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0화. 삼청뢰소부(三淸雷霄符)
*
반년 후, 인요족 접경지대의 성도 안.
은발 청년과 노인이 대청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인요족 대승기 수사인 오소 노조와 막간리였다.
대청 양측으로는 십여 명의 성도 장로들이 얌전히 손을 모으고 서있었다.
“지금쯤이면 녀석이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마계에서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소 노조가 얼굴을 찌푸리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를 능가하는 한 수사의 실력에 무슨 일을 당하겠습니까? 명충모도 그를 어쩌지 못했는데요.”
막간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흥, 그건 사실이지만 세상에 강자는 깨알 같이 많은 법입니다. 녀석의 성격이 고분고분하지도 않으니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려 성가신 일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지요.”
오소 노조가 불만스레 입을 비죽였다.
“하하하, 오소 수사. 어째 점점 말투가 점점 사윗감을 타박하는 장인 같아지십니다. 설마 손녀와 한 수사를 엮어 주려고 하십니까?”
막간리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본 노조가 그리 생각하는 게 뭐 잘못입니까? 손녀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아이의 자질이면 이후 확실히 대승기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곳에 모인 수사들 보다는 가능성이 높을 거고요. 게다가 그 둘이 맺어지면 인족과 요족이 정말로 한 가족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오소 노조가 눈을 부릅뜨며 대청 양측에 선 수사들을 가리켰다. 성도 장로들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소 노조의 말에 동조했다.
“이 늙은이가 거 참…….”
막간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심 오소 노조의 말이 일리는 있다고 여겼다.
“허나 한 수사는 이미 인계에서 반려를 맞이했고 상대와 감정이 아주 깊다고 들었소. 그러니까 영계로 비승한 후에도 계속 그 수사를 찾아다녔겠지요.”
“허허, 우리 같은 존재가 반려를 여럿 두는 게 어디 이상한 일이랍니까? 또 내가 늙었어도 벌써 눈이 침침해 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영롱을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기에 감정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 수사는 우리와 비교하면 아작 한창때가 아닙니까. 이후 반려를 여럿 두면 뛰어난 자질의 후손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막간리의 말에 오소 노조가 멍하니 굳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얼굴로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두 분이 저를 두고 그리 농을 하시니 불편해서 나설 수가 없겠습니다.”
대청 입구에서 파동이 일고 청년과 여인이 나타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보고 있는 청년은 한립이었고, 얼굴을 붉힌 아름다운 여인은 은월이었다.
“아,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양쪽의 성도 장로들이 깜짝 놀라 서둘러 예를 올렸고 오소 노조와 막간리가 반가움에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 수사, 드디어 돌아왔군요. 기다리다 눈이 빠질 뻔 했어요.”
“하하, 본 노조는 수사가 영롱을 데리고 야반도주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두 대승기 노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그를 맞이했다.
“두 분 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저와 은월 소저 모두 무사히 돌아왔지 않습니까. 수사들도 그만 예를 거두어도 되네.”
“잠시 한 수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자네들은 전부 물러나 있게.”
오소 노조가 성도 장로들을 향해 명을 내렸고, 장로들은 한 목소리로 답하고 대청을 나섰다.
대청 안에는 네 사람만 남았다. 한립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 대승기 수사와 마주보았다. 은월은 오소 노조 곁을 지나며 슬쩍 조부에게 눈을 흘기고 뒤로 가서 섰다.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듣고 퍽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한 수사 덕에 나와 오소 형이 마계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노부가 잊지 않고 보답할 것이에요.”
막간리가 진심을 담아 포권을 취했다.
“그렇지요. 수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 둘 다 마족 놈들과 같이 상고봉인 속에서 숨이 끊길 뻔 했습니다. 노부도 두고두고 빚을 갚겠습니다.”
오소 노조도 숙연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두 분이 양족을 위해 오랜 세월 고생하셨는데 마땅히 도와야지요.”
한립을 손을 저으며 답했다.
“허허, 그게 어디 같겠습니까! 우리가 본족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사가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별개입니다. 이 은혜는 마음 속 깊이 기억해 두겠습니다.”
막간리가 인자하게 웃음을 지었고 오소 노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한립은 두 대승기 노조들과 명충모 일을 포함한 마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시인의 땅에서 만난 상고 진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보화와 상고봉인의 힘 덕에 명충모를 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 수사, 이제 막 본 족으로 돌아왔는데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동안은 바깥나들이도 자제하고요.”
돌연 막간리가 묘한 얼굴로 제안했다.
“막 형,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립이 노인의 의도를 몰라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하아, 오소 형의 다음번 천겁이 몇 년 남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 둘이 호법을 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숨을 내쉰 막간리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오소 수사의 천겁이 곧 도래한단 말씀입니까.”
차분하던 한립도 안색이 달라져 오소 노조를 쳐다보았다.
“조부님, 그게 사실입니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은월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하하, 천겁이란 것이 본디 천여 년에 한번 씩 도래하는 것인데 노부가 특수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미뤄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조금 벌수는 있지만 다음 번 천겁이 훨씬 강렬해지지. 허나 어차피 지난번 천겁도 이겨낼 확률이 높지 않았으니 내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간 네가 합체기에 이르는 것도 보았고 한 수사 덕분에 훨씬 마음이 편해졌어.”
침묵하던 오소 노조가 은월을 향해 자상하게 웃음 지었다.
“저, 저를 위해 그런 독주(毒酒)로 갈증을 푸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은월의 목소리가 슬픔으로 잘게 떨렸다.
“자책하지 말거라. 네가 아니었어도 마계의 침략을 앞두고 노부가 어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겠느냐.”
오소 노조의 말에도 은월은 못 믿겠다는 듯 고개만 저었다.
