.
그것은 묵령성주 외에 그가 읍령 노조의 보물 창고에서 얻은 두 번째 보물로, 푸른 등잔은 은월에게 있었다.
묵령성주는 크기가 크고 속도가 빠른 것은 물론이고 허공을 찢고 나아갈 수 있는 공간 신통을 지녀 마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비행 보물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가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푸른 등잔도 정체 모를 현천의 보물 조각이 녹아 있어 괴이하게도 금속과 나무 속성의 강력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유일하게 노란 호리병박만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뭔지 모를 재료 덕분에 자연적으로 의식의 힘을 흡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뚜껑도 호리병박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뜻밖에도 한립 조차 뚜껑을 열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호리병박을 흔들어 보면 안에서 쿠르릉 거리는 굉음이 들려와 범상치 않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립은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호리병박을 삼켜 밤낮없이 진원으로 녹였고 오늘에 이러서야 드디어 대부분 연화를 시켜 뚜껑을 열수 있을 듯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열 손가락을 튕겼다.
휘휘휘휙!
오색 주술문자들이 튕겨나가 호리병박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열려라.”
한립이 기괴한 수결을 맺자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허상이 떠올라 미간의 요목을 떴다. 파공음과 함께 검은 수정실이 법상의 제3의 눈에서 쏘아져 나와 호리병박을 감쌌다.
쿠르르릉!
호리병박의 뚜껑이 달그락거리다 열리고 굉음이 울렸다.
노란빛이 마구 흘러나와 황토색 모래 알갱이로 변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모래 알갱이들을 노란 기운이 휘감고 있었다.
허공에 사람만한 황토색 모래 안개가 떠올랐는데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의식으로 노란 모래 안개를 훑고는 표정이 확 달라졌다.
“열살금강사(烈煞金罡沙)! 게다가 세심하게 제련되어 호리병박과 완전히 일체가 되어있어. 읍령 성조 덕에 이렇게 많은 양을 얻는군.”
그는 중얼중얼 거리며 손을 뻗었다.
휘익!
노란 모래 안개에 무형의 흡인력이 작용했다. 모래 알갱이들이 빛을 발하고 빙글 돌며 뭉쳐지더니 묵직한 모래 구슬이 되었다.
모래 안개는 모래 구슬이 나타난 후로 점점 무거워져 조금씩 끌려오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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