“오 수사, 정말 이번 천겁을 무사히 넘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까? 무엇이든 필요로 하신 게 있다면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립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비술로 천겁을 미루지 않았다면 1할의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으나, 지금은 그 절반도 안 될 겁니다. 도겁을 도와줄 보물들은 진작 모아 두었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것들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물건들이 아니고요. 노부도 더는 헛된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소 노조가 탄식했다.
“살아남을 확률이 그렇게 낮다고요? 말도 안 돼요! 조부님, 정말 아무 방법도 없으신 건가요?”
“방법? 한 수사의 그 은뇌영근을 지녔다는 제자가 대승기 수사였다면 약간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다.”
오소 노조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이에 은월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한립과 막간리는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쳤다.
임시로 해대소의 경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들과 동급인 대승기 수사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천뢰를 막는데 효과가 있는 한립의 극산들은 그가 연화해서 빌려줄 수도 없었다.
“……오소 수사가 무사히 천겁을 넘길 확률을 1, 2할 정도 높여 줄 물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민하던 막간리가 한 마디 내뱉었다.
“막 선배님,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월이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향해 물었다. 오소 노조도 처음 듣는 소리인지 표정이 달라졌고 한립도 막간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소 수사, 석심 노조를 기억하시겠지요?”
막간리는 바로 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석심 노조야 당연히 기억합니다. 우리와 같이 시인의 땅에 들어간 운강족(雲崗族) 대승기 수사가 아닙니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는데 그 후에 상고봉인 속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압니다. 수사가 말한 물건이 석심 노조와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오소 노조가 기억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답했다.
“그가 천겁을 막을 보물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관련 정보를 주기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물건이 영족(靈族)에 있는 것 같고요.”
“그 자가 마계에 오기 전 확실히 영족에 다녀가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막 형이 말하는 그 보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삼청뢰소부(三淸雷霄符)입니다.”
머뭇거리던 막간리가 결국에는 입가에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요? 그건 전설 속에나 있는 무상(無上)의 부적으로 하계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요.”
오소 노조도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삼청뢰소부는 대승기 천겁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 몇 안 되는 보물로 경전에 기록이 전해져 각계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하지만 다른 보물과 달린 이 부적은 소모품이었고 선계의 진선만이 제련할 수 있어 여러 계면에서도 삼청뢰소부를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대승기 노조들도 하계에 그런 부적은 없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막간리가 그것이 인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족에 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는 하계에 나타나선 안 될 물건이지만 석심 노조는 영족에서 직접 그 부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밝힐 수 없지만 저는 그 말이 사실일 거라고 믿습니다.”
막간리가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막 형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거짓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허나 어째서 석심 노조는 부적의 존재를 알고도 취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천겁이 멀었다고 해도 그런 보물을 놓칠 리 없었을 텐데요.”
오소 노조는 막간리가 어째서 확신하는지 궁금했지만 따지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 보물이라면 저라도 절대 그냥 두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한립이 그의 말에 동조했다.
“하하, 두 분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석심 노조는 보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주인과 계약이 성사되어 마계에서 돌아오는 대로 삼청뢰소부를 받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막간리가 웃으며 해명했다.
“영족에서 석심 노조가 거래를 통해 부적을 얻어야할 상대라면! 설마 그 자의 손에 삼청뢰소부가 있단 소립니까?”
오소 노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아니면 또 누구겠습니까.”
막간리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월도 짐작하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한립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두 분은 영족의 영왕을 가리키는 것이로군요.”
그는 마계의 세령지 앞에서 영왕이 백척의 몸을 빌려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습니다. 삼청뢰소부는 현재 영왕의 수중에 있고 내가 알기로는 한 장이 아닌 듯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막간리가 담담히 말했다.
“한 장이 아니라고요?”
오소 노조는 놀랐지만 곧 무언가를 떠올렸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록에 따르면 어차피 한 번의 천겁에 삼청뢰소부는 한 장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영왕의 명성은 저도 들어보았지만 그가 영족의 대승기 수사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두 분께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두 분의 어투로 보아 그다지 만만한 상대는 아닐 듯 한데요.”
“만만하지 않다 뿐입니까! 평생 그런 괴물과는 엮이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립의 물음에 막간리가 씁쓸하게 답했다.
“어째서 입니까?”
“영족은 우리 인요 양족을 합친 것보다 세력이 작지만 그 영왕이란 자는 백만 년 이상을 산 진정한 늙은 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소 노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백만 년 이상을 살았다고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허허, 이 일을 알고 놀란 것은 우리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한립의 놀란 표정에 막간리가 웃음을 흘렸다.
“영왕이 백만 년 이상 살아왔다면 그간 겪은 천겁의 숫자는 그럼…….”
“그건 모릅니다. 아무도 영왕이 겁을 치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없으니까요. 누군가는 영왕은 특수한 존재로 천겁이 십만 년에 한 번 간격으로 도래한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영왕은 한 명이 아니라 몇 대에 걸쳐 다른 존재가 맡은 직위에 불과하다고도 합니다. 무엇이 사실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소 노조가 신중하게 말했다.
“정말 백만 년 이상 살아온 노괴라면 저라도 꺼려질 것입니다.”
한립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백만 년 동안 인요족 대승기 수사들이 남겨 놓은 영족 영왕의 용모와 기운에 대한 기록이 일치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영족인들은 탄생이 극히 어려워 영왕의 실력이 대단한데도 세력을 늘리지 못하고 지금의 규모를 유지하는데 급급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또한 영왕은 줄곧 두문불출하며 지난 백만 년간 외부로 나선 것이 손에 꼽힌다고 들었습니다.”
막간리가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